파평윤씨 자료/파평윤씨 자료

파평윤씨의 5대 사적지

물텀벙 2008. 11. 9. 11:06

 

 

시조탄강 성지 용연(龍淵)

용연은 우리 시조 태사공께서 옥함을 타시고 신비롭게 탄강하신 성지로서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눌로리에 있으며 태고적부터 지하수가 솟아나는 천연의 큰 연못이었다.

태사공께서 옥함을 타시고 이 연못에 떠있는 것을 윤씨 할머니가 건져서 양육하였다고 전해 오고 있다. 그러므로 옛부터 『윤씨 연못』이라고 일러 오고 있는데 守護田 1,530평이 있어서 그 관리인이 수호하고 있다.

이 연못이 훤히 열리면 윤씨가 번창하고 연못이 메이면 윤씨가 쇠한다는 말이 있고 용연을 준설하는 후손은 현달한다는 전설도 있는데 옛부터 종종 준설한 것으로 추측되나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근대에는 서기1920년에 강화 종중에서 준설하고 「파평윤씨 용연」이라는 비석을 세웠다.

그 후 1961년에 파평윤씨 대종회에서 준설하였으나 예산 관계로 완전히 보수하지 못하였다.

용연비가 불행하게도 6.25동란 당시에 크게 손상되었으므로 1972년 3월에 문정공파 종중에서 "파평윤씨시조발상지비(坡平尹氏始祖發祥址碑)"를 세웠다.

그 연못 주위에는 草場이었는데 1976년 3월에 태위공파 예산 종중에서 수양버들 150주, 은행나무 6주, 벚나무 5주를 식부하였다.

용연은 옛부터 『윤씨연못』으로 공칭되어 왔으나 세부 측량 당시에 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시 국유로 편입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일정 당시에 파주읍에 거주하는 魯某가 開沓하기로 허가를 받은 것이 발각되어 우리 종중에서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한 결과 지적대장에는 『尹氏淵』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용연은 원래는 광대한 연못이었다고 추측되나 유구한 세월에 주위에서 侵懇하여 현재 지적도에는 2,531평으로 게재되어 있는데 1977년 1월 14일 대종회에서 종중 소유로 소유권 이전 등기를 완료하였다.

 

 

 

 

시조산소 봉강재

봉강재는 경상북도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 운주산 구봉하에 있는데 시조 태사공의 묘소와 별묘(別廟)를 모신 영역(瑩域)이다. 이 묘소는 일시 실전되어 그 지방의 토호 이하지(李厦榰)가 석물을 없애고 투장한 것을 후손들의 지성으로 다시 찾아 수호하게 되었다.

묘소를 심호(尋護)하게 된 것은 고전문헌과 그 지방 고노(古老)들의 구전으로 묘소의 위치를 알게 되어 당시 24세손 이공(理公)이 경주 부윤(府尹) 재임시에 심묘(尋墓)에 힘썼으나 단서를 잡지 못하였다가 영조13년(1737년)에 25세손 봉정공(鳳廷公)이 경주 영장(營將)으로 부임하여 묘소 부근을 파헤쳐 <대부윤(大夫尹)>이라고 크게 새긴 쇄비일편(碎碑一片)을 발견하여 모든 종인이 크게 기뻐하였으나 그것만으로 입증하기는 미흡하였다.

그 후 2년이 지난 1739년에 이공(理公)의 자 양래공(陽來公)(판서<判書>) 이 경상감사로 부임한 후 7일간에 걸쳐 그 주위를 파헤쳐 <선지 ․ 금강<先之 ․ 金剛)>(2세 공신공<功臣公>, 3세 복야공<僕射公>의 휘자새겨진 쇄비일편(碎碑一片)을 발견하여 태사공의 묘소에 틀림없음을 확인하고 이가(李家)가 투장하였던 분묘 6기를 전부 파서 이장시켰었다. 그 다음해 판서 헤교공(惠敎公), 감사 양래공(陽來公), 부사 동설공(東卨 公), 승지 휘정공(彙貞公), 현령 사도공(師道公), 참판 용공(容公) 제위(諸位)가 상의하여 널리 종문에 통고하고 태사공의 묘역을 다시 봉축하는 동시에 묘비(25세손 판서 혜교 찬<惠敎 撰>, 24세손 부윤 휘정 서<彙貞 書>) 석물을 갖추고 제전 일석(一石)지기를 마련하여 매년 10월10일에 시제를 봉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후 10여년이 지난 서기1751년 신미(辛未)에 27대손 광소공(光紹公)(지돈령<知敦寧>)이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분암(墳庵)(봉서암<鳳捿庵>)과 재사(齋舍)를 창건하고 승도(僧徒)로 하여금 묘역을 수직(守直)케 하며 제기 의물을 완비하였다. 그 때에 광소공(光紹公)은 전문(錢文) 50냥, 재목 15간, 제사용 기물 일절을 자담(自擔)하였고, 경상감사로 부임한 26대손 동도공(東度公)(영의정<領議政>)이 전문(錢文) 80냥, 위토 일석(一石)지기(240 냥), 정조(正租) 180석 등을 헌납하였으며 그 외에 후손들의 성금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부터는 경상도 지방에 수령으로 부임하는 후손들은 반드시 위 토를 헌납하게 되어 많은 위토가 마련되었다. 그 후 1833년에 재사(齋舍)뒤에 봉강서원을 창건하여 태사공의 위비(位牌) 를봉안하고 춘추로 제사를 드리다가 대지가 협착하여 1846년에 치동(治洞)으로 이축하였던 것인데 1857년에 증축하고 민진원(閔鎭遠), 김창집(金 昌集) 2公을 추배하였다. 그러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서원은 철폐되고 그 자리에는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그 때 제사(齋舍)뒤에 별묘(別廟)를 새로 짓고 태사공의 위패를 이안(移安)하여 모시고 현재까지 춘추로 제사를 드리고 있다.

봉첩암(鳳捷庵)은 서원을 창건할 당시에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자세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심묘후(尋墓後) 3백여년에 누차 재사(齋舍)의 중수가 있었으며 그 기록이 봉강재에 보관되어 있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서기1935년에 재사(齋舍)가 심히 퇴락되어 당시의 봉강재 도유사인 31세손 석훈씨(奭勳氏)의 노력으로 대구(大邱) 경보(經普), 청송(靑松) 용구(鎔求), 부산(釜山) 소득(小得), 영해(盈海) 경모(敬穆) 등 제공(諸公)의 거액 성금과 기타 전국 각 종문의 성금으로 크게 개 ․ 증축하였다. 그 다음은 서기1973년에 봉강재 종회장에 취임한 두상씨(斗相)가 주관하여 대구 종문의 거액 헌금 및 전국 종문의 성금으로 봉강재 입구의 차도를 확장하는 동시에 재사(齋舍) 일부를 보수하였다. 태사공 묘하에는 근래까지 신도비가 건립되어 있지 않았던 것인데 1971년에 32세손 구보(龜普)씨의 성금으로 비로소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또한 1979년에는 대종회와 거경종친(居慶宗親)의 성금으로 향사 때에 제관 유숙실(祭官留宿室)로 사용할 수 있고 회의실로도 겸용할 수 있는 회관이 신축되었다.

 

 

 

 

문숙공 유허지 상서대(尙書臺)

상서대(尙書臺)는 파평산 동편 파주시 법원읍 웅담리 330번지에 있는데 문 숙공께서 수양정(修養亭)으로 쓰신 별저(別邸)가 있던 유서 깊은 유허지(遺 墟址)로써 파주 향토유적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숙공께서 여진 정벌을 하시고 개선하셔서 별저로 쓰시던 곳이며, 장내(墻 內)에는 친히 식수하신 괴목 수주가 있었다고 하며 상서대 옆에는 연못이 있어 공께서 독서와 낚시를 즐기시며 심신을 휴양하시던 곳이기도 하다.

문숙공께서 여진 정벌을 마치고 개선할 때 여진국인(女眞國人) 웅단(熊丹) 이란 여인이 따라와서 정성껏 시중을 받들다가 문숙공께서 서기1111년 5월 8일에 하세하신 후 못 옆 암상(岩上)에 올라가 통곡하고 못에 투신 순사한 사실이 있어 이곳을 그 후 웅담(熊潭)이라고 명명하고 동명(洞名)도 웅담리 (熊潭里)라고 하였으며 그 바위를 낙화암(落花岩)이라고 하였다. 파주군사(坡州郡史)에 보면 거수명목사기(巨樹名木史記)에 둘레가 11척 수 고(樹高)가 30척이나 되는 괴목 2주가 있는데 웅담리의 괴목은 상서대 장내의 정목(亭木)이니 고려왕조의 공신이신 윤문숙공이 식수하였다고 기록되었다. 이 두 나무는 임진왜란때 병화(兵火)로 죽었던 것인데 1주만 다시 소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도 밝히고 있다. 장내(墻內)에는 상서대라고 각한 비석이 있고 종중에서 그 장내에 장(墻)을 설치하고 문강공이하 5위 등 6위의 비위(碑位)를 모시고 추원단(追遠壇)이라 고 하였으며 그 후 상서공(尙書公)과 충간공(忠簡公) 2위를 추배(追配)하였으며, 현재는 文康公(諱 彦頤), 侍郞公(諱 惇信), 留守公(諱 商季), 錄事公 (諱 復元), 御史公(諱 純), 文顯公(諱 珤), 代言公(諱 安적), 良簡公(諱 安 淑), 寺令公(諱 輔), 判書公(諱 莅), 鈴平君(諱 陟), 忠簡公(諱 承順) 등 12位 의 선조님들의 碑를 모시고 있다. 고종때 연천에 사는 박경선(朴慶善)이란 者가 단소 위 삼리허(三里許)에 작 답(作畓)하고 인수로(引水路)를 개설하려고 괴목 1주를 벌목하려 하였으나 우리 종중에서 이를 금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경선은 그때 우리 종중을 무시하고 인부를 시켜 강제 벌목하려 하였으나 성사하지 못했다. 박경선은 그래서 우리 문중을 모해코자 尹家들이 역모를 꾀하여 허설제천(虛設祭天)하고 있다고 당국에 밀고하였다. 당시 영의정인 김좌근(金佐根)이 포장(捕將) 김병국(金炳國)을 시켜 조사한 바 문강공(文 康公)의 제단(祭壇)임이 판명되어 무사히 넘겼다. 영의정 김좌근은 박경선을 무고죄로 흑산도에 귀양을 보냈던 것이다. 박경선의 아들 박원중은 그 후 원한을 품고 상서대를 봉퇴시키려고 단하에 또다시 수로를 개설하려 하였는데 파주군내 유림들이 상소하여 영의정 김좌근이 박원중을 함경북도 경원으로 귀양을 보내 무사했던 것이다. 그 후 1960년(庚子年) 4월 추원단을 광축(廣築)하고 낙화암 위에 비석을 세우고 초혼(招魂)해서 웅단(熊丹)할머니의 혼을 위로하고 위령제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추원단 제향(祭享)은 매년 음10월2일에 거행하였으나 태사공묘소 추향일과 문숙공묘소 추향일이 변경됨으로써 1979년부터는 음10월6일로 제향일을 정하였다가 음력 3월10일에 행사한다.

 

 

 

 

성역 여충사(麗忠祠) - 문숙공 묘소

여충사는 선조 문숙공의 묘소와 사당 및 교자총이 있는 우리 씨족의 성역이며 호국유적으 로서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다. 문숙공의 묘소는 고려 예종6년(1111)에 예장한 것인데 조선조 연산군 당시에 파주군민 을 강제 이주시키고 수렵지구로 삼았으며 또 병화(兵火)가 잦았던 탓으로 수호가 소홀히 된데다가 당시 종가가 미약한 틈을 타서 일시 세도만 믿고 심모(沈某)가 몰래 투장하였기 때문에 실전되었던 것이다.

청송심씨 가문에서는 광해군 6년(1614)경부터 현종13년(1672)까지 사이에 묘뒤에 새 무덤을 투장한 바 있었다. 문숙공 묘소의 곡장을 헐고 묘비를 파손하여 묻었기 때문에 그 후에 우리 선인들이 심묘(尋墓)에 부심하였으나 좀처럼 단서를 잡을 길이 없었다. 그런데 영조39년(1763)에 이르러 심문(沈門)에서는 그 투장한 사실을 더욱 음폐하기 위 하여 심지원의 무덤 앞에 있는 고총(古冢)을 작은 무덤으로 사초하면서 다른 곳에 있는 아 호문의 고비(古碑)를 옮겨다 그 고총 앞에 세운 것을 우리 종중에서 발견하고 조사하기 시 작하였다. 그런데 이호문의 후손되는 자를 추궁한 결과 심문에서 토지를 사주면서 그 고총이 자기 조상의 무덤이라고 사칭하고 제사를 지내 달라면서 청탁하기로 그 고비를 주었다는 사실 을 실토 받기에 이르렀다. 그와 동시에 묘하 길 옆에 있는 고분을 파헤쳐 그것이 종중문헌 에 전해오는 교자총(轎子塚-교자는 여진정벌 당시에 임금께서 하사하였던 수레이다)이 틀림이 없음이 확인되었다. 종전부터 그 고총은 “윤시중의 분묘(尹侍中 墳墓)”라는 전설이 없지 않았던 것이나 고 증이 없었던 차에 이모(李某)의 실토와 교자총을 발견하여 그 고총이 문숙공의 분묘에 상위 없 음이 비로소 확인된 것이다. 그와 같은 사실이 입증되어 종중에서 회의를 거듭한 끝에 좌윤 면교공(左尹 勉敎公)이 선두에 나서서 영조대왕 앞에 상소하였고 좌상 동도공(左相 東度公) 후에 영의정이 국왕에게 직접 상소한 일이 있다. 영조대왕은 이 사건을 경기감사에게 처리하라고 명령을 내리셨는데 비석과 지석이 없으므로 다만 이호문의 고비를 제거시키고 양가에서 그대로 수호하라는 판정을 내렸을 뿐이었다. 우리 종중에서는 그대로 순종할 수 없으므로 다시 현장을 답사하다가 그 고총 좌편 10보 밖에 있는 도랑창에 묘비를 묻었다는 고노(古老)의 전언을 듣고 파헤쳐 드디어 문숙공의 묘비를 깨뜨려 묻었던 묘비 조각을 발견하였다. 그렇게 되어 좌상 동도공께서는 다시 국왕에게 문숙공의 분묘를 고제(古制)대로 개봉축하고 문숙공의 묘소도 심호하도록 하는 어명을 앙청하였던 것이다. 영조대왕은 그 상주에 접하여 “천도(天道)가 소소하며 후손들 의 성의가 지극하여 천년 고비를 찾았으니 주군(州軍)을 동원하여 문숙공의 묘는 종전대로 봉안할 것이며 심지원도 정승을 지낸 왕실의 외가이니 동산소(同山所)하라”는 비답을 내리셨다. 그것은 영조40년(1764)이었는데 주군이 동원되어 심지원의 무덤 앞을 깍아 문숙공의 분 묘를 크게 봉안하였던 것이다. 그때 영조대왕은 예관을 보내어 문숙공 묘전에 치제(致祭)하시었다. 그렇게 되어 심가의 세 무덤은 그냥 남아 있게 되었으며 선조 문강공의 묘소는 영구히 실전되었다. 그 산송(山訟) 당시에 종중에서 나가셨던 도사 희복공(都事 熙復公, 시조24세손 남원백파)은 국왕 앞에서 불경한 언사가 있었다는 죄과로 벌을 받고 장독으로 종명되었다. 그때 심정최도 투장한 죄목으로 처벌되었던 것이다. 심지원은 그 조부의 무덤을 투장했을 뿐만 아니라 현종13년(1672)경에 자신도 문숙공 분묘 뒤에 투장되었던 것이며 300여년이 지난 1950년 6.25 동란 당시에 미군 푹격기에 의하여 심지원의 분묘에 폭탄 2발이 떨어져 분묘가 파헤쳐지고 비석이 파손되어 달아난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문숙공 묘뒤에 투장한 죄악에 대한 천벌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심묘 당시에 종중의 성금으로 와가(瓦家) 9칸, 초가 8칸의 묘사를 짓고 위토답 29두락과 전(田) 5일경을 매입하였다. 그 후 순조5년(1805)에 이르러 유사 각씨(有司 殼氏) 주관으로 제청으로 와가 14칸을 신축하여 이를 분수재(汾水齋)라 칭하였다.

철종3년(1852)에 묘소의 사초를 다시 할 때에 토산종인 승원(承源)씨가 위토전 1일반경을 헌남하였다. 그리고 철종7년(1856)에는 영풍군 찬공의 주관으로 제청과 묘사를 크게 보수하였다. 그 후에 일정말기 제2차세계대전 당시에 묘역의 송목을 전부 강제 공출 당하게 되어 수백만 그루 조림한 송목이 전부 벌채되었다. 그 때에 시조 31세손 석훈(奭勳)씨가 군수에게 교섭하여 재사건축용 임목만을 넘겨 받아 당시 경성에서 개업하고 있었던 의학박사 치형(致衡)씨의 성금 5천원과 기타의 성금으로 현재의 재사를 개축하였다. 단 행랑은 1959년 당시 대종회장의 주관으로 건축하였다. 묘사는 수시 보수되어 왔으나 퇴락되었기 때문에 1972년에 철훼하고 당시 대종회장의 주관으로 묘사를 개축하였다. 분수영당은 1932년 종약장 용식(容植)공 당시에 석훈(奭勳), 석도(錫濤)의 주관으로 황해도 옹진 종중의 성금 1만원 기타의 성금으로 신축하고 문숙공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영정은 함경남도 북청 만뢰사에 옛부터 봉안되어 있는 장군복 영정을 모사하여 모셨고 문관 복 영정은 그때 새로 그려서 봉안한 것이다. 교자총은 문숙공께서 여진정벌 당시에 국왕으로부터 하시받은 수레를 매장한 것인데 철종12년(1861) 개성유수 교성(敎成)공이 개수립한 교자총비가 있다. 또한 심묘시 견문록 에 따르면 묘소의 청룡 밖에는 전마총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곳은 여진정벌때 국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전마를 묻은 곳이라고 전한다. 문숙공 신도비는 1966년에 시조 33세손 경수(敬秀)씨의 독담으로 건립되었는데 비문은 문학박사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씨 찬이요 시조 34세손 석오(錫五)씨의 서이다. 심묘 당시에 곡장을 쌓지 못하였고 상석 묘비 문관석 및 망두석을 갖추었을 뿐이었는데 1968년 석훈씨가 대종회장에 취임하여 3년간에 걸쳐 각 문중의 성금으로 곡장을 쌓고 무관석 장명등 양마석 동자석 등 많은 석물을 새로 갖추었고 상석은 시조 32세손 기주(起柱)씨의 헌금에 의해 큰 것으로 갈아 놓았다. 그때 영당과 재실도 보수하고 영당 앞에 작은 연못을 팠으며 그 주위에 9성의 표석을 세 웠다. 묘산에는 노송 4주가 있었는데 1956년경에 유사가 재실수리비에 충당한다는 구실로 매각한 것을 종인 태길(泰吉)씨가 그 대금 1만2천원을 돌려주고 보호한 것이다. 문숙공의 묘소는 서기1972년에 지방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 파주군수가 관리책임자로 되어 있다. 분수재 문숙공 묘산은 13정보인데 실묘되었던 당시는 심가가 투장하면서 관리하여 오다가 심묘된 후에도 그 묘하에 그들이 거주하여 관리하였던 모양이다. 조선조 당시는 사패지로 받지 않으면 산림은 국유되었고 개인소유는 인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묘하에 우리 종인이 거주하지 않았던 탓으로 산림은 심가들이 관리한 것 같다. 분수원 묘산은 심문에서 투장하고 사패지로 받은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심묘 후에도 임야 소유권 문제로 분쟁이 계속되어 왔다. 그런데 일정초기에 심가측에서 소유권확인청구소송을 제기하였으며 당시의 판사가 우리 종중에서 증거로 제출한 국왕의 치제문을 채택하여 그 임야는 파평윤씨의 소유로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왜정 초기 일재강점이 되던 을사조약 무렵에 심가의 종손 심인구가 그 묘산의 송목을 대금 700원을 받고 일본인에게 매각한 사실이 있었다. 우리 종중에서는 묘하에 거주자가 없었던 관계로 전연 모르고 있었는데 그 매매를 소개한 신석일(申錫一)이 구전 관계로 우리 종중 유사 희배(熹培)씨에게 밀고한 사실이 있다. 그러자 유사 희배씨가 고발하여 심인구는 구속되고 종중유지 30여명의 연서로 당시 초대통감 이등박문에게 진정하여 이등통감의 명령으로 그 송목 매매는 해약된 바가 있다. 그 후에는 심치겸, 심치량 양인이 언필칭 그 송목은 자기네 심씨가 200여년간 조림한 것 이므로 심씨소유로 확정해 달라는 소유권확인청구소송을 제기하였던 것인데 결국 수석판사는 “지난날 국왕으로부터 윤문숙공의 묘산 송림으로 확증한 것이므로 심씨소유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시하여 우리 종중에서 승소함으로써 그 묘산은 현재 우리 종중소유로 등기되어 있으며 비록 동산소라 할지라도 심가의 소유는 일평도 없는 실정이다. 한편 대종회장 남의(南儀)씨가 취임한 후 1976년 11월 21일 개최된 종중총회에서 우리 종족의 오랜 숙원인 문숙공 동상 건립이 결의되고 곧이어 문숙공기념사업회가 발족하자 백만 종친의 열성적인 참여와 각계각층의 적극적인 협찬을 받아 마침내 서기1980년 5월 8일 각계인사 및 전국종친 2만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역사적인 문숙공동상제막식이 거행 되었다. 이와 아울러 5대사적현창사업도 연차적으로 확대 추진되어 1978년부터는 우리 의 성역인 분수재의 정화공사가 정부의 호국유적사업의 일환인 호국순례지로 지정 되어 이미 2억2천만원이 투입되어 일차 공사로 사당 및 홍전문신축 재실이축 신도비위치 변경 진입로 주차장 조성 및 민가철거를 위한 역사가 시행되었다. 또한 사당에 봉안되는 새 문숙공 영정이 문공부 위인선열영정심의위원회에서 표준영정으로 제정 확정(폭100센티미터 길이 178센티미터)되어 문공부 추천으로 일랑 이종상(一浪 李鍾祥)화백 집필하에 완성을 보았다.

또한 서기1981년에 새로이 준공한 사당에 문숙공의 표준영정을 채택하여 봉안하였고 서기1982년에는 분수영당을 여충사(麗忠祠)로 명명하였다. 이제 통일로 주변에 위치한 우리 문숙공 묘소 및 사당 일원의 묘역은 우리 종중의 성역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 국민의 민족정기와 국토통일의 기상으로서 길이 보존수호되어야 할 국민적 성역으로서도 숭앙의 대상이 되어 서기1987년 12월 10일 국가사적 제323호로 지정받았다. 여충사가 국가사적으로 지정됨에 따라 대종회에서는 당시 대종회장 성민(誠敏)씨와 문숙 공윤관대원수기념사업회 집행위원장 택중(鐸重)장군을 비롯한 임원들의 적극적인 노력으 로 1991년부터 1992년에 걸쳐 전국 후손들의 성금 약 12억원을 거출하여 묘역 정화사 업을 시행하여 경내 타성인 토지 매입, 묘역성토, 곡장보완 참배로 이설 와삼문 신축, 전마총 복원, 사적비 건립, 사당단청, 주차장 확장 및 조경 부대공사 등 대대적인 공사를 하였고 1998년에는 전액 정부의 지원(6억7천만원)을 받아 여충사 사당 왼편에 충효관을 건립하여 일반 국민 및 우리 후손들의 충효사상을 고취시키는 교화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문숙공 선조의 묘를 우리 후손들의 불찰로 한때 실전하였다가 1763년 심묘하게 된 이래 약4백년 도안 청송심씨와의 사이애 통한의 역사는 계속되어 오다가 천우신조로 우연히 양문중 사이에 대화의 길이 열려 지난 2005년도 대종회장 정 원(廷源)회장과 청송심씨대종회 심명구(沈明求)회장 주도하에 파윤에서 문숙공 묘소 청룡 밖 산판 2천5백평을 청송심씨측에 할애하고 우리 산판내에 산재한 심지원공 묘를 비롯한 18기의 심씨측 묘를 전부 이장키로 합의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국가사적인 문숙공묘 영역에 위치한 경기도 문화재인 심지원공 묘의 이장 절차가 모두 문화재 보호법에 저촉되는 절차상의 애로가 있기 때문에 시일이 지연되어 오다가 2008년도 철병(澈炳)대종회장의 임기 때 심묘 이장 공사는 완료되고 양문중 화해비도 이 때 세우게 되었다.

 

 

 

 

태사공의 무예 연마장 치마대(馳馬臺)

시조 태사공께서는 파주 파평산에서 글과 무예를 닦으시었는데 파평산 마루에서 공이 말을 달리시던 곳을 치마대(馳馬臺)라고 하며, 千有餘年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때 길을 닦았던 석축이 아직도 남아있다. 치마대에는 공께서 훈련하시다가 타고 다니시던 애마가 죽은 후 다섯 개의 철마를 만들어 놓으셨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 후 어떤 철공이 이 철마를 무심코 훔쳐갔다가 즉사하였다고 한다. 그때 같이 있던 사람이 겁을 먹고 후에 그 자리를 흙으로 역시 다섯개의 철마를 구워 놓았으니 그 모양이 아주 작 아서 말 같지가 않았다고 한다. 파주읍지(坡州邑誌)에도 치마대가 파평산에 있으며 윤태사공(尹太師公)이 무예를 연 마하시던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파평산의 해발 490m 되는 자리에 금강사(金剛寺) 사지(寺趾)가 있고 지금은 미타사(彌陀寺)가 그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 시조 태사공으로부터 2세 공신공(功臣公-諱 先之), 3세 복야공(僕射公-諱 金剛)에 이르는 3대가 대대로 금강사 일대에서 세거(世居)하셨을 뿐만 아니라, 특히 태사공께서 용 마(龍馬)를 자득(自得)하시고 무예를 연마하신 유서 깊은 사적지로서 3세 상서성 좌복야 금강공(尙書省 左僕射 金剛公)께서 9백여년전 사찰을 재건 하도록 하시어 공의 이름을 따라 금강사가 되었으며, 지금도 미타사 경내 에는 태사공을 비롯한 열선조께서 즐겨 마시면서 무예를 단련하셨다고 전해지는 약수의 우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일찍이 용연에서 탄생하신 태사공께서 성장하시어 새 왕조 고려창업에 무훈을 빛내신 유허지에 세워진 금강사는 불교 전성기이던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왕조 때 까지 중수되어 보존되어 온 곳으로서 사지(寺趾) 그 일대는 문숙공까지 5대에 이르는 화랑과 호국의 얼이 감돌고 있는 듯하다. 태사공 유허지 금강사 일대야 말로 우리 파평윤씨 정기의 진원지나 다름없는 성스러운 터전으로 최근 현지답사를 통하여 사지(寺趾)가 확인되었고 미타사와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에 보존된 문헌(文獻), 전적(典籍)으로 미루어 비로소 고증을 굳히게 되었다. 한편 미타사 경내의 우물에는 석불이 모셔져 있어 후손으로써 더욱 숙연한 감회를 자아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