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字는 경즙(景楫), 號는 죽호(竹湖), 희증(希曾)의 둘째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킨 공으로, 장례원 사평(1598)에 올랐다. 그러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망락당(望洛堂)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이웃돕기에 전심 전력을 하였다. 성격이 너그럽고 두터우며 인자하였다. 한편 김 동강, 김 죽암, 김 유연당, 김 허주, 이 오봉, 김 동리와 사귀면서 <칠송정 동유록>을 편찬하였다. 문집 2권이 남아있다. 신풍리의 만둔암사와 죽고향사에 제향되었고, 후손들이 죽호정(1922)을 세웠다. 어느 날, 한 어부가 신풍리 윤섭의 집으로 찾아와서 자라를 사라고 하였다. 윤섭은 처음 보는 자라를 불쌍히 여겨, 사서 즉시 1.5km 떨어진 낙동강에 돌려보냈다. 낙동강 변 갯밭 12마지기의 밭에 그 해 조를 재배하였는데, 조가 익어갈 무렵인 9월에 큰 홍수가 나서 강이 범람하였다. 그러나 윤섭의 조밭만은 자라의 새끼들이 조의 이삭마다 까맣게 붙어서 흙탕물의 피해를 막아 주었다고 한다. 살려준 자라가 은혜를 갚았다는 것이다. 신풍리에는 150여 가구의 그의 후손 파평 윤씨들이 살고 있는데, 이 자라의 결초보은(結草報恩) 전설을 교훈으로 삼고 있다. 배위는 禮安金氏이시다. 묘소는 지보면 가산(加山)에 雙墳으로 모셨다. 표석이 있다. 계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