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109. 이 글에 이의나 추가 정보가 있으시면 쪽지나 댓글을 남겨 주세요. |
字는 계초(季初), 號는 의관(宜觀), 參判 부(釜)의 아드님이시다. 1583년(선조16) 복병장(伏兵將)으로 야인(野人: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하였고, 1589년 윤탁연(尹卓然)의 천거로 요직에 등용,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명원(金命元)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왜적과 싸웠다. 안동 판관(安東判官)을 거쳐 숙천 부사(肅川府使)를 지내고 이듬해 전주 부사(全州府使)로 전직되어 금산(錦山)에 쳐들어온 왜군(倭軍)을 막지 못한 데다 전주의 관고(官庫)를 소각하여 많은 미곡을 소실했다는 죄로 파직당했다. 다시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등용되고 온성(穩城)과 회령(會寧)의 부사(府使)를 역임하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1597년 함경도도순문어사(咸鏡道巡撫御使) 유몽인(柳夢寅)의 천거로 표리(表裏)를 하사받고 가자(加資)되었다. 1599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1601년 우승지(右承旨). 경주 부윤(慶州府尹), 이듬해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事), 1603년 해주 목사(海州牧使) 등을 거쳐 1608년(광해군 즉위) 전라도 관찰사 1610년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이어 1612년 양양 부사(襄陽府使)에 재직중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관련되어 파직당했다가 1615년 능창군(綾昌君) 전(佺)의 추대 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사형에 처해졌다. 문집에 의관유고집(宜觀遺稿集)이 전해진다. 배위는 晉州姜氏이시며 縣監 흠(欽)의 따님이시다. 묘소는 寺洞 乙原에 合葬으로 모셨으며 白軒 李景奭의 撰碑가 있다. 선조(宣祖)5년(1572년), 별시(別試) 병과2(丙科2) 계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