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 인물/昭靖公派

소 154.

물텀벙 2010. 9. 5. 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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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字는 자인(子仁). 號는 명재(明齋). 유봉(酉峯). 魯西 선거(宣擧)의 아드님이시다.

 소론(少論)의 종주(宗主)로서 유계(兪棨), 권시(權), 김집(金集)의 문인이며 후에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 되었으나 절교했다.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윤선거로 이어지는 서인(西人) 계통의 예학(禮學)을 이었다.

 아버지와 유계(兪棨)에게 공부하고 뒤에 장인인 권시(權諟)와 김집. 송시열(宋時烈) 등에게서 배웠다.

 1663년(현종 4) 학행(學行)으로 천거된 이래 현종 때 지평(持平)·진선(進善)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682년 호조참의(戶曹參議),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참찬(右參贊), 1701년 좌찬성(左贊成), 1709년 우의정, 1711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송시열의 문하에서 특히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이 났지만, 송시열과 반목하여 당쟁을 벌였다.

 公은 아버지가 죽었을 때 윤휴(尹鑴)의 조문(吊問)을 받았는데, 尹鑴와 사이가 나쁜 송시열은 이 때문에 그를 크게 불쾌하게 여겼으며, 또 숙종 초에 남인(南人)이 송시열 일파에게 화를 입혔을 때에도 남인과 인연이 많았던 그가 화를 면함으로써 송시열은 더욱 그를 의심하였다. 또한 아버지의 묘갈명(墓碣銘)을 송시열에게 부탁하였으나 그 말미의 내용이 야유하는 뜻의 문장이어서 불만을 품던 중, 1681년 송시열의 덕행과 학문상의 결함을 토로하는 이른바 신유의서(辛酉擬書)를 지었다. 이로써 마침내 사제간의 의리는 끊어졌는데, 두 사람 사이의 반목(反目)을 "회니(懷尼)의 반목" 또는 "회니의 사건" 이라고 한다. 이는 송시열이 회덕(懷德:대덕군 회덕면), 윤증이 니산(尼山:논산군 노성면)에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개인적 감정과 함께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로 서인(西人)이 강(强). 온(穩) 양파로 분리될 때 연소한 사류(士類)들에 의해 온건파인 소론의 영수(領袖)로 추대되었으며, 이로써 노론. 소론의 당쟁이 격돌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니산에 머물며 학문과 강학에 힘썼다. 죽은 후 1715년 간행된 유계의 저서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跋文)에서 정호(鄭澔)가 그를 비난한 것을 계기로 당쟁이 격화되었다. 결국 소론이 거세되면서 이듬해 관직을 추탈 당했다가 1722년 복관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시다.

 배위는 安東權氏이시며 左尹 炭翁 시(諟)의 따님이시다.

 묘소는 公州 香芝 白雲洞 艮原에 모셨다.

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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