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字는 성좌(聖佐). 號는 영은(永隱). 白川公 경(坰)아드님으로 벼슬이 通政大夫 敦寧府都正이셨고 세째 아드님이 귀하게 되시어 正憲大夫 吏曹判書로 追贈되셨다. 그 아버님 배천공께서 소시적에 술에 취해 꽃나무 아래에서 잠이 드셨다가 꿈에 나무 한 주에 꽃이 네잎이 피었는데 꽃이 둘은 피기는 하였으되 시원치 않고 그중 세째 꽃이 가장 아름답게 피었는데 돌연 맹열한 바람이 불어 꺾이었고 그 꽃이 꺾일 때 넷째 꽃이 상하였다. 이러한 이상한 꿈을 꾸신 후에 그후부터 아들 4형제를 두시어 장남은 輔商이요, 둘째는 佑商이고 셋째가 弼商이니 領相公이요 네째가 興商이니 즉 공이었다. 세째 필상은 영의정에 이르셨지만 연산조 때 화를 당하여 비명에 돌아가셨고, 네째인 공의 운명은 과연 어떠할지, 일찍이 영상공께서는 공에게 “자네는 먼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게, 나도 또한 뒤에 따라 갈터이니” 하셨다. 공은 벼슬을 버리고 남으로 안성을 향해 가셨다. 공이 표연히 말을 몰아 고향으로 떠나가실 때 영상공께서도 전별을 하시면서 한강을 건너 보내실 때 집안에 간직하였던 열가지 보배를 주셨는데 그중에 물소뿔로 만든 부채는 근래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모두 공의 고매한 식견을 높이 평가 평가하였는데 陽谷 蘇世讓 같은 분은 말하기를“세상 사람들이 모두 미혹하였지만 공만은 홀로 이 일을 내다 보았기 때문에 그곳으로 내려가신 것이다” 라고 하여 일대의 화제가 되었다. 공이 말고삐를 잡고 채찍질을 하시면서 고향길을 가시는 동안 도중에 읊은 시가 수백수나 되는데 모두 기묘하여 그후에 이 시를 읊은 사람이 많았다. 공이 고향으로 내려가서 비봉산(飛鳳山) 밑에 서당을 지어놓고 이름하여 永隱堂이라 했고, 또한 분토산(粉土山) 밑에 한집을 지어 백직제 (白直齋)라 이름하여 배우는 사람과 함께 경사(經史)를 토론하시고 간혹 거문고와 술, 시로써 취미를 삼으시고 한가한 때는 배로써 앞내에서 선유하시니 보는 사람마다 선옹(仙翁)이라 하였다. 공이 忠과 信으로써 鄕黨에서 행하시니 그 고을 사람들이 官에 소송을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공에게 문의한 후 불가하다고 하시면 고소치 않았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이 배우러 오면 의식을 주니 食客이 매일 10여명이나 되었다. 妹夫 申公이 수령으로 있을 때 벼루집 하나가 진귀하여 값나가는 것이므로 공에게 선사하였으나 공이 받지 않으시고 글을 써서 충고하시되 “이것이 무릇 민가 소산이다” 하시니 申公이 사과하였다. 配는 彦陽金氏로서 縣監 尙一의 따님이다. 6남 2녀를 두셨는데 장남은 仁이요, 다음은 傅, 홍(인+弘)인바 다른 삼형제는 화를 당하여 전하지 못하고 있다. 공은 자녀가 12남 2녀나 되었다. 甲子年에 영상공이 화를 당할 때 공과 그 아드님 부와 홍 두분은 모두 귀양갔었는데 그때 부께서는 掌令 벼슬을 하셨고 홍께서는 郡守이었다. 당시 연산군이 공의 아드님이 많다는 것을 듣고 전가를 몰살하라고 명령하였으므로 자손들이 혹은 변명을 하여 난을 피할 적에 서모인 김씨의 성을 따서 김씨라고 한분도 있는데 庶子 德源은 弓歸池라고 하여 화를 면했고 德陽과 공의 손자님 克煥은 모두 화를 당했다. 克煥은 傅의 아드님이시다. 중종 원년(丙寅年)에 놓이어 돌아오셨지만 傅께서는 昌原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작고하시고 그 외에 도망하여 숨어 계시던 분은 모두 귀환하셨다. 공은 중종 4년(己巳)에 80세의 향수로 세상을 떠나셨다. 배위는 彦陽金氏이시며 縣監 상일(尙一)의 따님이시다. 후배위는 慶州金氏이시며 通德 윤호(允灝)의 따님이시다. 묘소는 安城 加土面 粉土山 辛原이며 두 부인도 그곳에 모셨다. 한 때 失傳되었다가 1798(무오)년에 尋護하게 되었다. 영은당(永隱堂)과 백직재(白直齋) 舊址가 거기서 멀지않다. 계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