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字는 계형(季亨), 號는 회와(晦窩), 부윤(府尹) 이(理)의 아드님이시다. 1708년 식년문과(式年文科 ※세보에는 1705乙酉文科로 記錄됨)에 병과(丙科)로 급제, 주서(注書)에 초임(初任)되어 글씨를 빨리 써서 비주서(飛注書)라는 별명을 들었다. 이어 지평(持平). 사서(司書). 정언(正言) 등을 역임, 1716년 문학(文學), 필선(弼善), 헌납(獻納), 사간(司諫), 이듬해 집의(執義)로 경상우도 암행어사(慶尙右道暗行御史)로 나갔고, 보덕(輔德)을 지냈다. 1720년 승지(承旨), 병조 참의(兵曹參議),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1721년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중에 죄인 박세명(朴世明)을 즉시 도성(都城)에 효수(梟首)하지 않았다는 죄로 국문(鞠問)을 받았으나 곧 석방되어 동지겸주청부사(冬至兼奏請副使)로 청나라에 갔다. 이듬해 귀국했으나 당시 집권층이던 소론(少論)측으로부터 청나라에 가서 경종의 질병을 함부로 발설했다는 죄목으로 파직, 갑산(甲山)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725년 노론(老論)의 재집권으로 풀려나와 승지로 기용, 이어 공조참판(工曹參判)을 거쳐 대사간으로 재직중 탕평책(蕩平策)을 건의하여 왕의 신임을 받았으나 윤심형(尹心衡)의 논척(論斥)을 받고 영월부사(寧越府使)로 좌천당했다가 곧 병조참판(兵曹參判)이 되었다. 이어서 안동부사(安東府使)를 거쳐 1729년 예조와 병조의 참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등을 역임, 다음해 함경도관찰사, 1732년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경상도관찰사, 이어 도승지(都承旨). 평안도 관찰사.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형조. 공조. 호조의 판서, 대사헌, 1738년 좌참찬(左參贊) 등을 지내고 1743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가 되었다. 1746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신임사화(辛壬士禍) 당시의 소론을 통박하는 연소문(聯疏文)을 올려 한때 삭직(削職)되었다가 판돈령부사에 이어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글씨와 시문(詩文)에 능했다. 글씨에 영상윤인경비(領相尹仁鏡碑), 엄흥도묘갈(嚴興道墓碣) 등이 있다. 시호는 익헌(翼獻)이시다. 배위는 林川趙氏이시며 父는 司諫을 지내셨다. 후배위는 高靈朴氏이시며 參奉 창서(昌瑞)의 따님이시다. 묘소는 楊州 洪福山下 酉原에 三合葬으로 모셨다. 숙종(肅宗)34년(1708년), 식년시(式年試) 병과5(丙科5) 계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