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字는 필보(弼甫), 판중추원사를 지낸 번(璠)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풍채와 재질이 범상치 않아 주위의 관심을 받았다. 1444년 음보로 세자세마가 되었다가 많은 관직을 지낸 후 내자직장을 역임하였다. 직장으로 있으면서 몸가짐과 법도에 어굿나는 일을 보면 누구라도 반드시 지적하곤 하였다. 1455년 6월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는 왕후의 지친이라서가 아니라 그 인품과 역량을 인정받아 군기감정으로 출사하였고, 이어 정랑으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1458년 부지통예문사가 되었으며, 형조참의. 이조참판을 거쳐 1460년 호조참판에 올랐다. 이때 의정부의 전리를 마음대로 문책한 탓으로 탄핵을 받고 관직이 박탈되었다. 다음해에 다시 등용되어 인순부윤에 임명되었으며 한성부윤을 거쳐 중추원부사를 지냈다. 1462년 숭정대부로 승계하면서 중추원사에 등용되었고, 같은 해 8월에는 공조판서로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임하였다. 1466년 지중추부사를 거쳐 성종이 즉위하던 1469년 12월에는 대광보국숭록대부가 되면서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성종을 옹립하여 국가를 안정시켰다는 공로로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녹훈되었으며 坡川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勳戚大臣으로 摠兵의 직에 있으면서 병권을 마음대로 하였다 하여 1473년 대사헌 徐居正으로부터 탄핵당하기도 하였다. 1475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지경연사를 겸직하였다가 다음해 영경연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腫疹에 걸렸는데 왕이 직접 진귀한 약품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병은 더욱 깊어 결국 1485년 죽음에 이르렀다. 부음을 들은 성종은 몹시 애통해 하며 철조를 명하여 조의를 표하고 襄平이란 시호를 내렸다. 배위는 鷄林金氏이시며 兵正 자온(自溫)의 따님이시다. 묘소는 貞靖公墓 左岡 甲原에 모셨다. 계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