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字는 유일(幼一). 號는 창주(滄洲). 都承旨 담무(覃茂)의 아들이다. 1603년 사마시(司馬試). 1609년 을유증광문과(乙酉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615년 서원 현감(西原縣監), 1617년에 병조의 좌랑(佐郞), 정랑(正郞)을 역임하고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9년 겸필선(兼弼善). 교리(校理), 수찬(修撰). 보덕(輔德), 검상(檢詳). 사인(舍人)을 지내고, 1623년 겸보덕(兼輔德)으로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궁궐에 입직(入直)중 반정군의 신경유(申景裕)에게 잡혀 참수될 뻔했으나 인조의 만류로 살아 전한(典翰)이 되었다. 이어 응교(應敎). 집의(執義). 사간(司諫)을 거쳐 동부승지 등을 지냈으며, 후금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척화론(斥和論)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독전어사(督戰御史)로 나가 임진강(臨津江)에서 군사를 독려했고, 이어 감독어사(檢督御史)로 군량미 조달에 힘써 그 공으로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이해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참찬관(參贊官)을 겸임, 우부승지(右副承旨).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거쳐 1632년 충청감사(忠淸監司)를 지냈다. 척화를 강력히 주장하여 윤황(尹煌), 윤형지(尹衡志)와 함께 삼윤(三尹)으로 칭송되었다. 배위는 密陽朴氏이시며 贈吏曹參判 이서(彛敍)의 따님이시다. 묘소는 金沙 堂谷에 모셨다. 조경(趙絅)이 비명(碑銘)을 썼다. 광해군(光海君)1년(1609년), 증광시(增廣試) 병과6(丙科6) 선조(宣祖) 36년 (160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1등(一等) 5위 계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