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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윤겸 묘갈문(尹겸 墓碣文)

물텀벙 2015. 3. 13. 21:19

02. 윤겸 묘갈문(尹겸 墓碣文)

 

 

이 비는 1729년(영조 5년) 경기도 시흥에 건립된 윤겸묘갈(尹겸墓碣)로 최석정(崔錫鼎)이 비문을 지었고, 조명교(曹命敎)가 글씨를 썼다.
윤겸(尹겸 : 1601~1665년)의 본관은 파평이고, 자는 여옥(汝玉)이며, 호는 오옹(梧翁)이다.

1627년(인조 5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28년(인조 6년) 문과에 급제하여 내직으로는 성균관전적, 사복시정, 사간원헌납 등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남양부사, 평산부사, 강원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대각에 있을 때 강직하여 조익(趙翼)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같이 죄를 받게 되었다.

고을을 다스림에 선정을 베풀어 많은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평소 남에게 굽히기를 싫어하여 구차하게 시세에 영합하지 않았고, 이러함 강직함으로 인해 벼슬이 크게 높아지지는 못하였다. ※ 겸 : 王+兼

 

 

尹겸墓碣」 ※ 겸 : 王+兼
侍講院弼善尹公墓碣銘」
有明朝鮮國通訓大夫行世子侍講院弼善兼春秋舘編修官尹公墓碣銘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事世子師 崔錫鼎 撰
通訓大夫行弘文舘校理兼知製敎世子侍講院文學 曺命敎 書
公諱㻩字汝玉號梧翁系世坡平遠祖諱莘達麗朝壁上切臣諱瓘以開拓兆邊功封鈴平伯謚文肅諱虎佐我太祖判三司開國功臣四世而諱壽己卯名賢世稱泰林先生聲名動一世遭時之否隱德不仕諱希聖魁文科吏曹正郞遊趙靜菴明當先生被禍以太學生自製䟽直其寃諱渟冠司馬魁文科歷踐淸要卒官吏曹正郞當東西標榜有爭名者疵以浮諺公不自辨作詩寓意曰弊屣堯天下淸風有許由分中無棄物猶挈自家牛疵者愧服不幸早世諱慶承人稱厚德君子蔭仕軍資判官是爲公高曾祖稱妣公州李氏參奉釴之女婦德甚備課督諸兒俾有成就三男璾縣監珹掌令季即公以萬曆辛丑五月十日生幼頴異六歲能讀詩書人稱奇童未勝冠工文詞尤長於詩表操筆立就語輒驚人丁卯與仲氏同登司馬爲兩親榮明年擢別試文科選摠院序陞典籍於諸曹爲春官騎省郞於諸寺爲司僕奉常掌樂宗簿正在諫院正言獻納在憲府持平掌令春坊則司書文學弼善國子則直講司藝而掌兼春秋外則茂長瓮津白川南陽利川平山及良才察訪江原都事處臺閣有直聲孝廟初趙浦渚翼以微事削黜臺官劾王子不法遭重譴擧朝莫敢言公○語兩事語甚鯁切趙樂靜錫胤言事忤旨公又上章極言論捄士流多之其治郡律己寬民獄訟淸平所至著善聲民有去後恩兩親皆享官養前後居憂哀毁踰制篤於友悌兄弟同一里非公故未甞暫雜與人交務敦誠意朋游皆一代善類樂靜趙公及趙松谷復陽趙尙書珩金滄州益熙李副學之恒最相善性寬柔然疾惡如讎少時李爾瞻聞公名要一見公不應曰此非吉人及後人服其先見素伉倨不荷合時好有不可意雖達官要人不少饒晚歲耻與新貴俯仰名位之不大顯亦由此杜門屛迹口不言時事守分任眞觴詠叙暢不以得喪欣慽爲意乙巳十二月九日卒享年六十五葬于富平玉毛面炭洞負酉原配南湯洪氏通德郡恩恪之女叶于舅姑事夫子無違則收恤族婣敎子以義勤執女工不懈宗黨稱之生萬曆丙午三月二十九日年八十五終葬公墓右異麓坐戍原育三男二女男徵夏縣監徵殷通德郞徵周直長女經歷李垈營將金夏瑞縣監二男普正郞會前掌令一女郡守黃釗通德二男哲習二女縣監張稧進士申益惇直長一男晋三女士人沈湛韓
堬韓堤經歷三男讓錫參奉寧錫大錫二女縣監崔後徵士人宋宗錫營將三男宇亮出身宇炅守晟二女士人沈梅李檍內外曾玄百餘人公少習於不侫祖考遲川公掌令君踵修世好經樹之托義不可辭銘曰 文肅之世 ○林揭揭 繼秉銓筆 顯而未達 中一而鶱 漸達連倫 以公雅抱 賁以詞藻 誰之不如 而靳華膴 胄筵臺閣 亦云平進 遇事敢言 如古諍臣 伉拙自持 不媚于時 天道盈朒 若菑而獲 流達彌光 盍考斯銘
崇禎後再 己酉 月 日立」

 

 

윤겸묘갈

시강원필선윤공묘갈명
유명조선국 통훈대부 행 세자시강원필선 겸 춘추관편수관 윤공묘갈명
대광보국승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사세자사 최석정은 찬함
통훈대부 행 홍문관교리 겸 지제교세자시강원문학 조명교는 서함
공의 휘는 겸이고, 자는 여옥이며 호는 오옹으로 관향은 파평이다. 공의 먼 조상인 신달은 고려 왕조의 벽상공신이고, 관은 북변을 개척한 공으로 영평백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숙이다. 호는 우리 태조를 도와 판삼사사를 지낸 개국공신이다. 그로부터 4대를 지나 수는 기묘명현으로 세상에서 태림 선생으로 불렸는데 명성이 당대에 자자하였으나 때를 잘못 만나 덕을 숨기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희성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조정랑을 지냈는데, 조정암의 밝은 도에 기울어 선생이 화를 입게 되었을 때 그는 태학생으로서 직접 상소문을 지어 선생의 억울한 죄를 직언하였다. 정은 사마시에 일등으로 합격하고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청요직을 두루 지내고 이조정랑으로 벼슬을 마쳤는데, 동서의 붕당이 서로 자기의 주장을 내세울 무렵 명예를 다투는 자가 근거 없는 말로 공을 헐뜯으니, 공은 직접 해명하지 않고 시를 지어 자신의 심정을 나타냈다. 그 시에 이르기를, “요임금의 천하도 헌신짝처럼 여겼던 깨끗한 풍도의 허유가 있네. 분수 가운데엔 버릴 만한 물건이 없으니 오히려 나의 소를 끌겠네.”라고 하자 헐뜯던 자가 듣고서 부끄럽게 여기고 굴복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찍 작고하였다. 또 경승은 당시의 사람들이 후덕한 군자라고 칭찬하였으며 문음으로 군자시판관을 지냈다. 이들이 공의 고조·증조·조부가 된다.
어머니는 공주이씨로 참봉을 지낸 익의 딸인데 부덕을 고루 갖추었고 자녀들을 교육시켜 그들로 하여금 뜻을 이루게 만들었다. 3남을 두었는데 큰 아들인 제는 현감을 지냈고, 둘째 아들인 성은 사헌부장령을 지냈으며, 막내가 바로 공으로서 만력 신축년(선조 33, 1600년) 5월 16일에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빼어나 6세 때에 벌써 시와 서를 능히 읽을 줄 아니 사람들이 신동이라 칭찬하였으며, 채 관례도 치르기 전부터 문장에 뛰어났다. 그 중에서도 시와 표에 더욱 솜씨가 훌륭하여 붓을 잡으면 즉시 글을 지어냈는데 그 글이 매번 남들을 경탄시켰다.
정묘년(인조 4, 1627년)에 둘째 형과 함께 진사시에 합격하여 양친을 영예롭게 하였고, 이듬해에 실시한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의 관원에 선발되었다가 순서에 따라 성균관 전적으로 승진하였다. 그 후 6조에서는 예조와 병조의 낭관을, 여러 시에서는 사복시, 봉상시, 장악원, 종부시의 정을, 사간원에서는 정언과 헌납을, 사헌부에서는 지평과 장령을, 춘방에서는 사서, 문학, 필선을, 성균관에서는 직강과 사예를 지내면서 춘추관직을 겸직하여 관장하였으며, 외임으로는 무장, 옹진, 배천, 남양, 이천, 평산의 지방관과 양재찰방, 강원도사를 역임하였다.
대각에 있을 적에는 강직하다는 평판이 있었다. 효종 초기에 포저 조익이 작은 일 때문에 삭출을 당하고 대관이 왕자의 불법을 탄핵하다가 중벌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조정에 있던 신하 중에 누구 하나 감히 그 일의 잘못을 말하는 이가 없었으나 공이 상소하여 이 두 가지 일을 말하였는데 말이 매우 강경하고 절실하였다.

또 낙정 조석윤이 일을 논하다 임금의 비위를 거슬러 죄를 받게 되자 공은 또 글을 올려 극언으로써 변론하여 구제하니 사류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공이 고을을 다스릴 적에는 자신을 단속하는 데 엄격하고 주민들에게는 관대하였으며, 옥사와 송사를 맑게 다스렸으므로 부임하는 곳마다 선정의 소문이 자자하였고 주민들은 떠난 뒤에도 은혜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양친은 모두 봉록으로 봉양을 받았으며, 전후의 거상에서는 슬퍼하는 마음이 예규를 뛰어넘었다. 형제간의 우애에 돈독하여 형제가 한 마을에 살았고 공의 일이 아니면 일찍이 잠깐이라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남과 교제함에 있어서는 성의를 돈독히 함에 힘써서 사귄 사람들이 모두 당대의 선류들이었으니 낙정 조공 및 스승의 아들인 송곡 조복양, 또 판서를 지낸 조행, 창주 김익희, 부제학을 지낸 이지항이 가장 사이가 친했다.
공이 성품은 관대하고 온유하였으나 악인은 원수처럼 미워하였다. 젊었을 적에 이이첨이 공의 명성을 듣고 한번 만날 것을 요구해 오자 공은 응하지 않고서 “이 자는 착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참형됨에 이르자 사람들은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평소의 태도가 남에게 굽히기를 싫어하여 구차하게 시류에 영합하지 않았으나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상대가 비록 높은 벼슬아치이거나 요로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조금도 그냥 보아 넘기지 않았다. 만년에는 또 신출내기 귀인과 같이 일하게 된 처지를 부끄럽게 여겼으니 공의 벼슬이 크게 현달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문을 걸어 잠그고 남과 왕래를 끊고부터는 입으로 시사를 언급하지 않고 자신의 분수를 지키며 진실하기에 애썼다.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며 자신의 심정을 술회하되 얻고 잃음이나 기쁨과 슬픔 따위에 개의하지 않았다.
을사년(현종 5, 1665년) 12월 9일에 작고하니 향년은 65세였으며, 부평 옥모면 탄골 동향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남양홍씨로 통덕랑을 지낸 사각의 딸인데, 시부모를 잘 모시고 지아비를 섬김에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또 인척들을 감싸 도와주었고, 자식들을 의로써 가르쳤으며, 여자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게으르지 않았으므로 족인들이 칭송하였다. 만력 병오년(선조 39, 1606년) 3월 29일에 출생하였고, 향년 85세로 작고하니 공의 무덤 오른쪽에 있는 딴 기슭의 술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3남 2녀를 길렀는데 장남인 징하는 현감을 지냈고 차남인 징은은 통덕랑을 지냈으며, 딸은 경력을 지낸 이대와 영장을 지낸 김하서에게 출가하였다. 현감의 2남 중 보는 정랑을 지냈고 회는 전에 장령을 지냈으며 1녀는 군수를 지낸 황교에게 출가하였다.

통덕랑의 2남은 철과 습이고 두 딸은 현감을 지낸 장설과 진사인 신익돈에게 출가하였다. 직장의 1남은 진이고 세 딸은 사인인 심담과 한유, 한제에게 출가하였다. 경력의 3남은 참봉인 양석과 영석·대석이며, 두 딸은 현감을 지낸 최후징과 사인인 송종석에게 출가하였다. 영장의 세 아들은 관리가 된 우량과 우경·우성이고, 두 딸은 사인인 심매와 이억에게 출가하였다. 내외의 증손자와 현손자는 백여 명에 이른다.
공이 어린 시절에 나의 조부인 지천공에게 학문을 익혔고, 공의 손자인 장령군도 계속하여 선세의 우호를 닦고 있으므로 묘도문의 부탁을 의리상 사양할 수가 없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
문숙공의 세업을 칠림선생이 빛내어
계속하여 전필을 쥐었건만 빛나되 현달하진 못하였고
중도에 한차례 침체되었다가 점차 현달하였네.
공은 우아한 포부도 있었으며 문장에도 힘썼으니
그 누구와 같지 않으리오마는 화려함을 아꼈도다.
주연과 대각에서의 벼슬은 또한 평범하였지만
일을 맡아 서슴없이 말한 것은 옛적의 쟁신과 같아
강개한 마음 스스로 지키며 시절에 아부하지 않았네.
천도의 차고 이지러짐은 황폐되었다가도 뜻을 얻는 법
영달을 길이 전하고 광채를 널리 미치려면 어찌 이 명을 살피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