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는 윤신달(尹莘達). 신라 겸명왕 2년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삼한통합(三韓統合)에 공을 세워 통합삼한벽상익찬공신(統合三韓壁上翊贊功臣),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고 소양(昭襄)이라
시호(諡號)하였다.
그 뒤 5세손 윤관(尹瓘)이 고려 문종 때 문과에 올라 여진(女眞)을
평정한 공으로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 문하시중(門下侍中),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 지군국중사(知軍國重事)가 되어
영평현(鈴平縣 : 파평(坡平)의 별호) 개국백(開國伯)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파평(坡平)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데‘윤성연원고(尹姓淵源考)’에 보면 태사공(太師公)이 신라 진성왕
7년 파주(坡州)의 파평산(坡平山)아래 용연(龍淵)에 떠오른 옥함(玉函)서 나왔는데 옥함에 윤자(尹字)가 새겨져 있었다고도 하고 손바닥에
윤(尹)이란 글씨가 나타나 있어 윤씨(尹氏)성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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