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015.
대 015. 이 글에 이의나 추가 정보가 있으시면 쪽지나 댓글을 남겨 주세요. |
初名은 文玉, 감찰어사 순(純)의 아들이다. 1276년(충렬왕 2) 문과에 급제하여 장사랑 비서동정에 임명되었다. 1278년 내시. 첨사부록사(詹事府錄事)로서 정방필도치(政房必闍赤)에 올라 銓注를 관장하였다. 이후 15여 년 동안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국정을 살피는 데 힘썼다. 1296년 좌승지로 있으면서 國子監試를 총괄하는 중요한 업무를 수행하였다. 과거의 책임자로서 자기 직분을 올바르게 지키어 편벽됨이 없이 인재를 선발하였다. 다음해 밀직학사로 승진하여 宰樞의 반열에 올랐다. 1298년 1월 충선왕이 즉위하자 바로 홍문관학사. 의조상서에 임명되었다. 얼마 뒤 밀직부사. 성균관대사성. 수문전학사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원에 의해 충렬왕이 복위하자, 두 달뒤 외직으로 나가 서북면도지휘사가 되었다. 이듬해 3월 고려에서 만호 벼슬을 하고 있던 몽고인 印候가 자신과 뜻이 맞지 않는 韓希愈 등을 제거하고자 誣告事件을 일으키고 원나라로 도망가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이때 국경의 책임자로 있었기 때문에 탄핵을 받았고, 도첨의 변호를 받았으나 끝내 파직되었다. 이후 전왕인 충선왕이 원에서 무종을 옹립한 공을 인정받아, 1307년 3월경부터 다시 국정을 장악하게 되자 밀직부사를 거쳐 선부판사와 우문관대제학에 올랐다. 그뒤 1321년(충숙왕 8) 수첨의찬성사(守僉議贊成事)로 치사하였으며, 다시 정승치사(政丞致仕)로 가직되고 鈴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文顯이다. 배위는 울산박씨이며 判書 보(保)의 따님이시다. 묘소는 長湍 東南 古縣 作木谷 乾亥甲原에 모셨다. 계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