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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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하평리(門下評理) 승순(承順)의 아드님이시다. 고려 우왕 때 생원(生員)으로서 사예(司藝) 유백순(柳伯淳), 생원 박초(朴礎) 등과 함께 상소하여 불교 때문에 나라가 망하므로 정도전(鄭道傳) 등 유학자들을 존중하여 유학(儒學)을 권장하라고 주장했다. 1404년(태종 4)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때 남재(南在)의 부정을 탄핵하다 공주로 귀양갔다가 풀려났다. 이듬해 집의(執義)를 거쳐 1406년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로서 충청도 경차관(忠淸道敬差官)이 되어 왜구(倭寇)에게 미곡 운반선을 탈취당한 충청도 안문도절제사(忠淸道安問都節制使) 최이(崔이) 등 지방관 4명을 처벌했다. 1407년 이조 참의(吏曹參議). 대사헌. 한성 부윤(漢城府尹) 등을 역임, 1408년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로 완산 부윤(完山府尹)을 겸직, 1409년 상평보(常平寶) 설치를 건의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使)를 거쳐, 1410년 경상좌도 병마절제사(慶尙左道兵馬節制使)로 계림 부윤(鷄林府尹)을 겸한 뒤 1412년 한성 부윤에 재임되었다. 다음해에 대사헌. 공조 판서, 1415년 형조 판서를 거쳐 호조 판서에 재직중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 당시에 공을 세운 장수들의 공신녹권(功臣錄券)을 개정하라고 상소했다가 파직당하고 전리(田里)에 방귀(放歸), 이어 적성(積城)에 안치(安置) 되었다. 1417년 풀려나와 강원도 관찰사가 되고,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1418년 형조 판서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던 도중 평양(平壤)에서 객사했다. 시호는 소도(昭度)이시다. 배위는 南陽洪氏이시며 南陽君 文景公 길민(吉旼)의 따님이시다. 계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