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텀벙 2010. 9. 4.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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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字는 길보(吉甫), 號는 미촌(美村),노서(魯西), 산천재(山泉齋). 대사간 황(煌)의 아드님이시다. 김집(金集)의 문인이다.

 1633년(인조11) 생원(生員), 진사(進士)의 양시(兩試)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했고 1636년 후금(後金)의 사신이 입국했을 때 유생들의 소두(疏頭)가 되어 명나라에 대한 의(義)를 지키자고 상소했으며, 이 해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강화(江華)에 피난, 성문을 지키다가 이듬해 강화가 함락되자 성을 탈출하였다,

 자의(諮議). 형조좌랑(刑曹佐郞). 지평(持平). 장령(掌令). 집의(執義) 등의 벼슬에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살아남은 것을 자책하여 모두 사퇴하였다. 금산(錦山)에 가서 평생을 학문 연구에 정진했다. 특히 예론(禮論)에 능통했고 성리학 전반에 걸쳐 당대의 대가가 되었다. 평소 친교가 있던 송시열(宋時烈)과 윤휴(尹鑴)가 학문으로 대립하자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여 오히려 양인으로부터 오해를 받았다.

 죽은 뒤 그의 아들 증(拯)으로부터 아버지의 묘갈(墓碣)을 청탁받은 宋時烈은 宣擧가 생전에 윤휴(尹鑴)와 절교하지 않은 점에 불만, 자기 글이 아닌 박세채(朴世采)가 撰述한 행장(行狀) 그대로를 인용하여 써 주어 拯과 宋時烈은 감정이 격화되어 서인(西人)이 노소론(老少論))으로 갈라지는 원인이 되었다.

 1715년 유계(兪棨)와의 공편(共編)인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跋文)으로 노소론의 싸움이 일어나자 이듬해 아들과 함께 관작을 추탈(追奪)당했다가, 1722년(경종 2) 부자가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모두 능했다. 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영춘(永春)의 송파서원(松坡書院), 영광(靈光)의 용암사(龍巖祠),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 교하(交河)의 신곡서원(新谷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셨다,

 문집에  노서유고(魯西遺稿). 계갑록() 우계연보후설()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시다.

 배위는 公州李氏이시며 生員 장백(長伯)의 따님이시다. 1637(丁丑)년에 순절하시어 정려(旌閭)가 하사되시었다.

 묘소는 交河 法興鄕 月籠山 西麓 卯原에 合葬으로 모셨다. 龍西公이 撰한 表石이 있다.

계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