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텀벙 2010. 9. 5.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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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左贊成을 지낸 윤임(尹任)의 아드님이시다. 공은 그의 5子이시고 장경왕후는 고모가 되신다.

 을사사화(乙巳士禍)때 겨우 6세였으므로 그 참화에서 요행히 모면하기는 했지만 그 불행은 그뒤의 공의 성장사를 민멸되게 하였으며, 53세에 전사하기까지 진천현감(鎭川縣監)을 거친 기록이 남아있을 뿐, 그 밖에 어떤 관직을 역임했는지 전연 알 길이 없다.

 1592년 적의 선봉군이 다대진을 포위하자 이에 그는 역전 끝에 적을 일단 격퇴하였다.

 부산(釜山)을 중심한 제전투에서 일단적을 퇴각시킨 전공은 이 다대포진(多大浦津) 뿐이었다. 적을 일단 퇴각시킨 뒤에 한 부하 군사가 앞으로 나와서 말하기를 " 멀지 않아 적이 반드시 대규모로 공격해 올 것입니다. 그 때는 막아내기가 어려울 것이니 피하는 길이 상책(上策)일까 합니다" 하고 아뢰니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하고 결사의 뜻을 피력하였다.  

 그 다음날 과연 적의 대군이 다시 쳐들어오니 군민(郡民)들은 대부분 도망가고 공은 혼자서 종일토록 적(敵)을 쏘았지만은 끝내 감당할 길이 없게 될 때 적은 드디어 성안에 침입하여 그에게 다가와서 시퍼런 칼날을 마구 휘두르니 함께 항전하던 공의 서제(윤임의 8자) 흥제(興悌)가 公을 안고 함께 순절했다

 왜병이 물러간 뒤에 백성들이 그를 장사지내려고 하는데 힘껏 안고 죽은 흥제의 손을 아무리 풀려해도 풀리지 않으므로 마침내 한 관에 시신을 함께 넣어서 장례지냈다고 한다.

 1766년(영조 4 1) 多大僉使 이해문(李海文)이 다대포객사의 동쪽에 높이가 180cm, 너비 60cm, 두께 27cm의 尹公壇碑를 세웠다.

 興悌와 함께 宣武原從功臣에 錄勳 되시고 兵曹參判이 追贈되시었으며 旌閭가 下賜되었다.

 배위는 平山申氏이시며 察訪 효성(孝誠)의 따님이시다.

 興悌의 配位는 金海金氏이시다.

 묘소는 香洞 親山 左邊에 興悌와 함께 같은 棺에 모셨다.

계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