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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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동현(同玄), 삼한공신(三韓功臣) 신달(莘達)의 4 대손, 상서성 우복야(尙書省 右僕射) 윤집형(尹執衡)의 아들이시며 고려의 명장이시다. 문종(文宗) 때 문과에 장원급제, 1088년(선종 5) 합문지후(閤門祗侯)로 광주(廣州). 충주. 청주도등지에서 출추사(出推使)로 파견되고, 습유(拾遺).보궐(補闕)을 거쳐 1095년(숙종 즉위) 좌사낭중(左司郎中)으로 요나라에 파견돼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1098년에 동궁 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가 되어서 조규(趙珪) 등과 함께 사신(史臣)으로 송나라에 가서 왕의 사위(嗣位)를 알리고 이듬해 자치통감을 기증 받고 귀국하였다. 1101년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내고. 어사대부(御史大夫)로서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사(東北面行營兵馬都統使)가 되어 여진을 정벌하다가 실패했다. 후에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하여 군대를 양성, 1107년(예종 2) 여진정벌의 원수(元帥)가 되어 부원수(副元帥) 오연총(吳延寵)과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에 출전했다. 이때 함주(咸州). 영주(英州). 웅주(雄州). 복주(福州). 길주(吉州). 공험진. 숭녕(崇寧). 통태(通泰). 진양(眞陽) 등의 9지구에 성(城)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女眞)을 평정하고서 이듬해 봄에 개선하였고, 그 공으로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左理平戎拓地鎭國功臣). 문하시중(門下侍中).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 지군국중사(知軍國重事)가 되었다. 이 해 여진이 계속 북변을 침번하자 다시 출전했으나 패전했다. 그후 여진이 9 성의 환부를 요청하여 강화를 교섭해 오자 조정(朝廷)은 지키기 어렵다해 9 성을 여진에 돌려 주고 벼슬을 빼앗기고는 곧 공신호(功臣號)마저 삭탈(削奪)되었다가, 1110년 수태보(守太保). 문하시중(門下侍中). 판병부사(判兵部事). 상주국(上柱國). 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었으나 우울한 날을 보내다 죽었다. 문경(文敬)으로 시호(諡號)가 내려어져서 문경공(文敬公)이셨는데 인종 대왕(仁宗大王)이 그 모후의 시호가 문경왕후(王后)로 되었다해서 문숙공(文肅公)으로 고치시었다. 고려 예종 6년 신묘 5월 8일에 62 세의 일기로 별세(別世)하시어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분수리(현재 연천군 미산면 아미림)에 안장되시어 현재 지방문화재 12호로 지정되었다. 配位는 國大夫人 仁川李氏이시고 父는 上蔣軍 成幹이시다. |
文肅公 윤관(尹瓘)에 대하여
1. 가계와 관직 태조를 도운 삼한공신(三韓功臣) 신달(莘達)의 고손이며, 검교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을 지낸 집형(執衡)의 아들이다. 문종 때에 등과, 습유(拾遺), 보궐(補闕)을 지냈고, 1087년(선종 4)에는 합문지후(閤門祗候)로서 출추사(出推使)가 되어 광주(廣州), 충주, 청주를 시찰하였다. 2. 여진을 정벌하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1104년 2월 동북면행영도통(東北面行營都統)이 되어 처음으로 여진정벌의 임무를 띤 때부터 1111년(예종 6) 죽을 때까지의 약 7년간이다. 고려가 처음으로 동여진을 대규모로 정벌하기 시작한 것은 1080년(문종 34)으로 이때 여진의 세력을 크게 꺾은 바 있다. 3. 9성을 설치하다 그리고 남쪽으로부터 백성을 이주시켜 남도지방의 이주민들이 이곳을 개척하여 살게 되었다. 새로 성을 구축한 곳은, 함주(咸州)에 이주민 1,948가구, 영주(英州)에 성곽 950칸과 이주민 1,238가구, 웅주(雄州)에 성곽 992칸과 이주민 1,436가구, 복주(福州)에 성곽 774칸과 이주민 680가구, 길주(吉州)에 성곽 670칸, 이주민 680가구, 공험진(公嶮鎭)에 이주민 532가구를 이주시켰다. 이 6성 외에 이듬해에는 숭녕(崇寧)·통태(通泰)·진양(眞陽)의 3성을 더 쌓아 이른바 윤관의 9성 설치가 완결되었다. 특히 함흥평야의 함주에 대도독부(大都督府)를 두어 이곳이 가장 요충이 되었다.
4. 여진정벌, 실패로 끝나다 서쪽에 강력한 요나라와 접경하고 있던 여진은 고려와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게 되었으나, 윤관의 9성 축조와 농업이주민으로 말미암아 농경지를 빼앗긴 토착 여진족으로서는 강력히 반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여진족은 길이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친다는 조건 아래 평화적으로 성을 돌려주기를 원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