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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 : 서양 놈들의 난동 (柳麟錫)

물텀벙 2011. 4. 22. 23:06

                                                                          

 

    서양 놈들의 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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昇平世久恬嬉存(승평세구념희존)태평성대 오래도록 편안히 지냈는데

報急沁城洋祲昏(보급심성양침혼)양놈들 침범 소식이 강화에서 전해졌네

都民鳥散震宸念(도민조산진신념)백성들 달아나고 임금께서 근심하니

壯士雲興重國恩(장사운흥중국은)선비들이 불끈 일어나 나라 은혜 갚으려네

大老首陳當戰策(대로수진당전책)선생께서 가장 먼저 싸울 계책 올렸더니

在廷從息去邠論(재정종식거빈론)이후로 조정에선 피난 논의 사라졌네

仗義出羣梁帥去(장의출군량수거)정의롭고 빼어난 양 장군이 출정하니

分明天佑樹功勳(분명천우수공훈)분명코 하늘이 도와 공훈을 세우리라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의 의암집(毅菴集) 중 강화에서 발생한 서양 놈들의 난동(江華洋亂)에서

 

유인석(柳麟錫 1842~1915) : 한말의 위정척사론자. 의병장.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菴). 아버지는 중곤(重坤)이다. 14세 때 족숙인 중선(重善)에게 입양되었으며, 할아버지 영오(榮五)의 인도로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다. 이항로는 그를 처음 보고 몸이 크지 않지만 강한 의지력과 과감한 성품이 있음을 보고 한눈에 대성할 인물임을 예견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주로 김평묵(金平默)과 종숙부인 유중교(柳重敎)의 가르침을 받았다. 주리적 성리학자인 이항로의 문하에서 전통적 유교질서인 정(正)에 대비하여 서양세력의 침략 및 서양문명의 수용을 사(邪)로 규정하고 이에 대항하려는 위정척사론을 받아들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후 전국에서 개국반대운동이 전개되었을 때, 홍재구(洪在龜) 등 강원도, 경기도 유생 46명과 함께 척양소(斥洋疏)를 올려 개국이 부당함을 상소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한편 1891, 1893년에 김평묵과 유중교가 죽자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정통도맥(正統道脈)을 이어받았다.

 

 

서양 놈들의 난동

 병인년(1866) 8월에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조선이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했다는 구실로 조선을 침략했다. 지금의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楊花津)까지 왔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자 돌아가서 병력을 보강하여 9월에 다시 침입하였는데, 강화(江華)를 공격하여 강화성(江華城)을 점령하고 서적을 약탈하였다.

 이 시는 한말의 항일 의병장으로 유명한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 선생이 1866년 9월 무렵에 지은 것이다.

 프랑스 함대가 침입하자 온 나라가 흉흉하였는데, 한심하게도 조정에는 이를 물리치려는 계책은 없이, 피난을 가거나 강화(講和)하자는 논의만 무성할 뿐이었다.

 의암의 스승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선생은 노구(老軀)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 목숨을 걸고 싸워 지켜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를 계기로 조정에서는 이항로의 문인(門人)인 양헌수(梁憲洙) 장군을 강화로 파견하였다.

 10월 3일에 양헌수 장군은 5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기습작전을 감행하여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프랑스 군대를 대파하였는데, 이때의 승리가 프랑스 군이 퇴각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에서 외규장각(外奎章閣) 도서 일부가 임대의 형식으로 돌아왔다. 이 도서가 바로 병인양요 때에 프랑스가 약탈해 갔던 책들이다. 주인은 우리인데, 도둑질해 간 저들이 임대해 준다는 것이 어불성설이지만, 그래도 145년 만에 우리 품으로 돌아온다고 하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고전포럼  양기정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