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 자료/파평윤씨 자료

01. 윤강 신도비문(尹絳 神道碑文)

물텀벙 2015. 3. 13. 21:16

01. 윤강 신도비문(尹絳 神道碑文)

 

 

1709년(숙종 35년)에 후손들에 의해서 건립된 휘 윤강(諱 尹絳)의 신도비이다. 윤강(1597~1667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아버지는 공조참의 민헌(民獻)이며, 어머니는 김찬선(金纘先)의 딸이다. 1624년(인조 2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642년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가 되고 이조참의를 지냈다. 그 후 각 부서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이조판서에 올랐고,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에 봉해졌다.
찬자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예송논쟁(禮訟論爭)을 일으켰으며, 좌의정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문장과 글씨에 능해 수많은 비문(碑文)을 남겼으며 효종(孝宗)의 묘소인 영릉(寧陵)의 영릉지문(寧陵誌文)을 지은 송시열(1607~1689년)이다. 서자는 공(公)의 아들로 이조참판, 병조판서 등의 관직을 역임한 윤지인(1656~1718년)이다.
제액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예조판서, 좌참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경서(經書)와 문장에 능했으며, 해서, 초서, 전서, 예서에 모두 능해 사대부들의 비갈(碑碣)을 많이 남긴 윤덕준(1658~1717년)이다.

비문의 전반부에는 공(公) 선대(先代)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효종(孝宗)의 국장(國葬) 때 예조판서로 국상(國喪)을 잘 마무리 하였다는 내용과 현종(顯宗)이 국상을 마치고 왕위에 오르는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한 내용 등을 담고 있다.

중반부에는 공(公)의 관직생활에 대한 일화로 인조(仁祖), 효종, 현종 세 임금을 두루 섬기면서 80여 벼슬을 지내면서 신명을 바쳐 일하였으며, 1664년(현종 5년) 민유중(閔維重)의 탄핵으로 사퇴하여 안산(安山) 옛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여러 번 조정에서 불렀으나 모두 사퇴하였다는 내용 등이 담겨있다.

후반부에는 공(公)의 부인과 후손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가계도를 담고 있다.

추기(追記)에는 신도비를 세우는 것이 늦어진 이유와 전술(前述)하지 못한 후손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담고 있다.

 

 

尹絳神道碑
贈領議政行吏曹判書尹公神道碑銘 (篆額)
有明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舘藝文舘春秋舘觀象監事世子師行崇祿大夫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經筵事五衛都摠府都摠管尹公神道碑銘 并序
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 宋時烈 撰
子 嘉善大夫平安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管餉使平壤府尹 趾仁 謹書
嘉善大夫咸鏡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咸興府尹 尹德駿 篆
余少也 游學漢師 寓於叅議尹公諱民獻傍舍 知其爲醇謹長者也 旣又見有趨庭者 氣象克肖 從長者問之則 名絳 字子駿 又問其命之之義 則曰參議公夢 神馬飛騰 其色大赤而生焉 故因以爲名字云 未幾 見其闡大科設慶席 其色不甚喜 余雖未解事 亦知其氣厚而量宏也 其後崇禎戊戌 余膺召入京 翌年己亥 孝宗大王棄群臣 公以宗伯掌邦禮 相與周旋 以訖于因山 後三年辛丑 余在東郊 公以冡宰出來 相見爲言 主少國危 相與歔欷 又後七年丁未 余聞公訃 以詩挽之 其後庚申 公女婿李留守選 狀公行以授曰 公諸子 願得一言以賁墓隧 因譽諸子之賢 嗚呼 四十餘年之間 公儒生而士 士而大夫 大夫而至於貳公之秩 其間世道 凡幾番汙隆 而公始終如一 至其晩節則 又叔世之所罕見 余以文字末技 多銘國朝賢公卿名大夫 獨於公而辭 可無媿矣 謹按 坡平尹氏 始自高麗太師莘達 本朝仍爲后妃家 公一派 又連世尙主 高祖燮爲鈴平尉 其所後子之諴 贈叅判 祖儼佐郞 盖數世稍不振 而叅議公 人亦謂其位歉於德也 配延安金氏 監正纉善女 公登第 由槐院 入藝文館 自檢閱至奉敎 自後歷三十餘官 而癸未陞通政 爲承政院承旨 其前所歷 多在兩司春坊中書 而最久於玉堂也 其間以便養 再守外縣 有仁惠頌 虜變 從留都大將 事已誤事 帥臣以形勢 幾逭軍律 公直論不撓 卒致於法 以繡衣廉察畿輔 執義時 嘗劾同僚之誣正士者 自通政以後則 多在
司 而吏曹叅議大司諫 皆其所歷也 暫出爲忠原縣監 則上以爲有老親也 賜藥物慰寵之 又以賞勩 陞嘉善 屢爲吏曹叅判大司憲都承旨大司諫凡十餘官 而自刑曹叅判 轉資憲 仍判本曹 周流吏禮工 政府三四宰 兼帶如經筵金吾諸職則 自嘉善以來 因仍者也 己亥大喪 號隕欲終曰 天奪我聖君矣 服旣成 顯宗大王 將即位 哭踊不忍陞御座曰 何忍以今日 遽即此位 願俟他日 公以禮判 執笏以進曰 國不可一日無君 邸下固辭如此 神人何依焉 曰何忍迫人如此 又進曰 以冕服即位而恤宅宗 自周而然矣 因涕泣如雨 在位莫不抆淚 兼管殯葬兩都監 公以爲國家興廢 雖不由堪輿之術 君父衣冠之藏 不可不極擇 親率臺史 遍歷近遠 苟有所見則 不顧人言 率意直前 陽坡鄭相公太和 於前席 屢爲目整之 於私處 兄呼而䂓之數矣 盖公夫人於鄭相姊也 公終不已焉 以勞陞崇政 判金吾事 而仍下行資憲機要 盖以原品他無可任之職故也 又隮崇祿 公自以爲吾年將至矣 位已崇矣 歷事三朝 出入八十餘官 而無所輔益 唯奉身休退 粗可以自酬吾志也 遂歸安山之舊舍 自後五年之間 除命頻仍 至有下書特召 而皆不至 上屢幸温泉 而亦不出拜路左 目與田夫野老 相邀爭席 公生在萬曆丁酉 又適七丁而歿於其八月四日 越十月十八日 葬于郡西逶迤山負甲之原 訃至 士類莫不悼惜 趙公復陽 白公風義卓然 宜有追命以勵頹俗 上從之 鄭夫人 己卯宗臣文翼公五世孫 知事廣成女 夫人英明淑哲 有三弟 皆登第 二爲議政 一爲亞卿 其父毋嘗曰 吾四子 第其賢則 如其倫焉 夫人沒 公議再娶 陽坡公 爲諸子憂之 繼媲柳氏 士人杙之女也 慈而和順 撫諸子曲有恩意 諸子不覺其異顔焉 公歿 毁戚甚 喪甫畢而沒 公男趾美 趾善 趾完 女適李留守者 前夫人出趾慶 趾仁 繼媲出也 三男一婿 皆登文第 長以持平先卒 次某官 叔季 皆端良有文 士友稱之 側出男趾禧 二女爲具文漢 朴廷軾妻 孫男寔, 定, 寀, 宰, ○, 寭 宰以某官第二男爲持平後 實主公祀 曰實 持平側出男也 孫女婿 李世禎 · 閔鎭遠 · 朴鐔 · 李宜振也 始余與宗人宋國銓兄弟 同里而居 自幼稔間公事行 盖於公爲姨兄弟也 其米鹽細碎 有告者 公必與酬酢如親弟兄 因以聞公與妹婿蔡湖洲裕後 相好如同氣 蔡公善謔 常曰 尹某 惟知飮食之味 而不知世味盖美其不趍時好也已 又聞迂齋李相公厚源 遣其所賢子 置公甥館 又同春宋公浚吉 於孫廟朝 赴召而歸 爲言因迂相而與某隣 因某而熟於蔡 余於公 固十得其八九矣 然余心褊而識淺 不無責備之意 及其同泣弓劒 相與周施 而益知其所未知也 本朝群臣服制 有茅纏之譏 公請依朱子議以衰經成服而別爲視事服仕進 事雖不行而論者韙之 先是 石室金文貞公 桐溪鄭文簡公 扶樹大義 壁立千仞 乃爲群小所攻 公於前席 力言邪正之辨 固爲群小之所憎 公又甚惡尹善道之凶悖 痛斥無所畏憚 仁孝二聖 知公忠朴可伏 除拜之際 雖有親嫌 爲破格例 以自親近焉 公嘗有下堂憂 孝廟聞之 醫藥珍羞 前後便番 於此亦可以觀君臣矣 至其勇退一節 賁育莫能奪 聳動士夫風聲 故顯廟賜祭文云 其進與退 均裨世道 礪廉激懦 繄卿是賴 是可以光耀百世也 惟是寧陵卜定 實公血誠所在 而群小爭爲求衅幸禍之地 竟至遷動 昔朱子論山陵吉凶而曰 驚動先靈 亦能挻災不一年而國家禍故連仍 朱子之說 於是益驗矣 公若有知 想必痛泣於九原也

銘曰
便儇皎厲 世以爲賢 公則不喜 一惟天然 紛紜馳逐 老死而止 是人之常 公以爲恥 歷事三朝 周流顯地 人不忮忌 仁厚之致 然而其中 剛毅自有 顯忠辨姦 硬敵瓊玖 廉白寒儉 因心則裕 暮年歸休 凛然高風 霜後見菊 雪後知松 人亦有言 保晩節難 臺烏池鳳 自古攸歎 警此頹俗 寔惟公功 迹公之爲 究厥始終 實惟伊何 可以形容 綿以裏鐵 庶幾乎公 右文成於崇禎庚申年間 而未及竪石 丙子 贈爵議政府領議政兼世子師 以子趾善, 趾完 拜相也 趾慶副正 二男三女逭進士 邃 李衡佐縣令, 林象鼎進士, 柳愈 趾仁文科監司 三男二女 審 , 容, ○, 李瑞坤, 李宜中 庶子趾禧察訪 二男 寯 寏 一女幼 具文漢郡守 一男一女 汝○ 洪震洙 朴廷軾察訪 四男二女 萬亨, 萬溥, 萬徽, 萬澂, 李思良南原守 ○孫 寔主簿 三男 尙遠, 尙通 尙遜 二女幼 宷判官 四男一女 尙衡, 尙吉, 尙喜, 尙靖, 李宗城 宰, ○, 定, 寅 早歿 取尙衡後宰 主祀 定一男二女 尙逸 金復衍, 柳弼垣 寅以尙靖繼 逭一男二女 審二女 容一女 ○一女 皆幼 庶孫 宲 二男二女 尙質武科 尙文 趙章彬 一幼 孫女李世貞都事 二男一女 宜遂縣監 宜揆 尹師道閔鎭遠參判三男一女 昌洙, 亨洙, 通洙, 李周鎭 朴鐔郡守一男一女 亮漢進士 吳遂郁 李宜振縣令 男普赫參奉 孫支之後出 而不載元文者 玆謹追記 外派曾玄 不能盡錄云
崇禎紀元後八十二年己丑 月 日立

 

 

증영의정행이조판서유공신도비명(전액)
유명조선국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세자사행숭록대부이조판서겸판의금부사지경연사오위도총부도총관윤공신도비명 서문을 겸하여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송시열 지음
아들 가선대부 평안도관찰사 겸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관향사 평양부윤 지완 삼가 씀
가선대부 함경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함흥부윤 윤덕준 전액을 씀

내가 젊었을 적에 한양에 유학 하면서 참의인 윤공 휘 민헌의 옆집에서 우거하여 그가 순박하고 근후한 장자임을 알았으며, 얼마 후에 또 그의 아들이 있어 기상이 능히 아버지를 닮았음을 보았다. 장자를 따르는 자에게 물으니 이름은 강이고, 자는 자준이라 하였다. 또 자와 이름을 그렇게 정한 뜻을 묻자, 참의공이 꿈에 신마가 날아오르고 그 빛깔이 몹시 붉은 것을 꾸고 그를 낳았기 때문에 그걸로 인해 이름과 자를 지었다고 말했다.
얼마 되지 않아서 그가 대과에 급제하여 축하하는 연희를 마련했을 때 보니 그는 그다지 기쁘지 않은 기색이었는데, 내가 비록 그 까닭을 이해하진 못했으나 또한 그의 기개가 두텁고 도량이 크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 숭정 무술년(1658년)에 나는 임금의 소명을 입고 서울에 들어갔는데 이듬해인 기해년에 효종대왕이 승하하자 공은 종백으로 국가의 예식을 관장하고 있어서 나와 함께 서로 주선하여 국장을 마쳤다. 그로부터 3년 후인 신축년(1661년)에 내가 동쪽 교외에 있을 때 공이 이조판서로서 그 곳에 와서 서로 만났는데, 임금이 나이가 유충하여 국가가 위태롭다는 이야기를 나누고서 서로 더불어 한숨을 지었다.
다시는 7년이 지난 정미년(1667년)에 나는 공이 작고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만장을 지어 애도하였고, 그 후 경신년(1680년)에 공의 사위인 유수 이 선이 공의 행장을 지어 나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공의 여러 아들이 한 말씀 얻어서 묘수(무덤이 있는 길)을 꾸미고 싶어 한다.”고 하고선 여러 아들의 훌륭함을 칭찬하였다.
오호라! 사십여년 사이에 공은 유생이었다가 사가 되고, 사이었다가 대부가 되었으며, 대부이었다가 이공의 지위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동안에 세도가 모두 몇 번씩이나 침체와 흥성을 겪었지만 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으며, 그 만년의 절개에 이르러서는 더욱 어지러운 시대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바이니 내가 문자를 다듬는 하찮은 재주로 국조의 훌륭한 공경과 이름난 대부들의 명을 많이 지었는데, 유독 공에 대해서만 사양한다면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삼가 살펴보건대, 파평 윤씨는 고려 때에 태사를 지낸 윤신달 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본조에서도 그대로 후비의 집안이 되었는데, 공의 일파는 또 대대로 계속하여 공주에게 장가들었다. 고조인 섭은 영평위가 되었고,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지함은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할아버지 엄은 좌랑을 지냈다. 대체로 몇 세 동안 명망을 떨치지 못했으며, 참의공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그가 지낸 벼슬이 덕망에 비해 모자랐다고 말하였다. 참의공의 아내는 연안 김씨로 감정을 지낸 찬선의 딸이다.
공은 과거에 급제하여 괴원을 거쳐 예문관에 들어가서 검열로부터 봉교에 이르렀으며, 이때부터 30여종의 관직을 두루 지내고서 계미년(1643년)에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라 승정원 승지가 되었다.
그가 앞에서 역임한 것은 대부분 양사 ∙ 춘방 ∙ 중서 내의 관직이며, 옥당에 가장 오래 재임하였다. 그 사이에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지방의 현에 수령으로 재임했는데, 주민들로부터 인자하다는 칭송이 있었다.
호란 때에는 유도 대장을 따랐으나 일이 이미 그르쳐진 후 수신이 형세를 이유로 몇 차례나 군율을 회피하자 공은 흔들림이 없이 직론하여 마침내 법에 따라 처리되었다.
암햄어사로써 기보를 살폈으며, 집의로 있을 때에는 일찍이 동료로써 올바른 선비를 포함하는 자를 공격했다.
통정대부에 오른 이후로는 대부분 후사에 있었으며, 이조 참의 ∙ 대사간 등도 모두 그가 역임했던 관직이다. 잠시 외직으로 나가 충원 현감을 지내니 임금이 그에게 노친이 있음을 헤아리고서 약문을 하사하여 위로하고 총애하였다. 또 공로에 의한 상으로 가선대부의 품계에 승진하여 누차 이조참판 ∙ 대사헌 ∙ 도승지 ∙ 대사간 등 모두 10여 군데의 관직을 지냈으며, 형조참판으로 있다가 자헌대부에 옮겨 그대로 본조의 판서를 지냈다.
이조 ∙ 예조 ∙ 공조 ∙ 의정부 등 서너 군데의 총재를 두루 거치는 동안 경연 ∙ 금오의 여러 직책을 겸직하였으니, 가선대부가 된 이후도 전과 같이 그대로 맡은 것이다.
기해년(1659년)의 대상 때에는 울부짖으며 따라 죽으려 하면서, “하늘이 우리 성군을 빼앗아 갔다”고 하였다. 이미 성복한 다음 현종 대왕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려 하면서 곡용하며 차마 어좌에 오르지 못하고 말하기를, “어찌 차마 오늘 갑자기 이 자리에 나아가게 하는 거냐! 원컨대 훗날을 기다렸으면 좋겠다.”고 하니 공은 예조판서로써 홀을 쥐고서 나아가 말하기를, “나라에 하루라도 임금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저하께서 이렇게 고사 하시면 귀신과 사람이 어디에 의지하겠습니까?”고 하매, “어찌 이다지도 사람을 모질게 다그치느냐!”고 하자 공은 또 나아가 아뢰기를, “면복으로 즉위하여 상주로 처하는 것은 옛날 주 나라 때부터 그랬습니다.”고 하고선 비 오듯이 눈물을 흘리니 그 자라에 있던 자들이 눈물을 훔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겸직으로 빈장 양도감에 선발되었는데, 공은 국가의 흥폐가 비록 감여의 학설에 말미암지는 않으나 군부의 의관이 묻힐 곳은 정성들여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기고서 대신과 사관을 인솔하여 원근의 지역을 두루 돌아 다녔다.
진실로 소견이 있으면 남이 말하는 것을 돌아 보지 않고 생각에 따라 굽힘없이 내세웠는데, 양파 정상공 태화가 임금이 계신 자리에서는 누차 눈짓으로 주의를 보내고 사적인 곳에서는 형으로 부르면서 바로잡아 준 적이 여러 차례였는데, 그것은 공의 아내가 정상공에게 손위 누이였기 때문이나 공은 끝까지 그만 두지 않았다.
공로에 의해 숭정대부의 품계에 승진하여 의금부의 판사를 지냈는데, 그대로 낮춰서 자헌대부의 품계를 따라 긴요한 직책을 행한 것은 대개 원품으로는 맡을 만한 관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숭록대부에 오르자, 공은 스스로 자신의 나이가 죽을 떄가 되어 가고 벼슬도 이미 높아졌으며, 삼조를 두루 섬기고 80여 관직을 출입하면서 도움이 된 바가 없으나 오직 몸을 끌고 물러나 쉰다면 조금이나마 나의 뜻을 갚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서 마침내 안산의 옛집으로 돌아갔다.
이 때부터 5년 동안 벼슬에 제수한다는 왕명이 빈번하게 계속되고, 교서를 내려 특별히 소명하기까지 했으나 모두 이르지 않았다. 임금이 여러 차례 온천에 행행해도 또한 도로의 왼쪽에 나아가 절하지 않았으며, 날마다 농부 ∙ 촌로들과 더불어 서로 초대하여 허물없이 지냈다.
공은 만력 정유년(1597년)에 출생하였으며, 또 일곱 번째 정의 해인 정미년을 만나 그 해 8월 4일에 작고하니 이어 10월 18일에 안산군 서쪽에 있는 꼬불꼬불한 산의 부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음이 전해지자 사류들이 슬퍼하고 아까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조공 복양이 공의 풍도와 절의가 뛰어나니, 마땅히 추증의 명을 내려 해이된 풍속을 힘쓰도록 해야 된다고 아뢰자 임금이 그 말을 따랐다.
아내인 정부인은 기묘사화 때의 종신인 문익공의 5세 손녀이자 지사를 지낸 광성의 딸이다. 부인은 영명하고 현숙하였으며, 세 명의 남동생이 있어, 모두 과거에 급제해서 두 명의 의정이 되고, 하나는 아경이 되었는데, 그들의 부모가 일찍이 “우리 네 자녀의 훌륭함을 매긴다면 손위의 순서와 같다.”고 했다.
부인이 작고하자 공이 다시 아내를 맞이하기로 의논하매, 양파공은 여러 아들을 위해 걱정하였는데, 나중 부인 유씨는 사인 익의 딸로 자애롭고 화순하여 여러 아들을 기르면서 곡진하게 사랑을 베풀어서 여러 자식들이 어머니의 얼굴이 바뀐 점을 깨닫지 못했으며, 공이 작고하자 몹시 슬퍼하다가 장례가 겨우 끝나자마자 작고하였다.
공의 아들 중 지미 ∙ 지선 ∙ 지완과 유수인 이 선에게 출가한 딸은 전부인 소생이고, 지경과 지인은 나중 부인의 소생이다.
세 아들과 한 명의 사위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첫째는 지평을 지냈으나 공보다 앞서 죽었으며, 그 다음은 모관이다. 넷째 아들과 막내도 모두 단정하고 착하며 재주가 있어서 사우들이 칭찬하고 있으며, 측실이 난 아들은 지희이고 두 딸은 구문한 ∙ 박정식의 아내가 되었다.
손자는 식 ∙ 정 ∙ 채 ∙ 재 ∙ 최 ∙ 혜 등인데, 재는 모관의 둘째 아들로 지평의 후사가 되었으며, 실이 공의 제사를 맡고 있는데 실은 지평의 특실이 낳은 손자이다. 손녀 사위는 이세정 ∙ 민진원 ∙ 박 담 ∙ 이의진이다.
처음에 내가 종인인 송국전 형제와 한 마을에 살면서 그들에게 어려서부터 공의 사행을 익히 들었는데 , 대체로 그들이 공에게 이종형제가 되기 때문이었다.
쌀이나 소금처럼 하찮은 일도 말해 주는 자가 있으면 공은 반드시 그와 더불어 친 형제 처럼 말을 주고받았으므로 공이 매서인 호주 채유후와 더불어 서로 동기간처럼 좋게 지낸다는 것을 들었는데, 채공이 우스갯소리를 잘하여 항상, “윤 아무개는 그저 음식의 맛만 알 뿐이고 세속의 맛은 모른다.”고 말했으니 그것은 공이 시호에 집착하지 않음을 찬미한 것이다.
또 우재 이상공 후원이 자신의 훌륭한 아들을 보내 공의 사위가 되게 하였다고 들었으며, 또 동춘 송공 준길이 효종 때에 임금의 부름을 받고 나아갔다가 돌아 와서 우상으로 인해 아무개와 이웃하여 지냈고, 아무개로 인해 책공과 친숙하였다는 이야기를 하였으니ㅏ 나는 공에 대해 진실로 열이면 여덟 아홉은 알았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좁고 아는 것이 부족하여 책비의 생각이 없지 않았는데, 임금의 상을 당해 함께 울며 서로 더불어 주선할 때에 이르러서 그 때까지 몰랐던 것을 더욱 알게 되었다.
본조의 여러신하들의 복제가 띠풀로 싸맨 것 처럼 엉성하다는 기롱이 있었는데, 공이 주자의 의논에 의해서 쇠질로 성복하고, 따로 시사복(업무를 수행할 때 입는 옷)을 만들어 사진(관리가 출근하는 것)토록 하고자 청했는데 그 일이 비록 시행되지 않았지만 논자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이에 앞서 석실 김문정공과 동계 정문간공이 대의를 도와 세우고 날카로운 의견을 세우다가 뭇 소인들의 공격을 받자 공은 임금이 계신 자리에서 사정의 구별을 극력히 말했으니 진실로 뭇 소인들의 증오하는 바가 되었으며, 공은 또 윤선도의 흉악 ∙ 패려함을 몹시 미워하여 통렬히 배척하고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바가 없었다.
인조 ∙ 효종 두 성군은 공의 충성스럽고 순박함이 의지할 만 함을 알고서 벼슬에 제수할 즈음에 비록 친혐이 있더라도 파격적인 예로 대우하여 스스로 공과 친근하였으며, 일찍이 공이 당을 내려오다가 낙상한 적이 있었는데, 효종은 그 소식을 듣고 의약과 진귀한 음식을 여러 차례에 걸쳐 보냈으니 여기에서도 또한 임금과 신하의 됨됨이를 살필 만하다.
그가 용기있게 물러난 절개에 이르러서는 맹분과 하육이라도 그의 결심을 돌이킬 수 없었고, 사대부들 사이에 풍문을 높이 떨쳤다. 그래서 현종이 내린 제문에 이르기를, “벼슬이 나가서나 그만 두고 물러나 서나 보두 세도를 비익했으니, 청렴에 힘쓰게 하고 게으른 자들을 분발시킴은 경에게 힘입어였다.” 고 했으니 이것은 가히 백세를 두고 빛낼 만 하다.
영릉의 택정은 실로 공의 피나는 정성이 스민 곳이었으나 뭇 소인들은 다투어 남의 흠집을 찾아내고 남이 화를 당함을 다행으로 여기는 못된 기회로 삼았으므로 마침내 다른 곳으로 옮기기에 이르렀다. 옛날에 주자가 산릉의 길흉을 논하면서 말하기를, “선령을 경공케 하는 것도 능히 재앙을 초래한다.”고 했는데, 그로부터 일년도 못가서 국가에 화근이 잇따랐으니 주자의 말씀이 여기에서 더욱 증명되며, 공이 만일 지각이 있다면, 반드시 지하에서 통곡하리라 생각된다. 명하기를,

말 잘하고 약삭빠르며, 잘난체 하는 것을 세상에선 똑똑하게 생각한다.
공은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고 한결같이 순진하기만 했네.
어지럽게 권세에 집약하다가, 늙어 죽어서야 그만둠은,
바로 인간의 상정이거늘, 공은 그런 것을 부끄럽게 여겼도다.
삼조를 내리 섬기면서 현직을 모두 지냈지만,
사람들은 탐욕스럽다거나 시기하지 않았으니, 인자하고 중후함이 그렇게 만들었도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은 강직하고 굳셈을 지녀 와서,
충신을 드러내고 간적을 가려내어, 적에게는 경구처럼 강경했네.
청렴하고 결백하여 가난하고 검소하게 살았지만, 마음으로 인하여 여유가 있었도다.
만년에 사직하고 돌아갈 적엔, 고상한 풍도가 늠연했네,
서리가 내린 뒤에야 국화가 늦게 지는 것을 볼 수 있고,
눈이 온 뒤에라야 소나무의 지조를 알 수 있네,
남들도 또한 말을 해서 만절을 보전키 어려움을 얘기했도다.
누대의 까마귀와 연못의 봉황은 예로부터 탄식했던 바로다.
퇴폐해진 세상에 경종을 울린 것은 바로 공의 공적이로다.
공의 행적을 따라서 그 시종을 캐 보았지만,
실로 어떻게 해야 형용할 수 있겠는가?
솜으로 쇳덩이를 쌋다고 함이 공에게 가까울 것이로다.

추기

위의 글은 숭정 경신년(1620년)간에 이루어졌으나 채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는데 병자년에, 아들 지선 ∙ 지완이 정승에 제배됨으로 의정부영의정겸 세자사에 추증되었다. 지경은 부정으로 2남 3녀를 두었는데 진사인 환과 수이고, 사위 셋은 현령 이형좌 ∙ 진사 임상정 ∙ 그리고 유유이다. 지인은 문과 감사이고 3남 2녀를 두었으니 심 ∙ 용 ∙ 교이고 사위 둘은 이서곤 ∙ 이의중이다. 서자 지희는 찰방인데 2남은 준 ∙ 환이고 1녀는 어리가. 동의 사위 구문한은 군수인데 1남1녀로 아들은 여○이고 사위는 홍진수이다. 둘째 사위 박정식은 찰방으로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만형 ∙ 만부 ∙ 만휘 ∙ 만징이고 사위 둘은 남원군수이사량과 설손이다.
식은 주부로 3남은 상원 ∙ 상통 ∙ 상손이고 2녀는 어리다. 채는 판관인데 4남 1녀로서 상형 ∙ 상길 ∙ 상회 ∙ 상정과 이종성이다. 재 ∙ 최∙ 정 ∙ 혜는 일찍 죽어 상형을 취해 재의 뒤를 잇게 하여 제사를 맡게 하였다. 정은 1남 2녀 아들은 상일이고, 사위 둘은 김복연 ∙ 유필원이다. 혜는 상정으로써 뒤를 잇게 하였다. 환은 1남 2녀이고 심은 2녀를 두었으며, 용은 1녀, 교도 1녀인데 모두 어리다. 서손 실은 2남 2녀인데 아들은 무과 상질과 상문이고 사위는 조장빈이며 딸 하나는 어리다.
공의 손녀 사위이세정은 도사인데 2남 1녀로서 아들은 현감 이의수와 이의규이고 사위는 윤사도이다. 둘째 사위 민진원은 참판으로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창수 ∙ 형수 ∙ 통수이고 사위는 이주진이다. 군수 박담은 1남1녀인데 진사 양한과 사위 오수욱이다. 넷째 손녀 사위 현령 이의진의 아들 보혁은 참봉이다. 손자에서 가지쳐 나간 후손으로 원문에 기재되어 있지 않은 자를 이에 삼가 추기하며, 외증현손은 다 기록하지 못하겠다.

숭정기원후 82년 기축 월 일 세움.

 

 빈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