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윤계겸 신도비문(尹繼謙 神道碑文)
04. 윤계겸 신도비문(尹繼謙 神道碑文) |
1489년 지금의 파주시 교하면 당하리에 윤계겸(尹繼謙, 1442∼1483년)의 사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이다. 손비장(孫比長)이 글을 짓고, 허성(許誠)이 글을 쓰고 전을 하였다. 자는 익지(益之), 필보(弼甫)이며,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아버지는 우의정을 지낸 사흔(士昕)이고, 어머니는 경주 김씨(慶州金氏)로서 병조정랑을 지낸 자온(自溫)의 딸이다. 1456년 처음으로 장사랑을 제수받고 1457년 세자우참군(世子右參軍)에 올랐으며, 그 뒤 호조정랑을 역임하였다. 1467년 의빈부경력(儀賓府經歷)으로 선전관(宣傳官)을 겸하였고,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우부승지가 되었다. 1468년 남이(南怡)의 옥사에 끼친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에 책록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영평군(鈴平君)에 봉해졌다. 1471년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다시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었다. 1480년 행경상도관찰사, 공조판서가 되고, 1483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오르면서 다시 영평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공양(恭襄)이다. 부인은 김해 김씨로서 병조판서로 추증된 김헌손의 딸이다. 부인과의 사이에 5남 4녀를 두었다. 신도비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당시의 정치적 상황의 추이를 살펴볼 수 있다 |
尹繼謙 神道碑 |
공의 먼 조상인 관(瓘)은 추충좌명평술척지진국공신 개부의동삼사상주국
수태위문하시중판이부사 영평군 개백감수국사 문숙공으로 고려 예종 때 북쪽 여진족을 평정하여 큰 업적을 남겼다. 증조부 승례(承禮)는
봉익대부판도판서이고 조부 번(璠)은 숭대부판중추원사로서 정정공이라는 시호를 받은 인물로 정희왕후를 낳았다. 부친 사흔(士昕)은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시호는 양평이며 경주 김씨인 병조정랑 자온(自溫)의 딸을 배필로 맞아 정통(正統) 임술년(1442년)에
공을 낳았다. 성화(成化) 정해년(1467년)에 의빈부경력으로 선전관을 겸직하고 있을 때 세조가 공의 현명 여부를
시험해보았는데 과연 일을 자세하고 명확하게 처리하자 쓸만한 그릇으로 생각하여 특별히 동부승지에 제수했다. 얼마 안 있어 좌부승지로 승진시켰는데
이 때 공의 나이 26세였다. 성종이 즉위한 뒤에는 좌승지가 되었으며 경인년(1470년)에는 가선대부로 승진하고 호조참판으로 옮겨갔다. 신묘년(1471년)에는 보좌한 공로로 순성명량좌리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임진년에는 경기관찰사로 나갔다가 임기가 다 되어 이조참판으로 자리를 옮겼다. 갑오년(1474년)에 자헌대부로 승진하고 행형조참판이 되었다가 곧바로 대사헌을 제수 받았다. 나
손비장(孫比長)은 당시 장령으로서 공을 모셨는데, 격려하고 드날리게 하는 것을 자임하여 간사하고 아첨한 자를 보면 털끝만큼도 용서하지 않아
조정의 기강이 진작되고 숙연해져 옛 법의 풍조가 있게 되었다. 공의 부임 소식을 들은 수령들은 마음 졸이며 두려워했으나 교체된 뒤에는 오히려 자애로운 자취가 남게 되었다. 당시 장예원의 송사가 판결이 안 되고 적체되어 있자 왕이 특별히 단도감(斷都監)을 설치하고 명쾌하게
처리할 수 있는 재상을 당상으로 선발하라고 했다. 공이 선발되어 여러 해 계속된 소송을 남김없이 처리하자 사람들이 시원하게 여겼다.
정희왕후가 승하하자 함께 관을 모시고 돌아온 뒤부터 공의 병이 날로 심해졌다. 왕이 호종의 공로를 논할 때 공이 가장 수고했으므로 특별히 정헌대부를 제수하자 있는 힘을 다해 대궐에 가 사은숙배를 한 뒤 몇 달 만에 사망했다. 때는 9월 22일이었다. 부음이 알려지자 조정과 시장을 이틀간 닫고 공양(恭襄)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파주군 교하면 초동(坡州郡交河面草洞)의 언덕에 예장했다. 공의 맏아들 판관이 내게 찾아와, “아버님께서 ‘손비장이 나와 가장 친했으니 그의 손을 빌려 내
묘지명을 쓰게 하라.’ 고 유언 하셨습니다.” 하고 말한 뒤 간절히 청하니 사양할 수 없었다.
명왈(銘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