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윤관 시중대비문(尹瓘侍中臺碑文)
07. 윤관 시중대비문(尹瓘侍中臺碑文) |
이 비는 1721년(경종 1년) 북청에 건립된
윤관시중대비(尹瓘侍中臺碑)로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며 윤관(諱 尹瓘)의 후손인 윤헌주(諱 尹憲柱)가 비문을 짓고, 아울러 썼다.
문종(文宗)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숙종(肅宗) 9년(1104년)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사(東北面行營兵馬都統使)가 되어 여진(女眞)을 정벌하기 시작하였는데, 예종(睿宗)
2년(1107년)에 적을 크게 무찌르고 함주(咸州), 영주(英州) 등지에 9성(城)을 쌓았다. 말갈을 정벌할 때 북청지방을 오르내렸기에 사람들이
그 지방을 시중대(侍中臺)라고 불렀으며, 후에 후손인 윤헌주(諱 尹憲柱)가 함경도관찰사겸 함흥부윤이 되어 이를 기념하고자 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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侍中臺」 |
윤관시중대비(北靑尹瓘侍中臺碑) 윤관(尹瓘, ?~1111년)은 고려 중기의 문신이자 명장으로, 자(字)가
현동(玄同)이고 시호(諡號)가 문경(文景), 문숙(文肅)인데, 태조(太祖) 때의 삼한공신(三韓功臣) 윤신달(尹莘達)의 현손이며
검교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 윤집형(尹執衡)의 아들이다. 문종(文宗)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숙종(肅宗) 9년(1104년)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사(東北面行營兵馬都統使)가 되어 여진(女眞)을 정벌하기 시작하였는데, 예종(睿宗) 2년(1107년)에 적을 크게 무찌르고
함주(咸州), 영주(英州) 등지에 9성(城)을 쌓았다. 경성부(鏡城府)에 "원수대(元帥臺)"가 있는데, 그 또한 공으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때로부터 555년 윤관(尹瓘)의 여진(女眞) 정벌 연대를
1106년(睿宗 1년)으로 간주하고 이를 이 시중대 비석을 세운 시점인 1721년(경종 1년)과 비교하면 615년의 차이가 생긴다. 이는 위
본문에서 말한 "555년"보다 한 갑자(甲子)에 해당하는 60년이 더 많은 햇수인데, 이러한 오류는 찬자 윤헌주(尹憲柱)의 간지(干支) 계산의 착오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공께서 북방을 정벌할 때의 사적(事蹟)에 대해서는『고려사(高麗史)』및 그 열전(列傳) 『고려사(高麗史)』96卷 「열전(列傳)」 9 참조. 에 자세히 실려 있고 각종 지지(地誌)와 전기(傳記)에도 많이 보이므로, 다시 더 기록하지 않는다. 마침내 명(銘)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춘령(先春嶺)은 두만강 북쪽 약 320리 지점에 있다 한다. 공께서 오르내리셨기 때문이라네.
윤헌주(尹憲柱,1661~1729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字)가 길보(吉甫)이고 호(號)가
이지당(二知堂)이며 시호(諡號)는 익헌(翼獻)이다. 숙종(肅宗) 때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전적(典籍), 사간(司諫) 등을 거쳐
함경도관찰사, 호조판서 등을 지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