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 자료/파평윤씨 자료

07. 윤관 시중대비문(尹瓘侍中臺碑文)

물텀벙 2015. 3. 13. 21:39

07. 윤관 시중대비문(尹瓘侍中臺碑文)

 

 

이 비는 1721년(경종 1년) 북청에 건립된 윤관시중대비(尹瓘侍中臺碑)로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며 윤관(諱 尹瓘)의 후손인 윤헌주(諱 尹憲柱)가 비문을 짓고, 아울러 썼다.
윤관(尹瓘, ?~1111년)은 고려 중기의 문신이자 명장으로, 자(字)가 현동(玄同)이고 시호(諡號)가 문경(文景), 문숙(文肅)인데, 태조(太祖) 때의 삼한공신(三韓功臣) 윤신달(諱 尹莘達)의 현손이며 검교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 윤집형(諱 尹執衡)의 아들이다.

문종(文宗)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숙종(肅宗) 9년(1104년)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사(東北面行營兵馬都統使)가 되어 여진(女眞)을 정벌하기 시작하였는데, 예종(睿宗) 2년(1107년)에 적을 크게 무찌르고 함주(咸州), 영주(英州) 등지에 9성(城)을 쌓았다. 말갈을 정벌할 때 북청지방을 오르내렸기에 사람들이 그 지방을 시중대(侍中臺)라고 불렀으며, 후에 후손인 윤헌주(諱 尹憲柱)가 함경도관찰사겸 함흥부윤이 되어 이를 기념하고자 비를 건립하였다.
현재 탁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侍中臺」
維我 先祖文肅公坡平尹公諱瓘字同玄高麗文宗朝登文科壯元睿宗朝以門下 侍中爲行營大元帥征討靺鞨時甞登臨于此後人因以侍中名焉鏡城府有元帥臺 亦因 公而名也後五百有五十五年不肖忝按本道立碑于臺上刻侍中臺三字而 若北征時事蹟詳載麗史及本傅雜出地誌傅記等書不復記遂作銘銘曰於休我 祖天降麗國 出入將相蔚爲柱石 授鉞關外蘯掃女直 鐵嶺以北境 土大拓 先春勒碑庸表疆域 靑海波晏白山烽息 功盖吾東威振漠北 金火 雖遷尙留遺蠋 有臺屹然府臨暘谷 名以侍中 公所登陟 松杉鬱蒼人猶愛 惜 不肖巡過感慕靡極 竪茲片石三字大刻 千秋萬代過者必式
崇禎紀元後九十四年辛丑孟秋
二十二世孫資憲大夫行咸鏡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都巡察使咸興府尹憲柱謹撰書」

 

 

윤관시중대비(北靑尹瓘侍中臺碑)

侍中臺(시중대)

우리 선조(先祖)인 문숙공(文肅公) 파평윤공(坡平尹公)은 휘(諱)가 관(瓘)이시고 자(字)가 동현(同玄)이신데, 고려 문종(文宗) 때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셨고, 예종(睿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서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가 되셨다.

윤관(尹瓘, ?~1111년)은 고려 중기의 문신이자 명장으로, 자(字)가 현동(玄同)이고 시호(諡號)가 문경(文景), 문숙(文肅)인데, 태조(太祖) 때의 삼한공신(三韓功臣) 윤신달(尹莘達)의 현손이며 검교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 윤집형(尹執衡)의 아들이다. 문종(文宗)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숙종(肅宗) 9년(1104년)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사(東北面行營兵馬都統使)가 되어 여진(女眞)을 정벌하기 시작하였는데, 예종(睿宗) 2년(1107년)에 적을 크게 무찌르고 함주(咸州), 영주(英州) 등지에 9성(城)을 쌓았다.
말갈(靺鞨)을 정벌할 때 일찍이 이곳을 오르내리셨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그런 일을 연유로 여기를 "시중대(侍中臺)"라 일컫는다.

경성부(鏡城府)에 "원수대(元帥臺)"가 있는데, 그 또한 공으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때로부터 555년 윤관(尹瓘)의 여진(女眞) 정벌 연대를 1106년(睿宗 1년)으로 간주하고 이를 이 시중대 비석을 세운 시점인 1721년(경종 1년)과 비교하면 615년의 차이가 생긴다. 이는 위 본문에서 말한 "555년"보다 한 갑자(甲子)에 해당하는 60년이 더 많은 햇수인데, 이러한 오류는 찬자 윤헌주(尹憲柱)의 간지(干支) 계산의 착오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뒤에, 불초(不肖)한 내가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어 시중대에 비석을 세우고 "시중대(侍中臺)"라는 글자 석 자를 새겼다.

공께서 북방을 정벌할 때의 사적(事蹟)에 대해서는『고려사(高麗史)』및 그 열전(列傳) 『고려사(高麗史)』96卷 「열전(列傳)」 9 참조. 에 자세히 실려 있고 각종 지지(地誌)와 전기(傳記)에도 많이 보이므로, 다시 더 기록하지 않는다.

마침내 명(銘)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 훌륭하신 우리 선조님이시여!
하늘이 고려국(高麗國)에 태어나게 하셨도다.
조정을 드나드시며 장수와 재상을 지내셨으니
성대하게도 국가에 주석(柱石)과 같은 인재이셨네.
부월(斧鉞 : 작은 도끼와 큰 도끼로, 출정(出征)하는 대장에게 국왕이 내려주는 것이다)을 들고 국경을 나가 여진족(女眞族)을 시원하게 소탕하셨으니, 이에 철령(鐵嶺) 이북으로 국경이 크게 넓혀졌다네.
선춘령(先春嶺)에 비석을 새기고
국경(國境)을 표시하였으니, 고려 때 윤관(尹瓘)이 북방의 오랑캐를 퇴출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그 경계를 표시하기 하기 위해 선춘령(先春嶺)에 비석을 세운 일이 있다.

선춘령(先春嶺)은 두만강 북쪽 약 320리 지점에 있다 한다.

청해(靑海)에는 물결이 잔잔하고
백두산에는 봉화(烽火)가 잠을 자도다.
공의 공적(功績)은 우리 나라를 뒤덮었고
공의 위엄은 만주 북쪽을 진동하였다.
세월이 흘러 시대는 변했지만
공께서 남기신 자취는 아직도 남아 있으니,
시중대(侍中臺)가 우뚝 솟은 채
해뜨는 동방을 굽어보누나.
‘시중대’라고 이름한 것은

공께서 오르내리셨기 때문이라네.
소나무와 전나무 울창히 우거져 있으니
사람들이 더욱 애석하게 여기네.
불초한 내가 여기 관찰사로 와서 보니
느꺼워 흠모하는 심정 한이 없구나.
이에 한 조각 빗돌을 세우고
‘侍中臺(시중대)’ 석 자를 새겼으니,
천추만대(千秋萬代)토록
이곳을 지나는 자 경의(敬意)를 표할지어다.

숭정기원후 94년 신축년(경종 1, 1721년) 9월, 공의 22세손(世孫) 자헌대부(資憲大夫) 행함경도관찰사(行咸鏡道觀察使) 겸(兼)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 도순찰사(都巡察使) 함흥부윤(咸興府尹) 윤헌주(尹憲柱)가 글을 짓고 글씨를 썼음.

윤헌주(尹憲柱,1661~1729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字)가 길보(吉甫)이고 호(號)가 이지당(二知堂)이며 시호(諡號)는 익헌(翼獻)이다. 숙종(肅宗) 때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전적(典籍), 사간(司諫) 등을 거쳐 함경도관찰사, 호조판서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