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 자료/파평윤씨 자료

12. 윤민헌 묘갈문(尹民獻 墓碣文)

물텀벙 2015. 3. 13. 22:10

12. 윤민헌 묘갈문(尹民獻 墓碣文)

 

 

1709년(숙종 35년)에 후손들에 의해 건립된 윤민헌의 묘갈이다.

전액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예조판서, 좌참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경서(經書)와 문장에 능했으며, 해서, 초서, 전서, 예서에 모두 능해 사대부들의 비갈(碑碣)을 많이 남긴 윤덕준(1658~1717년)이다.

이 비석은 비좌개석(碑座蓋石)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개석은 조선 후기에 흔히 사용되던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비석의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여 대부분의 글자를 판독할 수 있다. 특히 비문이 자경(字徑) 4~5cm 의 대해(大楷)로 쓰여 있다.
윤민헌(1562~1628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율곡(栗谷) 이이(李珥 : 1536~1584년)와 우계(牛溪) 성혼(成渾 : 1535~1598년)의 문하생이다.

1588년(선조 21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09년(광해군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대북파(大北派)가 득세하자 시골로 낙향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올랐다가 곧이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옮겼으며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공주로 호종하였다.

난이 진압된 후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오르고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찬자는 본인이며, 추기(追記)는 공(公)의 손자이며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좌참찬(左參贊), 우의정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던 윤지완(1635~1718년)이 썼다.

서자는 공(公)의 손자이며 윤지완의 동생으로 이조참판, 병조판서 등의 관직을 역임한 윤지인(1656~1718년)이다.
비문의 전반부에는 공(公)이 관직생활에 관한 일화로 벼슬에 나아갔지만 대북파가 득세하여 스스로 외직인 괴산군수(槐山郡守)로 나아갔으나 토호(土豪)들의 미움을 사 곧 파직되었고, 다시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으로 재직했지만 곧 파직되어 낙향하였다는 내용이다. 후반부에는 공(公)의 성품과 스스로 비명(碑銘)을 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추기(追記)에는 공(公) 선대(先代)의 가계도 및 관직 등의 간략한 소개와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공주로 왕을 호종한 공으로 통정대부에 오르고,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공조참의에 이르러 병으로 사직하였으며, 안산으로 돌아와 죽었다는 내용이다.

후반부에는 부인 및 후손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이다.

 

 

尹民献墓碣贈左賛成行工曹參議尹公墓碣銘 (篆額)

有明朝鮮國贈崇祿大夫議政府左賛成兼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舘成均舘事弘文舘大提學藝文舘大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行通政大夫工曹參議尹公墓碣銘余性素簡傲 與世抹摋 晚年雖得釋褐 一不踵權門 擧世貪墨 羞與同列 是時大北黨尤張 爲銓曹者 三除假郞 俛首奉職 欝欝不樂 求補外 得守槐山 其治張弛 爲土豪所惡 適有言官 是同黨 借助聲勢 余見誣也 其後爲司成 姦魅之子是諫長 方軋異已 余見斥也 已而出爲大同馹官則 屢經汚吏 極凋弊 欲條陳上聞 除瘼蘇殘 適元帥率大軍 向奴穴加詰責 余見辱也 即棄官歸來 竊自惟念 才雖不逮人 志慕古賢 常憤士夫間天理幾熄 鄙夷若凂焉 益堅此操不變則 必隨處見敗 永絶仕宦之心 沉冥田野間終焉 盖出身十餘歲 食祿日無幾 戊午春 亦在癈中 幸免禍厄 其出處大略如斯 此豈於自己分上有得力處而然哉 甞遊牛溪門下 每戒勿爲名利子 故平生佩服不失也 其門闌族世 悉著祖先碑誌矣嗚呼 德行才藝 莫先君伍 而年位俱不贏 至如不肖無寸長 位至三品 年至若干 是何天道報施乖戾若是耶 今自爲銘者欲使子若孫 勿復綴虛辭以○謾後世也右錄 乃泰昌庚申年間 王考自銘者也 府君坡平人 姓尹諱民獻 字翼世號苔扉 曾祖諱爕 尙成宗大王女靜淑翁主 爲鈴平尉 祖諱之諴 生員贈吏曹參判 考諱儼 文科佐郞贈吏曹判書 妣安東金氏 花山君주女 府君遭光海朝 官不顯沉淪田野 絶意當世 庚申後四年 爲仁祖元年癸亥 改玉之初 首拜軍資監正 俄遷司憲府掌令 申子 逆适擧兵叛 上出幸公州 府君以扈駕勞 陞通政階 拜僉知中樞 移工曹參議 謝病歸墓下故居 崇禎戊辰七月二十二日棄世 壽六十七  配延安金氏 監正纉先女 卒於丁亥七月九日 府君始葬安山樻火洞先墓側 夫人亦權窆他山 戊子春 並遷奉于先墓右麓乙坐之原 夫人祔左 後累贈府君議政府左賛成 配貞敬夫人 因先考貴也 府君有一男一女 男即先考 諱絳位冡宰 女歸大提學蔡裕後 先考初聘鄭氏 生三男一女 男趾美持平 趾善左議政 趾完右議政 女適參判李選 皆以文科進 再聘柳氏 生二男 趾慶副正 趾仁文科監司 庶子 趾禧察訪 二女爲郡守具文漢察訪朴廷軾妻 趾美一女 適都事李世貞 以趾完子宰爲後 庶子宲護軍 趾善二男 寔主簿定 一女適參判閔鎭遠 趾完四男 宷判官宰최寭 二女適郡守朴鐔縣令李宜振 趾慶二男 연進士邃 三女適縣令李衡佐進士林象鼎柳愈 趾仁三男 審容교 二女適李瑞坤李宜中 趾禧二男 寯寏一女幼 寔三男 尙遠尙通尙遜 二女幼 定一男 尙逸 二女適金復衍柳弼垣 宷四男 尙衡繼宰後主宗祀 尙吉尙喜尙靖  一女適李宗城 연一男二女 審二女 容一女 교一女 皆幼 宲二男 尙質武科尙文 二女趙章彬一幼 嗚呼 府君之志行德美 可書者多 重違遺意 不敢徵文樹碑 謹刻自銘之辭於墓碣 附記庚申後事蹟及子姓外裔 多不能載

孫 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 趾完 附識

孫嘉善大夫平安道觀察使兼巡察使兵馬水軍節度使管餉使平壤府尹 趾仁 謹書

嘉善大夫咸鏡道觀察使兼巡察使兵馬水軍節度使咸興府尹 尹德駿 篆

崇禎紀元後八十二年 己丑 月 日立

 

 

증좌찬성 행공조참의 윤공묘갈명 (전액)
유명조선국 증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 제학 예문관대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 행통정대부 공조참의 윤공 묘갈명

나는 성품이 본래 간오(簡傲)하여 세속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만년에 비록 과거에 급제는 했으나 한번도 권세있는 자를 찾아다니지 않았고, 온 세상의 벼슬아치들이 탐오하였으므로 그들과 더불어 자리를 같이 함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 무렵 대북당이 더욱 기세를 떨쳤다. 전조를 맡은 자가 세 번이나 가낭청에 제수하므로 굴욕을 참고 봉직하였으나 마음이 답답하여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외직을 구하여 괴산군수로 나갔다. 그 곳을 다스리다가 토호의 마음을 샀는데, 마침 언관으로 있던 자가 토호와 한 패거리였으므로 토호가 그의 성세를 등에 업게 되어 나는 무고를 입었다.
그 뒤 성균관 사정이 되었으나 간괴(姦魁)의 아들이 바로 간장(사간원대사간)으로 있으면서 한창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를 미워하였으므로 나는 배척을 받았다. 얼마 후에 외임으로 나가 대동찰방이 되었는데 그 곳이 누차 탐학한 관리들을 겪은 통에 몹시 피폐하였으므로 일일이 임금에게 아뢰어서 폐단을 없애고 지친 주민들을 소생시키려 하였으나 마침 원수가 대군을 거느리고 오랑캐의 소굴로 향하면서 느닷없이 힐책을 가하니 나는 치욕을 입었다. 이에 즉시 벼슬을 버린 채 고향에 돌아와서, 가만히 스스로 생각하기를, “재주는 비록 남에게 미치지 못하나 뜻은 옛적의 현인들을 흠모하여 항상 사대부 사이의 천리가 거의 없어진 세태를 분통히 여겼는데, 추악한 자들이 만약 더럽히려 할 때 더욱 이러한 지조를 견지하고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반드시 가는 곳 마다 패배를 입을 것이니 벼슬에 나설 생각을 아예 끊고서 전야 사이에 묻혀 지내다 여생을 마치리라”고 작정했다.
내가 벼슬에 나선 기간은 10여년이나 녹을 먹은 지는 얼마 되지 않으며, 무오년(1618년) 봄에도 폐산된 가운데 있었으므로 다행히 화액을 면했다. 나의 출처의 대략이 이와 같은데 이는 어찌 자기의 분수상에 깊이 깨달은 점이 있어서 그랬겠는가? 일찍이 우계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스승이 매양 명리를 추구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리하여 그 점을 평생 가슴속에 새기고서 잃지 않았던 것이다.
나의 집안과 선계의 내력은 모두 조선의 비지에 쓰여 있다. 아! 덕행과 재예가 선군과 같은 점이 없는데, 선군은 수명과 지위가 모두 충분하지 않았고, 불초처럼 조금도 재주가 없는 자에 이르러서는 벼슬이 3품에 이르고 나이도 약간에 이르렀으니 어찌하여 천도의 보시가 이다지도 어긋나는가?
지금 내가 스스로 명을 쓰는 것은 아들과 손자로 하여금 다시 허사를 엮은 후세에 자랑하거나 뻐기지 말도록 하고자 해서이다.
오른쪽의 기록은 바로 태창(泰昌) 경신년(1620년) 사이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스스로 명한 것이다. 부군의 관향은 파평이요 성은 윤씨이며, 휘는 민헌(民獻), 자는 익세(翼世), 호는 태비(苔扉)이다. 부군의 증조부인 휘 섭(燮)은 성종대왕의 딸인 정숙옹주에게 장가들어 영평위가 되었고, 조부인 휘 지함(之諴)은 생원으로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인 휘 엄(儼)은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을 지내고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어머니는 안동 김씨로 화산군 주(澍)의 딸이다. 부군은 광해조를 당하여 벼슬이 현달하지 못하고 시골에 묻혀 지내면서 당세에 뜻을 끊고 살았다. 경신 후 4년은 인조 원년인 계해년 (1622년)이 되는데, 인조가 반정하여 왕위에 오르자마자 맨 먼저 군자감 정에 제수되었고, 곧 이어 사헌부 장령에 이직되었다.
갑자년(1624)에 역신 이괄(李适)이 병력을 이끌고 반란하니 임금이 공주로 피난할 적에 부군은 어가를 호종한 공로로써 통정대부의 품계에 오르고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이어 공조참의에 이직되어 있던 중 병 때문에 사직하고서 무덤 아래에 있던 옛 집에 돌아왔다.
숭정(崇禎) 무진년(1628년) 7월 22일에 세상을 하직하니 향년은 67세였다. 부군의 아내는 연안김씨로 감정을 지낸 찬선의 딸이며, 정해년(1647) 7월 9일에 작고하였다. 부군은 처음에 안산 궤화동 선조의 무덤 곁에 장사지냈고, 부인도 또한 다른 산에 임시로 장사지냈다가 무자년(1648)봄에 모두 옮기어 선조의 무덤 오른쪽 산기슭 을좌의 언덕에 부군을 장사지내고 부인을 왼쪽에 부장하였다.
나중에 누차 추증되어 부군은 의정부 좌찬성에 오르고 부인은 정경부인에 봉해졌는데 돌아가신 아버지의 신분이 귀해진 때문이었다. 부군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바로 나의 선고로서 휘는 강이고 벼슬은 총재를 지냈으며, 딸은 대제학을 지낸 채유후에게 출가하였다.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는는 처음에 정씨 부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중 맏이인 지미(趾美)는 사헌부 지평이요, 둘째인 지선(趾善)은 의정부좌의정이요, 막내인 지완(趾完)은 의정부우의정이며, 딸은 참판이 선에게 출가했다. 한편 이들은 모두 문과를 통해 벼슬에 나아갔다. 또 선고는 재차 유씨 부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는데 그 중 지경은 부정이고, 지인은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감사이다. 그리고 선고의 서자인 지희는 찰방이고 2명의 시녀는 군수 구문한과 찰방 박정식의 아내가 되었다.
또 부군의 손자로서 지미는 1녀를 낳았는데 도사 이세정에게 출가하였고, 아우 지완의 아들인 재를 데려다가 후사를 삼았으며, 서자인 실은 호군이다. 그리고 지선의 2남 중 장남인 식은 주부이고, 작은 아들은 정이며, 외딸은 참판 민진원에게 출가하였다. 지완의 4남 중 장남인 채는 판관이요, 둘째는 재, 세째는 최, 막내는 예이고 두 딸은 군수 박 담과 현령 이의진에게 출가하였다. 지경의 2남 중 장남인 연은 진사요, 작은 아들은 수이며, 세 딸은 현령 이형화 ∙ 진사 임상정, 유 유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지인의 3남은 심, 용, 교이고, 두 딸은 이서곤, 이의중에게 출가했다. 지희의 2남은 준, 환이요, 1녀는 어리다.
그리고 부군의 증손자로서 식은 3남을 두었는데, 상원, 상통, 상손이요, 두 딸은 어리고, 정의 1남은 상일이요, 두 딸은 김복연, 유필원에게 출가하였다. 채의 4남 맏이인 상형은 출계하여 재의 후사를 이어 종사를 주관하고 있고, 나머지는 상길, 상희, 상정이며, 1녀는 이종성에게 출가하였다. 연의 1남 2녀와 심의 2녀 및 용의 1녀, 교의 1녀 등은 모두 어리다 .또 실의 2남 중 맏이인 상질은 무과에 급제하였고 작은 아들은 상문이며, 2녀 중 큰 딸은 조장빈에게 출가했고 하나는 어리다.
아! 부군의 지행이나 미덕은 기록할만한 것이 많지만 유의를 어기기가 중난하여 감히 남에게 글을 구해서 비석을 세울 수가 없으므로 삼가 스스로 명한 글을 묘갈에 새기고 경신년(1620년) 이후의 사적과 자손 ∙ 외손을 부기하였는데 싣지 못한 사실이 많다.

손자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지완(趾完)은 부기함.
손자 가선대부 평안도관찰사 겸순찰사병마수군절도사관향사 평양부윤 지인(趾仁)은 삼가 씀.
가선대부 함경도관찰사 겸순찰사병마군절도사 함흥부윤 윤덕준(尹德駿)은 전서를 씀.
숭정(崇禎) 기원후 82년인 기축년(1709년) 월 일 세움

 

 빈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