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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윤수열 신도비문(尹受說 神道碑文)

물텀벙 2015. 3. 14. 07:26

19. 윤수열 신도비문(尹受說 神道碑文)

 

 

 

이 비는 1726년(영조 2년) 경기도 양주에 건립된 윤수열신도비(尹受說神道碑)로 손자인 윤헌주(尹憲柱)가 비문을 지었고, 아울러 글씨도 썼다.
윤수열(尹受說 : 1602~1666년)의 본관은 파평이고, 자는 천수(天授)이다. 12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상례를 집행하는 것이 어른과 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1639년(인조 17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매번 사마시에는 합격하였으나, 결국 문과에 급제하지는 못하였다.

말년에 음사로 관직을 맡아 처음 희릉참봉에 제수되었고, 제용감봉사로 승진하였으나 얼마 안 있어 풍(風)이 들어 벼슬을 그만두었다.

후에 장남의 벼슬이 높아져서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維我 鼻祖坡平尹公諱莘達佐高麗太祖統合三韓爲太師三重大匡壁上三韓功臣于後五百年世襲卿相有若文靖公諱執衡文肅公諱瓘文康公諱彦頤太尉平章事諱純文顯公諱琁良簡公諱安淑三重大匡鈴平君諱陟忠簡公諱承順皆麗代名臣也至十四世有諱坤佐我太祖策佐命功臣坡平君贈諡昭靖公昭靖公曾孫諱師路世宗朝尙貞顯翁主封鈴川尉世祖朝策佐翼功臣陞封鈴川府院君贈諡景憲(忠景)公景憲(忠景)公玄孫諱子修贈通禮院左通禮胤諱機贈承政院左承旨行翊衛司侍直胤諱宗福贈兵曺叅判配貞夫人河東鄭氏考軍資監主簿諱亨復有二男長諱得說官至監司次卽我王考吏曺叅判公也公諱受說字天授萬曆三十年壬寅七月初五日生自幼聰悟絶倫孝友出天年甫十二丁外艱哀毁過制幾至滅性執喪如禮無異成人人莫不奇之與伯氏監司公攻苦勤學文詞日進聲譽籍甚人皆以二難稱之己卯中司馬每科發解竟蹉跎晩補蔭仕初授禧陵叅奉陞濟用監奉事未幾以風病廢仕丙午十月十六日考終于正寢享年六十五葬于楊州治北松蘿山負亥之原後公長胤判書公拜同知中樞府事追榮贈吏曺叅判公氣質恬雅性度剛方見人非義之事若將浼己使人一聞言論鄙吝之萌自消常以早孤爲至慟每値忌辰必先期十日行素喪餘之朔終一月不叅宴會奉養母夫人克盡誠孝怡愉順志時作嬰兒之戲無竟於進取榮途惟以悅親爲心治公車業甚力及孤露不復赴擧公有華國之才而坐於無命竟未大闡潦倒未官而止一世士友無不嗟惜云爾夫人隋城崔氏隋城伯崔永奎之後也考學生諱士龍生于萬歷三十一年癸卯十一月十三日孝根天性氣度溫和至誠事姑無少偉忤鄭夫人常稱之曰吾得佳婦後事何憂觀其行心處事絶無傷人害物之意孝友之誠推及於踈族盡力顧助陰德甚多他日高大尹氏門閭者必此人也辛卯三月疾革執冢婦安夫人手戒之曰自古人家之敗亡皆由於奢侈汝其一遵舅家朴素之風以遺子孫俾成一家之則吾死之後殯斂衣衾葬具祭需切勿豐侈以副吾生時儉約之心以是月十五日卒享年四十九初葬于松蘿山今葬地北麓因壙中不安 叅判公葬時遷 柩合窆有三男三女側室有一男一女男長諱澤贈吏曹判書行同知中樞府事次諱僉知中樞府事次諱溭通德郞女長適完山李瑞翼次適海南尹善任次適光州金是南側室男曰星傑女爲李鼎賢妾判書公有一男不肖僉知公無後通德郞公有一男三女男太柱女長適金夢偵次適趙耘疇次適李光世李瑞翼二男一女男命長命堅女適高振河尹善任一男重美無后金是南三男天健天保天任星傑一男三女男世柱李鼎賢生一男成道不肖生二男慶一進士正郞次慶運一女適進士李岳鎭慶運一男一女男光輔女幼李岳鎭繼男演太柱生二男二女男慶徽餘皆幼世柱生二男慶弼慶積

崇禎甲申後八十三年丙午四月 日孫男正憲大夫行平安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都巡察使館餉使平壤府尹憲柱謹書

 

 

 

윤수열신도비(尹受說 神道碑)

시조인 파평 윤(尹)공은, 이름이 신달(莘達)이다. 고려 태조의 삼한 통합을 도와, 태사 삼중대광 벽상 삼한공신(太師三重大匡壁上三韓功臣)이 되었고, 그의 후손은 오백년 동안 경상(卿相)의 자리를 세습하였다. 문정공 집형(執衡), 문숙공 관(瓘), 문강공 언이(彦頤), 태위 평장사 순(純), 문현공 선(琁), 양간공 안숙(安淑), 삼중대광 영평군 척(陟,) 충간공 승순(承順)은 모두 고려시대의 명신이다. 14대 곤(坤)은 태조를 도와서 좌명공신 파평군(坡平君)에 책봉되었고, 시호(諡號)는 소정공(昭靖公)이다. 소정공(昭靖公)의 증손인 사로(師路)는 세종대에 정현옹주(貞顯翁主)와 혼인하여 영천위(鈴川尉)에 봉해졌고, 세조대엔 좌익공신에 책봉되어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으로 올려 봉해졌으며 시호(諡號)는 경헌(충경)공이다. 경헌(충경)공의 현손인 자수(子修)는 통례원 좌통례로 추증되었고, 그 아들 기(機)는 승정원 좌승지 행 익위사 시직에 추증되었다. 그 아들 종복(宗福)은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정부인(貞夫人) 하동(河東) 정(鄭)씨와 결혼하였다. 부인의 아버지는 군자감 주부 형복(亨復)이다. 종복(宗福)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득열(得說)은 벼슬이 감사에 이르렀고, 차남은 곧 나의 할아버지로 이조참판을 지냈다.
공은 이름이 수열(受說)이고 자는 천수(天授)로, 만력 30년(선조 35, 1602년) 임인 7월 5일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으며 효도와 우애는 타고났다. 나이 겨우 12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슬픔이 예절에 지나쳐 목숨을 잃을 뻔 했다. 상례를 집행하는 예가 어른과 다름이 없으니,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형 감사(監司)공과 어려운 환경에서도 부지런히 학문을 닦아, 문사가 날로 나아짐에 명성이 널리 퍼졌다. 사람들은 두 가지 어려운 일을 잘 해냈다고 칭송하였다. 기묘년(인조 17, 1639년) 사마시에 합격하면서, 매 과거 초시엔 합격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진 못했다. 만년에 음사(蔭仕 : 조상의 은덕으로 벼슬하는 것)로 처음 희릉(禧陵) 참봉을 받고 제용감 봉사(濟用監 奉事)에 올랐으나 얼마 안 있어 풍(風)이 들어 벼슬을 그만두었다. 병오년(현종 7, 1666년) 10월 16일 정침에서 임종하셨으니 향년 65세이다. 양주(楊州)관아 북쪽에 있는 송라산(松蘿山) 북북서 향을 등진 언덕에 장사지냈다. 뒤에 공의 장남 판서공이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될 때 이조참판을 추증받았다.
공의 기질은 화평하고 단아하며, 품성은 굳세고 반듯하다. 다른 사람이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하면, 마치 자신이 더럽힌 것처럼 여겨, 더럽고 인색한 싹을 스스로 없애도록 훈도하였다. 어려서 아버지 여읜 것을 항상 안타까워하여, 기일이 될 때면 반드시 기일 열흘 전부터 소반을 먹었다. 그리고 기제사가 있는 그달 초하루부터 한 달 동안은 연회도 참석하지 않았다. 어머니 모시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 뜻에 기쁘게 순종하였으며, 때로 어린 아이 짓도 하였다. 영예로운 길에 나가는 것엔 뜻이 없고, 오직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마음을 썼다. 공은 과거 공부에 힘을 다하였으나, 아버지를 여읜 뒤에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공은 나라를 빛낼 재질을 가지고도 명이 없는 곳에 있다, 끝내 문과 급제를 하지 못하고, 노년에 말단 관직에 그치었으니, 당시 사우(士友)들이 애석하다고 하였다.
부인은 수성(隋城) 최(崔)씨 수성(隋城 : 수원의 옛 지명) 백(伯) 최영규(崔永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학생 사룡(士龍)이다. 만력 31년(선조 36, 1603년) 계묘 11월 13일에 태어났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품성이 온화하여, 시어머니를 지성껏 모시며 조금도 거역하지 않았다. 정(鄭)부인이 항상 칭찬하기를, “내가 얌전한 며느리를 얻었으니, 뒷일을 어찌 걱정하겠는가? 그 마음 쓰고 일 처리하는 데에 남을 해치려는 마음은 조금도 없고, 효성스럽고 우애 있는 마음으로 먼 친척까지 힘을 다해 돌보고 도우니 음덕이 매우 많다. 뒷날 윤(尹)씨 가문이 크게 번창한다면 반드시 이 사람 때문일 것이다.” 하였다. 신묘년(효종 2, 1651년) 3월, 병이 깊어지자, 최(崔)부인은 맏며느리 안(安)부인의 손을 잡고 타이르기를, “예로부터 집안 망하는 것은 모두 사치에서 비롯하였다. 너는 시댁의 소박한 가풍을 쫓고 자손에게도 물려주어 한 집안의 준칙으로 삼도록 해라. 내가 죽은 뒤, 초빈과 염습에 쓰는 이불, 의복, 장례물품과 제수용품은 절대로 사치한 것을 쓰지 말고, 생전의 나의 검약한 마음만 함께 묻어다오.”하였다. 이 달 15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49세였다. 송라산(松蘿山)에 있는 지금의 장지 북쪽 기슭에 장사지냈으나, 무덤 속이 불안하여 참판공의 장례를 치룰 때에 옮겨 합장하였다.
3남 3녀를 두었으며, 측실에게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장남 택(澤)은 이조판서 행 동지중추부사에 증직되었고, 차남 석은 첨지중추부사이며, 막내 직(溭)은 통덕랑이다. 장녀는 완산(完山) 이서익(李瑞翼)에게, 차녀는 해남(海南) 윤선임(尹善任)에게, 3녀는 광주(光州) 김시남(金是南)에게 시집갔다. 측실의 아들은 성걸(星傑)이고, 딸은 이정현(李鼎賢)의 첩이 되었다.
판서공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불초자(자신을 지칭하는 말로 윤헌주(尹憲柱)를 가르킴)이고, 첨지공은 자식이 없으며, 통덕랑공은 아들 하나 딸 셋을 두었다. 아들은 태주(太柱)이고, 장녀는 김몽정(金夢偵)에게, 차녀는 조운주(趙耘疇)에게, 3녀는 이광세(李光世)에게 시집갔다. 이서익(李瑞翼)은 아들 둘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은 명장(命長) · 명견(命堅)이고, 딸은 고진하(高振河)에게 시집갔다. 윤선임(尹善任)은 외아들 중미(重美)를 두었으나 자식이 없다. 김시남(金是南)은 아들만 셋으로 천건(天健), 천보(天保), 천임(天任)이고, 성걸(星傑)은 아들 하나, 딸 셋인데, 아들은 세주(世柱)이다. 이정현(李鼎賢)은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성도(成道)이다. 불초자는 아들 둘을 낳았는데 경일(慶一)은 진사로 정랑이며, 차남은 경운(慶運)이다. 딸은 진사 이악진(李岳鎭)에게 시집갔다. 경운(慶運)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아들은 광보(光輔)이고 딸은 아직 어리다. 이악진(李岳鎭)은 양자인 연(演)이 있다. 태주(太柱)는 아들 둘 딸 둘을 낳았는데, 아들은 경휘(慶徽)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세주(世柱)는 아들 둘을 낳았는데 경필(慶弼)과 경적(慶積)이다.

숭정갑신후 83년(영조 2, 1726년) 병오 4월 일 손자 정헌대부(正憲大夫)행평안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도순찰사관향사평양부윤(行平安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都巡察使館餉使平壤府尹) 헌주(憲柱)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