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수열신도비(尹受說 神道碑)
시조인 파평 윤(尹)공은,
이름이 신달(莘達)이다. 고려 태조의 삼한 통합을 도와, 태사 삼중대광 벽상 삼한공신(太師三重大匡壁上三韓功臣)이 되었고, 그의 후손은 오백년
동안 경상(卿相)의 자리를 세습하였다. 문정공 집형(執衡), 문숙공 관(瓘), 문강공 언이(彦頤), 태위 평장사 순(純), 문현공 선(琁),
양간공 안숙(安淑), 삼중대광 영평군 척(陟,) 충간공 승순(承順)은 모두 고려시대의 명신이다. 14대 곤(坤)은 태조를 도와서 좌명공신
파평군(坡平君)에 책봉되었고, 시호(諡號)는 소정공(昭靖公)이다. 소정공(昭靖公)의 증손인 사로(師路)는 세종대에 정현옹주(貞顯翁主)와 혼인하여
영천위(鈴川尉)에 봉해졌고, 세조대엔 좌익공신에 책봉되어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으로 올려 봉해졌으며 시호(諡號)는 경헌(충경)공이다.
경헌(충경)공의 현손인 자수(子修)는 통례원 좌통례로 추증되었고, 그 아들 기(機)는 승정원 좌승지 행 익위사 시직에 추증되었다. 그 아들
종복(宗福)은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정부인(貞夫人) 하동(河東) 정(鄭)씨와 결혼하였다. 부인의 아버지는 군자감 주부 형복(亨復)이다.
종복(宗福)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득열(得說)은 벼슬이 감사에 이르렀고, 차남은 곧 나의 할아버지로 이조참판을 지냈다. 공은
이름이 수열(受說)이고 자는 천수(天授)로, 만력 30년(선조 35, 1602년) 임인 7월 5일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으며
효도와 우애는 타고났다. 나이 겨우 12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슬픔이 예절에 지나쳐 목숨을 잃을 뻔 했다. 상례를 집행하는 예가 어른과 다름이
없으니,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형 감사(監司)공과 어려운 환경에서도 부지런히 학문을 닦아, 문사가 날로 나아짐에 명성이 널리 퍼졌다. 사람들은
두 가지 어려운 일을 잘 해냈다고 칭송하였다. 기묘년(인조 17, 1639년) 사마시에 합격하면서, 매 과거 초시엔 합격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진 못했다. 만년에 음사(蔭仕 : 조상의 은덕으로 벼슬하는 것)로 처음 희릉(禧陵) 참봉을 받고 제용감 봉사(濟用監 奉事)에 올랐으나 얼마
안 있어 풍(風)이 들어 벼슬을 그만두었다. 병오년(현종 7, 1666년) 10월 16일 정침에서 임종하셨으니 향년 65세이다. 양주(楊州)관아
북쪽에 있는 송라산(松蘿山) 북북서 향을 등진 언덕에 장사지냈다. 뒤에 공의 장남 판서공이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될 때 이조참판을
추증받았다. 공의 기질은 화평하고 단아하며, 품성은 굳세고 반듯하다. 다른 사람이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하면, 마치 자신이 더럽힌 것처럼
여겨, 더럽고 인색한 싹을 스스로 없애도록 훈도하였다. 어려서 아버지 여읜 것을 항상 안타까워하여, 기일이 될 때면 반드시 기일 열흘 전부터
소반을 먹었다. 그리고 기제사가 있는 그달 초하루부터 한 달 동안은 연회도 참석하지 않았다. 어머니 모시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 뜻에 기쁘게
순종하였으며, 때로 어린 아이 짓도 하였다. 영예로운 길에 나가는 것엔 뜻이 없고, 오직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마음을 썼다. 공은
과거 공부에 힘을 다하였으나, 아버지를 여읜 뒤에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공은 나라를 빛낼 재질을 가지고도 명이 없는 곳에 있다, 끝내 문과
급제를 하지 못하고, 노년에 말단 관직에 그치었으니, 당시 사우(士友)들이 애석하다고 하였다. 부인은 수성(隋城) 최(崔)씨 수성(隋城 :
수원의 옛 지명) 백(伯) 최영규(崔永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학생 사룡(士龍)이다. 만력 31년(선조 36, 1603년) 계묘 11월
13일에 태어났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품성이 온화하여, 시어머니를 지성껏 모시며 조금도 거역하지 않았다. 정(鄭)부인이 항상 칭찬하기를, “내가
얌전한 며느리를 얻었으니, 뒷일을 어찌 걱정하겠는가? 그 마음 쓰고 일 처리하는 데에 남을 해치려는 마음은 조금도 없고, 효성스럽고 우애 있는
마음으로 먼 친척까지 힘을 다해 돌보고 도우니 음덕이 매우 많다. 뒷날 윤(尹)씨 가문이 크게 번창한다면 반드시 이 사람 때문일 것이다.”
하였다. 신묘년(효종 2, 1651년) 3월, 병이 깊어지자, 최(崔)부인은 맏며느리 안(安)부인의 손을 잡고 타이르기를, “예로부터 집안
망하는 것은 모두 사치에서 비롯하였다. 너는 시댁의 소박한 가풍을 쫓고 자손에게도 물려주어 한 집안의 준칙으로 삼도록 해라. 내가 죽은 뒤,
초빈과 염습에 쓰는 이불, 의복, 장례물품과 제수용품은 절대로 사치한 것을 쓰지 말고, 생전의 나의 검약한 마음만 함께 묻어다오.”하였다. 이
달 15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49세였다. 송라산(松蘿山)에 있는 지금의 장지 북쪽 기슭에 장사지냈으나, 무덤 속이 불안하여 참판공의 장례를 치룰
때에 옮겨 합장하였다. 3남 3녀를 두었으며, 측실에게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장남 택(澤)은 이조판서 행 동지중추부사에
증직되었고, 차남 석은 첨지중추부사이며, 막내 직(溭)은 통덕랑이다. 장녀는 완산(完山) 이서익(李瑞翼)에게, 차녀는 해남(海南)
윤선임(尹善任)에게, 3녀는 광주(光州) 김시남(金是南)에게 시집갔다. 측실의 아들은 성걸(星傑)이고, 딸은 이정현(李鼎賢)의 첩이
되었다. 판서공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불초자(자신을 지칭하는 말로 윤헌주(尹憲柱)를 가르킴)이고, 첨지공은 자식이 없으며, 통덕랑공은
아들 하나 딸 셋을 두었다. 아들은 태주(太柱)이고, 장녀는 김몽정(金夢偵)에게, 차녀는 조운주(趙耘疇)에게, 3녀는 이광세(李光世)에게
시집갔다. 이서익(李瑞翼)은 아들 둘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은 명장(命長) · 명견(命堅)이고, 딸은 고진하(高振河)에게 시집갔다.
윤선임(尹善任)은 외아들 중미(重美)를 두었으나 자식이 없다. 김시남(金是南)은 아들만 셋으로 천건(天健), 천보(天保), 천임(天任)이고,
성걸(星傑)은 아들 하나, 딸 셋인데, 아들은 세주(世柱)이다. 이정현(李鼎賢)은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성도(成道)이다. 불초자는 아들 둘을
낳았는데 경일(慶一)은 진사로 정랑이며, 차남은 경운(慶運)이다. 딸은 진사 이악진(李岳鎭)에게 시집갔다. 경운(慶運)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아들은 광보(光輔)이고 딸은 아직 어리다. 이악진(李岳鎭)은 양자인 연(演)이 있다. 태주(太柱)는 아들 둘 딸 둘을 낳았는데, 아들은
경휘(慶徽)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세주(世柱)는 아들 둘을 낳았는데 경필(慶弼)과 경적(慶積)이다.
숭정갑신후 83년(영조
2, 1726년) 병오 4월 일 손자
정헌대부(正憲大夫)행평안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도순찰사관향사평양부윤(行平安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都巡察使館餉使平壤府尹) 헌주(憲柱) 삼가
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