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후 양가가 서로 만나 친분을 맺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사숙(思叔)을 뵐 수 있었는데 그는
성품이 온화 선량하고 기상이 평안하고 단아하였으며, 옷차림이 검소하여 진실로 유생다워 보였다. 또 다른 사람과 교제할 때도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서 털끝만큼도 교만하거나 인색한 기색이 없었다. 세간에서는 윤씨 집안을 호사스러운 부호로 일컬었으나, 사숙은 그와 같은 집안 내력에서
탈피하여 근엄하고 장중하게 자신을 단속하였으며, 또 집안을 다스리는 데에는 길한 일에 힘써 법가 불사의 풍도가 있었다. 이로 볼 때 며느리가
어진 것은 아버지에게 감화 받은 것인 줄을 알 수 있겠다. 아! 군은 참으로 아름다운 선비로다. 평상시에 거하는 방의 좌우 벽에 도서를
진열해 놓고 두건을 쓰고 단정히 앉아 종일토록 글을 읽었으며, 인품이 맑고 깨끗하여 조금도 세상에서의 이익이나 명예를 생각하는 일이 없었다,
때때로 산수를 노닐며 글을 써서 심사를 풀어냈는데 필체가 단아하면서 굳세어 고풍스러웠고 화품은 더욱 묘하였다. 인가에 소장된 여러 가지 고금의
서화가 누구의 손에서 나왔는지 알지 못 할 경우에 군이 한번 보면 금세 모두 알아냈는데 뒤에 표식이 나와 살펴보면 모두 그가 말한 대로였다.
때로는 병풍을 펼쳐 놓고 감상하면서 산수를 논하였는데, 천리 밖의 겹겹이 펼친 연하가 지척인 듯이 실감 있게 설명하여 사람들의 생각이 아득히
멀리 그 경치 속으로 날아들어 가도록 하였으며, 그 밖에 물색을 품제(品題)하는 경우에도 역시 이치에 정밀하게 들어맞아 추호(秋毫)와 같이
세밀하지 않음이 없었다. 사람들 가운데 그의 그림을 보고 싶어 하는 자가 있으면 붓을 들어 늙은 매화를 그려주었는데, 잠깐 사이에 서너 장을
완성하는데도 가로와 세로의 구도가 뛰어나고 조화가 완벽하였으니, 그 타고난 재주와 샘가 같이 솟는 오묘한 생각은 범인들이 미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군의 여사일 뿐이다. 군은 지극한 정성으로 어머니를 섬겼는데, 나가고 들어올 때는 반드시 아뢰었고, 매사를 반드시 여쭈어
보고 행하여 혹시라도 모친의 뜻에 거스를까를 염려하였다. 제사를 받들 때에는 한결같이 주자의 주문공가례에 의거하였고, 또 고금의 예법을 참작하여
상례, 제례 두 편의 책을 만들어서 자제에게 명하여 삼가 지켜 받들게 하였다. 항상 스스로 㰡조상들이 재화는 넉넉하였으나, 모두 장수를 누리지
못하였고, 이 몸도 강보에 싸였을 때 부친을 여의었는데, 다행히 요절을 면하여서 점점 성장하면서 진사도 되고 급제도 하여 뜻대로 되지 않은 바가
없으니 어찌 먼저 분들보다 복이 많지 않은가?
깊이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나아가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혹시 말하는 이가 있으면 즉시 거절하고
생각에 두질 않았다. 융경(隆慶) 임신년 과거에 급제하여 곧바로 승문원(承文院)에 뽑혀 들어갔다. 그러나 곧 승중자(承重子)로서 조모인
정숙옹주(靜淑翁主)의 복(服)을 3년간 입은 후, 정자(正字)를 거쳐 저작(箸作),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에 전직되었다. 다시 박사(博士)를
거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하였는데, 모두 규정과 정해진 차례에 따른 것이며, 그 사이에 천거를 받아 두 차례나 승정원주서 겸
춘추관기사관(承政院注書兼春秋館記事官)에 임용되었으나 모두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전적에서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옮겨 제수된 뒤
임기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사직하고 모친의 봉양을 위해여 외직을 청원하여 장수현감(長水縣監)에 제수되었는데, 공평하고 간소한 정치로 백성을
가까이 하고 이익이 되는 산업을 일으키고 폐단을 혁파하여 온 고을이 평안하게 되었다. 부임한 지 3년이 지나 신사년 병이 생겨서 수차례 글을
올려 사직하기를 구하였으나 감사(監司)가 허락하지 않았고, 백성들도 더 머무르기를 상소하였다. 그러나 군은 뜻을 정하여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동교(東郊) 미사리(彌沙里)에 집을 짓고 꽃을 재배하고 나무를 심으며, 자손을 기르고 가르치며 죽을 때까지 돌아가지 않았으니, 공이
평생 지킨 바는 이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얼마 후 6월 9일 미세하던 병이 점점 깊어져 홀연히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니, 태어난 해인
가정(嘉靖) 병신년으로부터 헤아려 보건대 향년 46세이다. 그 해 9월 임오 안산군(安山郡) 수리산(修理山)의 오좌자향(午坐子向)의 언덕에
장사지내니 선조의 장지를 따른 것이다. 군의 이름은 엄(儼)이고, 사숙(思叔)은 그 자이며, 자호(自號)는 송암(松巖)이다.
관향(貫鄕)과 수대에 걸친 명망은 조고(祖考)인 의빈영평위(儀賓鈴平尉) 섭(燮)의 비문(碑文)에 상세히 실려 있기에 여기에 싣지 않는다.
아버지는 지함(之諴)으로 성균관 생원이며, 어머니는 남씨(南氏)로 돌아가신 참판 세웅(世雄)의 따님이다. 돌아가신 판서 김주의 따님을 배필로
맞아 5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민철(民哲)이고, 다음은 민준(民俊), 민헌(民獻), 민일(民逸)이며, 막내는 민각(民覺)이다. 민철은 아직
아이를 낳지 못했고, 민준은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민헌은 1녀를 낳았는데 어리며, 나머지는 아직 장가를 들이 못했다.
외손은 황곤후(黃坤厚)이고, 외손녀는 셋이 있으나 아직 어리며, 작은 딸은 아직 시집을 가지
않았다. 아! 군은 사위인 혁(赫)을 마치 자식처럼 보살폈는데, 다행히도 혁이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함경도 도사를 지내게 되니 어찌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의 며느리가 군보다 5년 앞서 세상을 떠났고, 이제 군이 세상을 하직한 지가 또 2년이 되었는데, 며느리를 장례지낼
때 내가 묘지명을 쓰고, 또 군의 묘지명을 내가 다시 쓰게 되었으니, 한 집안의 두 세대가 홀연히 유명을 달리함에 어찌 내가 차마 이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슬프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나를 일러 시아버지라 한 그대의 따님, 그대를 일러 장인이라 한 나의
아들. 우리 두 사람 손자 얻어 존경받고 친분 이었는데, 내 아끼던 온화한 그대 구원으로 갔으니 어찌할거나.
만력 10년
2월 일 세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