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 가의대부 이조참판 행 충청도 관찰사 죽제 윤공 신도비명 병서 가의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 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과사 규장각직제학 세자시강원 일강 보덕 여흥 민병승(閔丙承)은 글을 짓고 ▨정대부 비서원승 안동 김녕한(金寗漢)은 글을
썼으며 ▨헌대부 궁내부특진관 직각 규장각학사 종말 용식(容植)은 전액을 함. 선조 31년 정유 12월 10일에 선무 원종공신
죽재(竹齋) 윤공이 사명을 띠고 평양의 부사에서 졸하였다. 부음이 들리자 상께서 애도하시며 부의를 하셨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 이듬해인 무술년에
양주의 청송면 백호리 해좌원에 장사지냈다. 공은 청명과 곧은 절개로 세상에 중망을 모으고 있었기에 공이 졸하자 식자들은 무척이나 애석해
하였다. 오호라! 공은 성조(聖朝)에 이름을 드날리고 임금의 비상한 정성을 제일 많이 입어 안으로는 사원(詞垣), 전지(銓地)와 밖으로는
나라를 지키고 목민에서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고, 이경(夷庚)의 수고로움과 오랑캐의 침입을 막는 소임에 이르기까지 힘을 다하여 보호코자 하였고,
임진란의 변에는 목숨을 내걸고 난중에 뛰어들어 군병 사이에서 많은 고초를 쌓아 병이 나자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듣는 이마다 슬퍼하였다.
공의 휘는 인함(仁涵)이요 자는 양숙(養叔)이니 파평인이다. 상조 휘 관(瓘)은 고려조에 벼슬하여 시중에 올랐는데 덕업이 세상에 떨쳤고,
본조에 들어와서 휘 곤(坤)은 헌릉을 섬겨 좌명공신이 되었다. 이로 부터는 벼슬이 혁혁하였는데 휘 탕(宕)은 승지요, 휘 응규(應奎)는
이조판서이니 공의 조고와 고이다. 공은 가정 10년 4월 17일에 태어 낳는데 남보다 총명하고 여섯 살에 능히 글을 엮으니 외조부인 참판
이공 수동(壽童)이 이마를 쓰다듬으며 “이 아이는 장차 반드시 큰 그릇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이 20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5년 뒤에는
문과에 장원하여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가 되고, 조금 후에는 한원에 천거되어 검열이 되었으며, 홍문관 정자로 옮겨서 박사로 올랐는데 정자는 세칭
남상(南床)으로 준선(峻選)이다. 다시 부수찬 지제교로 올랐는데 월과(月科)나 정시(廷試)에는 매양 거수하여 명예와 인망이 성하였다.
병조를 거쳐 이조 정랑으로 옮겼다가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차출되었다. 대개 누루하치 한창 경예(鯨鯢) 노릇을 하고 있어서 요도의 길이
막히다시피 되었기에 인망이 있는 사람을 가려보냈기 때문이다. 일을 마치고 결과를 보고하니 경기도사를 제수하였다가 전랑으로 옮겨졌는데 뒤에
임금에게 벼슬아치를 천거하는 일로 시끄럽게 울려대고 조작하며 중한 죄를 씌우려 하여 결국 파면되어 모두 원통해 하였으나 공은 개의치
않았다. 경오년에는 안으로 우환을 당하여 묘가에 여막을 치고 정문(情文)을 다하였으며, 복을 벗자 전적에 제수되어 종부시 첨정에 옮겨지고,
풍덕군수를 제수하여 양주목사로 옮겼다. 병자년에는 황고 판서공의 상을 당하여 또 삼년을 여묘하였는데 슬픔이 깊어 뼈만 남았었다. 복을 벗고는
사복시정과 봉상시정을 제수받고 통정에 올라 황주를 맡게 되었다. 그때에 율곡선생이 원접사로 경내에 들어왔는데 제봉 선생이 동행하여 함께 모여
앉았다. 공이 양 선생과 경의를 강론하며 밤새도록 쉴 줄을 몰랐는데 허 봉이 종사관으로 수행하였다가 시기하고 돌아와 간관을 사주하여 무고하게
공박하였다. 임금이 그릇된 모함인 줄을 알고 노하여 대간을 갈아 치웠으나 미워하는 자는 더욱 많아져 허물을 찾고 뒤흔들며 밀어내려고 하고 중죄에
처하려고까지 하였지만 임금이 잘못된 무고임을 알고 서용하여 도로 본직을 제수하였다. 만력 12년 갑신에 또 동지사로 연경에 갔다가 을유년
봄에 돌아와 남원부사를 제배하고, 2년 후에는 선산부사가 되었으며, 또 2년 후에는 들어와 호조 참의가 되었고, 겨울에는 경주부윤에 제수되었는데
임기를 마치자 다시 임명되었다. 그때 마침 변방의 보고 있었으니 바로 임진란이었다. 나라가 수백년 동안 태평을 누리다가 졸지에 강적을 만나니
군사와 배성이 모두 바람과 가루처럼 부서져 흩어졌는데 덕망 있는 신하들이 공이 중망이 있다 하여 포망장(捕亡將)을 맡겼다. 그리하여 공이 먼저
사수의 도리를 논하고 도망간 사람을 잡는 임무를 사양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대로방에 주둔하고 본부의 의사 최진립 등 열여덟 사람과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서하고 합모하여 주사산성에 산채를 설치하고 적을 요리하여 승리를 거두기로 하니 칠군의 의병들이 운집하여 군용이 매우 성하였다.
이윽고 적과 격전을 벌여 그들의 대장을 베이기까지 하였으나 적이 경주가 비어있는 틈을 타서 안으로 습격하여 모조리 노략질하였다. 최진립이
싸우면서 수십 급을 베고 승기를 타서 연전 연파하였는데 땅을 지키던 신하가 자신의 공인양 직계하였으나 공은 다투지 않았다. 그러기에 신분의
위계나 상은 매양 남에게 뒤졌으나 공은 오히려 조정에 스스로 나가 고하기를“경주의 실수는 신이 도망간 자를 붙잡으려고 밖에 나와 있었기
때문입니다.”하고 굳이 죄를 청하였다.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돌보심이 더욱 융숭하였고, 옛 직을 그대로 거듭 임명하시니 더욱 분발하여 기이한
꾀를 써서 적을 공격하여 경내에 있던 적들이 성을 버리고 도주하니 온 고을이 안도하게 되었다. 공은 병란으로 백성들이 계속 굶어죽는 것을
염려하여 창고를 열고 진휼하니 유민이 다시 모여들어 목숨을 건진 이가 수만명에 이르렀으며, 이를 백성들은 지금까지 칭송하고 있다 한다. 덕망있는
신하와 장수들이 임금께 연속 선정을 알리니 충청관찰사를 진배케 되었다. 그러나 오음 윤공이 추천하였던 바를 유공 성룡이 자기를 통하지 않았음을
언짢게 여겨 나이 늙었음을 병폐로 삼아 체직시켰다. 그러나 그후 바로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었다. 정유년 적이 재침했을 때 공이 천장의
영위사로 황주에 갔다가 다시 평양까지 갔는데 병이 쌓여 관사에서 졸하니 12월 19일이었다. 가의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사, 동지춘추관사,
동지의금부사, 동지성균관사, 홍문관 대제학, 세자 좌부빈객에 증직되었다. 공은 사친에 지극한 천성이 있어 황고 판서공이 늙어서 당상에
있었는데 좌우로 힘써 종사하고 받들어 모시면서 마냥 즐겁게 해드렸으며 작고한 후에는 집안일을 큰 형수에게 전부 맡겨 관리하게 하고 형의 아들을
어루만져 보살핌을 자기의 자식보다 더 알뜰히 하였으며 가난한 친구들과 일가들을 성심으로 보살펴 주었다. 관직에 있어서는 청렴 강직하고
공평하여 부읍을 여러 번 맡았으나 집안에는 조금도 불어난 게 없었다. 글을 지음에는 붓만 들면 문장을 이뤄 빨리 글을 짓는 재주가 있었고
대나무를 그리는 데 공력을 쏟아 묘체를 터득하여 세상에서는 보배로 여겼으며 따라서 자호까지 하였는데 사철을 통하여 그 절조를 변하지 않음을 취한
것이다. 평소에 정답게 지내고 도의로 서로 탁마한 분은 이율곡, 고제봉, 김황강, 윤월정, 신백록 등 모든 선생과 시종 지기를 삼았다
한다. 부인 나주 정씨는 찬성 응두(應斗)의 따님인데 덕으로 군자와 짝 할만 하여 시댁 친족들의 칭찬이 있었다. 계사년에 태어나 갑인년에
몰하여 공의 묘소에 합조하였다. 3남 3녀를 길렀으니 홍의(弘毅)는 진사 문과하여 전랑이오, 홍립(弘立)은 문과 현령이며, 홍유(弘裕)는 지행이
있어 집의에 증직되었고, 사위는 지사 김지해, 찰방 박원, 첨정 이유이다. 홍의는 이남이녀를 두어 유경은 일찍 죽어 부인이 없고, 유근은 진사
호조정랑으로 종사를 맡았으며, 사위는 임택 이시부이다. 홍립은 2남 1녀를 두어 유건은 진사로 이조참판, 파령군에 증봉되었고, 유민은 봉사이며,
여서는 진사 이만생이다. 홍유는 4남 1녀를 두어 유진은 현령이오, 유성은 요사하였으며, 유익, 유정은 문행이 있었고, 여서는 참의 이유겸이다.
유근은 5남 4녀를 두어 남은 승의랑 기경, 시경 통덕랑 제경, 치경, 오경이오, 여서는 장령 이서, 현령 서문재, 목사 안처기 병사
이성민이다. 유건의 사남은 봉사 장경, 호조 참판 비경, 진사 국경, 진사 직경이다. 유진의 7남 1녀는 익경, 감찰 상경, 하경, 함경,
만경, 희경, 순경과 현감 이기상이며 측실 남녀는 달경, 우경, 형판 이여발이다. 유익의 4남 1녀는 선경, 진사 임경, 현령 헌경, 군수
정경과 진사 어진석이다. 유정의 1남 2녀는 원경과 진사 허담, 진사 박세휴이다. 참의 이유겸은 5남을 두었는데 이핵은 도정이오, 이령은
지평이오, 이상은 대사헌이오, 이숙은 우의정이오, 이익은 이조판서이다. 현손 이하는 너무 많아 기록하지 않는다. 오호라! 공의 공훈과
충렬은 우암 송선생의 장덕문(狀德文) 속에 자세히 실려 있다. 그러나 공같은 분이 졸한 지 삼백여 년이 지나도록 신도에 비각이 없었기에 증손인
참봉 벌(橃)이 불영한 나에게 비석의 글을 부탁하였다. 생각해보면 나는 비루한 말학으로 어찌 감히 붓을 적시리오마는, 공의 행략을 읽어보니
넉넉하게 그대로 묻어버리기는 아쉬운 바가 있었는데 대저 공의 이학과 문장은 성주께서도 아셨고 국사에도 실려 있으니 백세토록 빛나야 마땅하련만
어찌된 일인지 공의 평생 사행이 매우 많았는데도 세상에서 공을 일컫기는,“처음에는 현요에 올랐고, 뒤에는 고을을 다스렸으며 중간에는 오르락내리락
기구한 승강이 있었다는 것, 군사를 일으키고 빌고 군사에 종사했다는 것”에 불과하였고 이것이 대안이 되어 있으니 마음속에 미진한 바가 있어 증손
벌의 소청대로 가장(家狀)에서 간추려서 한 통의 글을 지어 단단한 좋은 돌에 새기라고 돌려주었다. 무릇 광렬이 공과 같은 분은 백세의
취징이 되는 것이지만 그대로 갖춰지지 못함은 사세 때문인 것이다. 후일에 훌륭한 사학자가 국조의 세상을 빛낸 훈신들을 논하여 전례를 빛내려
한다면 반드시 공의 사행에 비중을 둘 것이니 나의 글도 혹 채택이 되려나? 명하기를,
파평의 세가에, 하악의 정기가
내렸도다. 불어내면 바람이 되고, 위혁하면 뇌정이 되도다. 역내에 어려움 많으니, 사람들마저 사납게 변하도다. 사방엔 전루도
많고, 길은 막히고 통행도 막혔도다. 물결은 용솟음치고 안개엔 독기 어렸는데, 끝없이 성진만이 펼쳤도다. 백 번을 넘어져도 엎어지지
않고, 마침내 병융을 다스렸도다. 군민에게 눈물로 호소했나니, 위엄도 없었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도다. 고삐 잡고 수레에 오르니,
황월(黃鉞)과 주영(珠纓)이로다. 누선은 한한하고 풍범(風帆)은 날렵하도다. 보무(步武)는 힘차고, 서혁는 훙훙하도다. 주도는
뻗어나는데, 사율(師律)은 대대로 이어 끊어지지 않도다. 지리 인화 얻었으니, 신명에게도 어김이 없도다. 뉘라서 공의 명령을
어길까만, 몇 번이나 정기를 껶였던가? 고성을 한번 잃자, 북 한 번 울리고 수복했도다. 벽유당 많이 벌려놓으니 원근에서 부정에
모여들도다. 고도에서 공을 새기려고, 돌을 떠다가 이를 징명했도다. 공은 높아도 자랑하지 않으니, 군자로서 다툼도
없었도다. 청송의 백호에는 늠연한 영령 묻혔도다. 천추가 앞으로 흐른다 해도, 내가 새긴 것은 마륵이
없으리라.
기묘 3월 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