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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윤지선 묘표문(尹止善 墓表文)

물텀벙 2015. 3. 14. 07:53

30. 윤지선 묘표문(尹止善 墓表文)

 

 

 

1688년(숙종 14)에 세워진 윤지선(尹止善)의 묘표이다.

찬자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문신, 학자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며, 서자는 당시 공주목사(公州牧使)였던 조태기(趙泰期, 1638- ?)이다.
윤지선(? -1673)은 평생 은거하다가 현종 말엽에 효성을 인정받아 경주의 관리로 임명되었으나, 사은숙배하기 전에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 밖의 자세한 사적은 알기 어렵다.
비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초반부에서는 아들인 윤리(尹理)가 승지에서부터 경주부윤까지를 두루 역임하여 부친인 윤지선에게 호조참판에 추증된 사실을 서술하였다. 이어서 가계에 대해 약술하고, 일화를 통해 그의 효성과 청빈함을 강조했다.

후반부에서 작자는 자손관계를 정리하고 나서 선을 권장해야 한다는 요지로 자신이 지은 글의 의의를 밝혔다.

 

 

 

贈嘉善大夫戶曺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尹公之墓
贈貞夫人全義李氏之墓


尹君理自承旨爲慶州府尹贈其祖考司禦諱泳爲承政院左承旨考諱止善爲戶曺參判兼同知義禁府事都摠府副摠管妣李氏貞夫人坡平之尹自古爲大姓始祖莘達麗祖朝壁上功臣自後世有達官名人本朝諱仁鏡領議政無嗣取從兄郡守仁復第二子諱俔爲后燕山朝有諱晢以司諫數直諫終被泉壤之禍實郡守公之考也祖考諱思欽慶尙左道水軍節度使妣淑夫人長興任氏不仕諱諒之女參判公事親孝甚雖在布素便身之物無不畢具嘗避兵亂擔輿而行至於肩磨
而人不見其疲倦色無不歎嗟性淳朴任眞不事生産贅居星州視婦氏財如無覩也采椽脫粟人所不堪而常晏如也慶州君爲郡邑嘗以一介不取勖之若奉以酒食則戒之曰此亦出於民也故慶州以淸愼見稱焉顯廟末年推 恩侍從父母命本道有賜賚本道屯膏未及拜受而歿歿時年七十七時崇禎後癸丑七月二十日也配李氏高麗太師棹之後奕世冠冕考宗澤將仕郞禮賓寺參奉 崇禎辛巳年四十七而終于其九月二十二日公歿改葬星州伐知村後同原異室五男琪琬玭瑾慶州其季也二女適金震鐩蔡生晩側室男璜瑁四女李元䄜李光載朴秀元朴宗吉也琬生男商來四女適宋烻柳沆鄭姬楫金之紐玭生男鳳來聖來朋來二女適金相九李延齡瑾生男鼎來謙來觀來晉來升來女幼理生男昌來碩來益來陽來二女適姜泰相李顯命李生員金震鐩生男之經之綱五女適朴文徵曹逾李宜楫朴聖胄宋玄基公以淳朴之資任眞循分與物無競李夫人亦溫仁淑愼以孝婦見稱然公不求人知不成一名天道報施識者疑焉然而子姓振振且有能子立身揚名有此追榮天道果不僣矣爲善者可以勸矣余與慶州善來托墓文云
崇禎戊辰孟冬 原任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致任奉朝賀宋時烈撰
通訓大夫公州牧使趙泰期書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 윤공(尹公)의 묘

증(贈) 정부인(貞夫人) 전의(全義) 이씨(李氏)의 묘

윤군(尹君) 리(理)는 승지부터 경주부윤(慶州府尹)까지 역임하여 그 조부인 사어(司禦) 영(泳)이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부친인 지선(止善)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도총부부총관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이씨(李氏)인데 정부인이다. 파평(坡平) 윤씨(尹氏)는 고려 때부터 대성(大姓)이었는데 시조 신달(莘達)은 고려조에 벽상공신(壁上功臣)이었으며 이후부터 후세에 달관(達官)과 명인(名人)이 많이 배출되었다. 본조에서는 인경(仁鏡)이 의정(議政)을 지냈는데 후사가 없어 종형(從兄)인 군수(郡守) 인복(仁復)의 둘째아들 현(俔)을 데려다가 후사로 삼았다. 연산조에 석(晢)이 사간(司諫)으로 자주 직간하다가 마침내 죽임을 당하고 말았으니 실로 군수공의 부친이다.

조부는 사흠(思欽)인데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역임했다. 모친은 숙부인(淑夫人) 장흥(長興) 임씨(任氏)이니 벼슬하지 않은 량(諒)의 따님이다.
참판공은 부모를 섬김에 효성이 극진하여 비록 포의로 있을 때에도 평소에 몸을 편하게 하는 물건을 갖추어 드리지 않은 게 없었으며 일찍이 병란(兵亂)을 피해 도망갈 때 등에 업고 모시고 갔다. 피난 행렬이 붐벼 인파가 어깨를 스칠 지경이었는데도 사람들이 그 피로해 하는 기색을 볼 수 없었으므로 감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순박하고 맡은 일을 진실되게 하였으며 생산하는 일을 일삼지 않았으며 성주(星州)에서 곁방살이를 할 때도 며느리의 재물은 보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 땔감이 없고 곡식이 없는 것은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하여 상처를 받는 바인데, 경주군(慶州君)의 경우 일찍이 군읍(郡邑)을 다스릴 때 어느 것 하나라도 사사로이 차지하려고 감히 힘쓰지 않았다. 술과 음식으로 봉양하고자 하면 공이 경계하며 말하기를 “이것도 백성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경주군은 청신(淸愼)한 것으로 칭송을 받았다.
현묘(顯廟) 말년에 부모를 시종(侍從)한 은혜를 미루어 본도(本道)에 임명되었는데 미처 사은숙배하지 못하고 병으로 세상을 떴으니 숭정(崇禎) 계축년(1673, 현종 14) 7월 20일로 향년이 77세였다. 배필 이씨(李氏)는 고려 태사(太師) 도(棹)의 후손으로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냈다. 부친은 종택(宗澤)인데 장사랑(將仕郞)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을 지냈다. 숭정 신사년(1641, 인조 19)에 47세로 세상을 떠서 9월 20일에 장사지냈다. 공이 돌아가자 성주 벌지촌(伐知村) 뒤의 같은 언덕에 묘실은 달리하여 합부(合祔)하였다.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기(琪), 완(琬), 비(玭), 근(瑾)이며 경주군은 막내이다. 두 딸은 김진▨(金震▨)과 채생만(蔡生晩)에게 시집갔다. 측실의 아들로 황(璜)과 모(瑁)가 있고 네 딸은 이원▨(李元▨), 이광재(李光載), 박수원(朴秀元), 박종길(朴宗吉)에게 시집갔다. 완(琬)은 아들 상래(商來)를 두었고 네 딸은 ▨▨항(▨▨沆), 정희집(鄭姬楫), 김지축(金之紐)에게 시집갔다. 비(玭)는 아들 봉래(鳳來), 성래(聖來), 명래(明來)를 두었으며 두 딸은 김상구(金相九)와 이연령(李延齡)에게 시집갔다. 근(瑾)은 아들 정래(鼎來), 겸래(謙來), 관래(觀來), 진래(晉來), 승래(升來)를 두었으며 딸은 어리다. 리(理)는 아들 창래(昌來), 석래(碩來), 익래(益來), 양래(陽來)를 두었으며 두 딸은 강태상(姜泰相)과 이현명(李顯命)에게 시집갔는데 이현명은 생원이다. 김진▨(金震▨)은 아들 지경(之經), 지강(之綱)을 두었으며 다섯 딸은 박문징(朴文徵), 조유(曹逾), 이선집(李宣楫), 박성주(朴聖胄), 송현기(宋玄基)에게 시집갔다.
공은 순박한 자질로 맡은 일에 진실하였으며 사람들과 다투지 않았으며 이부인(李夫人) 역시 온순하고 인자하고 정숙하고 삼가서 효부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공은 남이 알아주는 것을 구하지 않아 하나의 이름도 이루지 못했으니, 이에 천도(天道)가 보답하여 베푼다는 것을 식자(識者)가 의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손이 똘망똘망하고 유능한 자가 있어 입신양명하여 이같은 영화를 누리게 하였으니 천도는 과연 어긋남이 없는 것이다. 선을 하는 자는 권장되어야 한다. 나는 경주(慶州)가 선하다고 허여하였는데 와서 묘문(墓文)을 부탁하므로 이와 같이 말하였다.

숭정 무진년(1688, 숙종 14) 초겨울 원임(原任)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 國崇祿大夫) 영중추부사 치임(致任)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이 글을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