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贈) 정부인(貞夫人) 전의(全義) 이씨(李氏)의 묘
윤군(尹君) 리(理)는 승지부터
경주부윤(慶州府尹)까지 역임하여 그 조부인 사어(司禦) 영(泳)이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부친인 지선(止善)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도총부부총관에 추증되었다. 모친은 이씨(李氏)인데 정부인이다. 파평(坡平) 윤씨(尹氏)는 고려 때부터 대성(大姓)이었는데 시조 신달(莘達)은
고려조에 벽상공신(壁上功臣)이었으며 이후부터 후세에 달관(達官)과 명인(名人)이 많이 배출되었다. 본조에서는 인경(仁鏡)이 의정(議政)을
지냈는데 후사가 없어 종형(從兄)인 군수(郡守) 인복(仁復)의 둘째아들 현(俔)을 데려다가 후사로 삼았다. 연산조에 석(晢)이 사간(司諫)으로
자주 직간하다가 마침내 죽임을 당하고 말았으니 실로 군수공의 부친이다.
조부는 사흠(思欽)인데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역임했다. 모친은 숙부인(淑夫人) 장흥(長興)
임씨(任氏)이니 벼슬하지 않은 량(諒)의 따님이다. 참판공은 부모를 섬김에 효성이 극진하여 비록 포의로 있을 때에도 평소에 몸을 편하게
하는 물건을 갖추어 드리지 않은 게 없었으며 일찍이 병란(兵亂)을 피해 도망갈 때 등에 업고 모시고 갔다. 피난 행렬이 붐벼 인파가 어깨를 스칠
지경이었는데도 사람들이 그 피로해 하는 기색을 볼 수 없었으므로 감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순박하고 맡은 일을 진실되게 하였으며 생산하는
일을 일삼지 않았으며 성주(星州)에서 곁방살이를 할 때도 며느리의 재물은 보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 땔감이 없고 곡식이 없는 것은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하여 상처를 받는 바인데, 경주군(慶州君)의 경우 일찍이 군읍(郡邑)을 다스릴 때 어느 것 하나라도 사사로이 차지하려고 감히 힘쓰지
않았다. 술과 음식으로 봉양하고자 하면 공이 경계하며 말하기를 “이것도 백성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경주군은 청신(淸愼)한
것으로 칭송을 받았다. 현묘(顯廟) 말년에 부모를 시종(侍從)한 은혜를 미루어 본도(本道)에 임명되었는데 미처 사은숙배하지 못하고
병으로 세상을 떴으니 숭정(崇禎) 계축년(1673, 현종 14) 7월 20일로 향년이 77세였다. 배필 이씨(李氏)는 고려 태사(太師)
도(棹)의 후손으로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냈다. 부친은 종택(宗澤)인데 장사랑(將仕郞)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을 지냈다. 숭정
신사년(1641, 인조 19)에 47세로 세상을 떠서 9월 20일에 장사지냈다. 공이 돌아가자 성주 벌지촌(伐知村) 뒤의 같은 언덕에 묘실은
달리하여 합부(合祔)하였다.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기(琪), 완(琬), 비(玭), 근(瑾)이며 경주군은 막내이다. 두 딸은 김진▨(金震▨)과
채생만(蔡生晩)에게 시집갔다. 측실의 아들로 황(璜)과 모(瑁)가 있고 네 딸은 이원▨(李元▨), 이광재(李光載), 박수원(朴秀元),
박종길(朴宗吉)에게 시집갔다. 완(琬)은 아들 상래(商來)를 두었고 네 딸은 ▨▨항(▨▨沆), 정희집(鄭姬楫), 김지축(金之紐)에게 시집갔다.
비(玭)는 아들 봉래(鳳來), 성래(聖來), 명래(明來)를 두었으며 두 딸은 김상구(金相九)와 이연령(李延齡)에게 시집갔다. 근(瑾)은 아들
정래(鼎來), 겸래(謙來), 관래(觀來), 진래(晉來), 승래(升來)를 두었으며 딸은 어리다. 리(理)는 아들 창래(昌來), 석래(碩來),
익래(益來), 양래(陽來)를 두었으며 두 딸은 강태상(姜泰相)과 이현명(李顯命)에게 시집갔는데 이현명은 생원이다. 김진▨(金震▨)은 아들
지경(之經), 지강(之綱)을 두었으며 다섯 딸은 박문징(朴文徵), 조유(曹逾), 이선집(李宣楫), 박성주(朴聖胄), 송현기(宋玄基)에게
시집갔다. 공은 순박한 자질로 맡은 일에 진실하였으며 사람들과 다투지 않았으며 이부인(李夫人) 역시 온순하고 인자하고 정숙하고 삼가서
효부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공은 남이 알아주는 것을 구하지 않아 하나의 이름도 이루지 못했으니, 이에 천도(天道)가 보답하여 베푼다는 것을
식자(識者)가 의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손이 똘망똘망하고 유능한 자가 있어 입신양명하여 이같은 영화를 누리게 하였으니 천도는 과연 어긋남이
없는 것이다. 선을 하는 자는 권장되어야 한다. 나는 경주(慶州)가 선하다고 허여하였는데 와서 묘문(墓文)을 부탁하므로 이와 같이 말하였다.
숭정 무진년(1688, 숙종 14) 초겨울 원임(原任)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 國崇祿大夫) 영중추부사 치임(致任)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이 글을 짓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