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위로
거미란 놈이 흉한 심보로 병원 뒤뜰 난간과 꽃 밭
사이 사람 발이 잘 닿지 않는 곳에 그물을 쳐 놓았다. 옥외 요양을 받는 젊은 사나이가 누워서 치어다보기 바르게--- 나비가 한
마리 꽃밭에 날아들다 그물에 걸리었다. 노-란 날개를 퍼득거려도 파득거려도 나비는 자꼬 감기우기만 한다. 거미가 쏜살같이 가더니
끝없는 끝없는 실을 뽑아 나비의 온몸을 감아 버린다. 사나이는 긴 한숨을 쉬었다.
나이보담 무수한 고생 끝에 때를 잃고 병을
얻은 이 사나이를 위로할 말이 - 거미줄을 헝클어 버리라는 것밖에 위로의 말이 없었다.
82.
유언
후어-ㄴ한 방에 유언은 소리 없는
입놀림.
바다에 진주 캐러 갔다는 아들 해녀와 사랑을 속삭인다는 맏아들 이밤에사 돌아오나 내다봐라---
평생
외롭든 아버지의 운명(殞命) 감기우는 눈에 슬픔이 어린다.
외딴집에 개가 짖고 휘양찬 달이 문살에 흐르는
밤.
83. 이런
날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 끝에서 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 금을 그은 지역의 아이들이 즐거워하다.
아이들에게 하로의 건조한 학과(學課)로 해말간
권태(倦怠)가 깃들고 '모순(矛盾)' 두 자를 이해치 못하도록 머리가 단순하였구나.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 부르고 싶다.
84.
이별
눈이 오다 물이 되는 날 잿빛 하늘에 또 뿌연내
그리고 크다란 기관차는 빼--액--울며 조고만 가슴은 울렁거린다.
이별이 너무 재빠르다, 안타깝게도 사랑하는
사람을 일터에서 만나자 하고--- 더운 손의 맛과 구슬 눈물이 마르기 전 기차는 꼬리를 산굽으로
돌렸다.
85.
이적
발에 터부한 것을 다 빼어버리고 황혼이 호수
우로 걸어오듯이 나도 사뿐사뿐 걸어보리이까?
내사 이 호수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리워온 것은 참말
이적이외다.
오늘 따라 연정(戀情), 자홀(自惚), 시기(猜忌), 이것들이 자꼬 금메달처럼
만져지는구료
하나, 내 모든 것을 여념없이 물결에 씻어보내려니 당신은 호면(湖面)으로 나를
불러내소서
86.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읍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읍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87. 장
이른 아침 아낙네들은 시들은 생활을 바구니 하나
가득 담아 이고...... 업고 지고...... 안고 들고......
모여드오, 자꾸 장에 모여드오. 가난한 생활을
골골이 벌여 놓고 밀려 가고 밀려 오고......
저마다 생활을 외치오..... 싸우오. 왼하로 올망졸망한
생활을 되질하고 저울질하고 자질하다가 날이 저물어 아낙네들이 쓴 생활과 바꾸어 또 이고
돌아가오.
88. 장미
병들어
장미 병들어 옮겨 놓을 이웃이
없도다.
달랑달랑 외로이 황마차(幌馬車) 태워 산에 보낼거나
뚜--- 구슬피 화륜선(火輪船) 태워
대양(大洋)에 보낼거나
프로팰러 소리 요란히 비행기 태워 성층권(成層圈)에 보낼거나
이것 저것 다
그만두고 자라가는 아들이 꿈을 깨기 전 이내 가슴에 묻어다오. 오후의 구장
늦은 봄 기다리던 토요일날 오후
세시 반의 경성행 열차는 석탄 연기를 자욱이 품기고 한몸을 끄을기에 강하던 공이 자력을 잃고 한모금의 물이 불붙는
목을 축이기에 넉넉하다.
젊은 가슴의 피 순환이 잦고 두 철각이 늘어진다.
검은 기차 연기와 함께 푸른
산이 아지랭이 저쪽으로 가라앉는다.
89.
조개껍질
아롱다롱 조개껍데기 울 언니
바닷가에서 주어 온 조개껍데기
여긴여긴 북쪽나라요 조개는 귀여운 선물 장난감 조개껍데기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짝 잃은 조개껍데기 한짝을 그리워하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나처럼 그리워하네
물소리 바다
물소리.
90.
종달새
종달새는 이른 봄날 질디진 거리의 뒷골목이
싫더라 명랑한 봄 하늘, 가벼운 두 나래를 펴서 요염한 봄 노래가 좋더라
그러나, 오늘도
구멍뚫린 구두를 끌고 훌렁훌렁 뒷거리 길로 고기 새끼 같은 나는 헤매나니 나래와 노래가 없음인가 가슴이
답답하구나
91.
참새
가을 지난 마당은 하이얀 종이 참새드링 글씨를
공부하지요.
째액째액 입으로 받아읽으며 두 발로는 글씨를 연습하지요.
하로 종일 글씨를 공부하여도 짹자 한
자밖에는 더 못 쓰는걸.
92.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 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93. 창
쉬는 시간마다 나는 창녘으로
갑니다.
---창은 산 가르침.
이글이글 불을 피워 주오 이 방에 찬 것이 서립니다.
단풍잎
하나 맴도나 보니 아마도 자그마한 선풍(旋風)이 인 게외다.
그래도 싸느란 유리창에 햇살이 쨍쨍한
무렵 상학종(上學鐘)이 울어만 싶습니다.
94.
창공
그 여름날 열정의 보푸라는 오려는 창공의
푸른 젖가슴을 어루만지려 팔을 펼쳐 흔들거렸다. 끓는 태양 그늘 좁다란 지점에서
천막같은 하늘 밑에서 떠들던
소나기 그리고 번개를 춤추든 구름은 이끌고 남방으로 도망하고 높다랗게 창공은 한폭으로 가지 우에 퍼지고 둥근
달과 기러기를 불러 왔다.
푸르른 어린 마음이 이상에 타고 그의 동경의 날 가을에 조락(凋落)의 눈물을
비웃다.
95. 초 한
대
초 한 대--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면인
심지(心志) 백옥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 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품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96.
코스모스
청초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싸늘히 추운 밤이면 옛 소녀가 못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간다.
코스모스는 귀또리 울음에도 수집어지고 코스모스 앞에 선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요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
97. 태초의
아침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 가을,
겨울 그런 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빨--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그 전날 밤에 그 전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독(毒)은 어린 꽃과 함께.
98. 트루게네프의
언덕
나는 고개길을 넘고 있었다......그때 세
소년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첫째 아이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병, 간즈메통, 쇳조각, 헌 양말짝 등 폐물이
가득하였다. 둘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셋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면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
잃어 푸르스럼한 입술, 너들너들한 남루, 찢겨진 맨발 아아 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 소년들을 삼키었느냐! 나는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
있을 것은 죄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줄 용기는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얘들아' 불러보았다. 첫째
아이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이었다. 둘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셋째 아니도 그러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너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네끼리 소근소근 이야기하면서 고개를 넘어갔다. 언덕 우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들
뿐
99.
팔복(八福)
마태복음 5장 3~12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100.
편지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 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을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었노라고만
쓰자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 긴 잠 못 이루는 밤이 오면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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