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풍경
봄바람을 등진 초록빛 바다 쏟아질 듯 쏟아질 듯 위태롭다.
잔주름 치마폭의 두둥실거리는 물결은 오스라질 듯 한끝 경쾌롭다.
마스트 끝에 붉은 깃발이 여인의 머리칼처럼 나부낀다.
이 생생한 풍경을 앞세우며 뒤세우며 외--ㄴ하로 거닐고 싶다.
---우중충한 5월 하늘 아래로 ---바닷빛 포기포기에 수놓은 언덕으로.
102. 한난계(寒暖計)
싸늘한 대리석 기둥에 모가지를 비틀어 맨 한난계,
문득 들여다 볼 수 있는 운명한 오척육촌(五尺六寸)의 허리 가는 수은주, 마음은 유리관보다 맑소이다.
혈관이 단조로워 신경질인 여론동물(與論動物), 가끔 분수(噴水)같은 냉(冷)침을 억지로 삼키기에 정력을 낭비합니다.
영하(零下)로 손가락질 할 수돌네 방처럼 치운 겨울보다 해바라기 만발한 팔월(八月) 교정이 이상(理想)곺소이다. 피끓을 그날이------
어제는 막 소낙비가 퍼붓더니 오늘은 좋은 날씨올시다. 동저고리 바람에 언덕으로, 숲으로 하시구려--- 이렇게 가만 가만 혼자서 귓속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는 또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는 아마도 진실한 세기의 계절을 따라 하늘만 보이는 울타리 안을 뛰쳐, 역사 같은 포지션을 지켜야 봅니다. <1937.7.1>
103. 해바라기 얼굴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해가 금방 뜨자 일터에 간다.
해바라기 얼굴은 누나의 얼굴 얼굴이 숙어들어 집으로 온다.
104. 햇비
아씨처럼 나린다 보슬보슬 햇비 맞아 주자 다 같이 옥수숫대처럼 크게 닷자 엿자 자라게 햇님이 웃는다 나 보고 웃는다.
하늘다리 놓였다 알롱알롱 무지개 노래하자 즐겁게 동무들아 이리 오나 다 같이 춤을 추자 햇님이 웃는다 즐거워 웃는다
105. 햇빛.바람
손가락에 침 발러 쏘옥 쏙 쏙 장에 가는 엄마 내다보려 문풍지를 쏘옥 쏙 쏙
아침에 햇빛이 반짝
손가락에 침발러 쏘옥 쏙 쏙 장에 가신 엄마 돌아오나 문풍지를 쏘옥 쏙 쏙
저녁에 바람이 솔솔.
106. 호주머니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107. 황혼
햇살은 미닫이 틈으로 길죽한 일(一)자를 쓰고......지우고......
까마귀 떼 지붕 우으로 둘, 둘, 셋, 넷, 자꼬 날아 지난다. 쑥쑥, 꿈틀꿈틀 북쪽 하늘로
내사...... 북쪽 하늘에 나래를 펴고 싶다.
108. 황혼이 바다가 되어
하로도 검푸른 물결에 흐느적 잠기고......잠기고...... 저--왼 검은 고기 떼가 물든 바다를 날아 횡단할고.
낙엽이 된 해초 해초마다 슬프기도 하오.
서창에 걸린 해말간 풍경화. 옷고름 너어는 고아(孤兒)의 서름.
이제 첫 항해하는 마음을 먹고 방바닥에 나뒹구오......뒹구오...... 황혼이 바다가 되어 오늘도 수많은 배가 나와 함께 이 물결에 잠겼을 게오. (1937.1.)
109. 흐르는 거리
으스럼히 안개가 흐른다. 거리가 흘러 간다. 저 전차, 자동차, 모든 바퀴가 어디로 흘리워 가는 것 일까? 정박할 아무 항구도 없이, 가련한 많은 사 람들을 실고서, 안개 속에 잠긴 거리는
거리 모퉁이 붉은 포스트상자를 붙잡고 섰을라 면 모든 것이 흐르는 속에 어렴풋이 빛나는 가로 등, 꺼지지 않는 것은 무슨 상징일까? 사랑하는 동무 박(朴)이여! 그리고 김(金)이여! 자네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끝없이 안개가 흐르는데
'새로운 날 아침 우리 다시 정답게 손목을 잡아 보세' 몇자 적어 포스트 속에 떨어뜨리고, 밤을 세워 기다리면 금휘장(金徽章)에 금단추를 삐었고 거인처럼 찬란히 나타나는 배달부, 아침과 함께 즐거운 내임, 이 밤을 하염없이 안개가 흐른다.
110. 흰 그림자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로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검의 옮겨지는 발자취소리
발자취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든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든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든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로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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