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 인물/南原伯派

남 050.

물텀벙 2010. 9. 3.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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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號는 벽송거사(碧松居士)라 하시었다.

  공이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시어 명종 16년(1186년 丙午)에 國子館 博士 벼슬에 오르시어 上將軍 최세보(崔世輔)와 함께 국사(國史)를 저술하시었다. 1192년(壬子)에는 禮部侍郞, 知制誥 벼슬에 오르시어 중국에 초빙되시었다.

  神宗 때 공이 司業 벼슬에 계실 때 염찰(廉察)이 되시어 나가셨는데 남원(南原)지방에 도적이 들끓어 그 도적 떼가 산 속에 진치고 있어 그 기세가 자못 험악하였다. 공이 혼자서 말을 달려 도적의 괴수인 복기남(卜奇男) 형제를 찾아가 사람으로서의 화와 복이 무엇인 것을 들어 달랬더니 도적이 감동하여 울면서 명령에 복종할 것을 맹세하며 양민이 될 것을 호소하는지라 공이 그 중에서 흉악한 자를 베이고 나머지는 모두 용서하였더니 그 도적의 무리 수 만명이 해산하여 그 일대가 평안하였다.

  왕이 그 공을 가상히 여겨 남원백(南原伯)을 봉하였다.

  희종(熙宗) 때 공이 모략을 당하여 서경(西京 : 평양) 유수(留守)가 되심에 당시 태학생(太學生) 수백명이 대궐에 몰려와 상소하였으나 돌이키지 못하였으며 공은 서경에서 하세(下世)하시니 공의 상을 남원사람들이 울부짖고 발상하는자 수백명이 되었으며 제각기 제물을 모아 남원땅으로 반장(返葬)을 하였고 손으로 흙을 날라 봉분을 만들어 높고 크기가 보통 묘자리보다 더 컸다.

 그 후에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고종 19년(1232년 壬辰)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증직(贈職) 되었고 조선 정조 기미년에 호남의 유림 백여명이 발기하여 서원을 세울 것을 의논하여 그 이듬해 庚申年에 方山書院에 享祀하였는데 방산서원은 공의 7대손인 문효공을 받드는 원(院)으로 공으로서 주향(主享)하게 되었다.

배위는 文化柳氏로서 정당문학 文簡公 공권(公權)의 따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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