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 인물/昭靖公派

소 042.

물텀벙 2010. 9. 4.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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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字는 사달(士達) 또는 대원(大源), 號는 경암(敬庵). 자교(自敎)의 아들이다.

 처음 부모의 명에 따라 과시(科試)준비를 하였으나, 얼마 뒤 그 뜻을 버리고 성리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1706년(숙종 32) 우의정 최석정(崔錫鼎)의 추천으로 내시교관에 제수되고, 1710년 시강원자의, 이듬해에 종부시주부를 거쳐 익위사위수(翊衛司衛率)가 되고, 1716년 사헌부지평에 올랐다.

 그러나 사문시비(斯文是非)에 관계되어 파직되었다가 한달 만에 복직되었다.

 이듬해 증조부 선거와 종조부 증(拯)에게 추탈(追脫)의 화가 미치자 벼슬을 버리고 종적을 감추었다가, 1722년 선거와 증의 관작이 복위되고 시호가 내려짐에 따라 사헌부지평에 다시 기용되었다. 이어 시강원진선(侍講院進善)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사헌부장령에 강직(講職)을 겸하고, 이어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을 거쳐 단양군수로 나갔다.

 1724년 하차은 사건으로 벼슬을 사직하고 돌아왔으나 다시 장령에 임명되었고, 1727년 진선과 집의를 거쳐 군자감정에 제수되었으며, 승정원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청주의 이인좌(李麟佐)의 난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던 중 난이 평정되었다는 말을 듣고 성에 들어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이것이 허물이 되어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승지로 복직된 뒤 1731년 호조참의, 1737년 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

 학문에도 매우 전심하여 영조가 두번이나 별유(別諭)로 소명(召命)하여 주역과 성학집요를 강의시킨 일이 있다.

 배위는 전의이씨이시며 主簿 연회(延會)의 따님이시다.

 묘소는 선산 右 자원에 합장으로 모셨다.

저서로는 경암선생유고(稿 : 후손 상종()이 1916년 간행)가 있다.

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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