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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臣 척(陟)의 아드님이시다. 공께서는 여러번 벼슬을 바뀌 응양군 상호군 겸 군적전서(응양군 상호군 겸 군적전서)가 되셨다. 1367년 지도첨의(知都僉議) 오인택(吳仁澤), 상호군(上護軍) 조린(趙璘) 전시중(前侍中) 경천흥(慶千興) 등과 妖僧 신돈(辛旽)을 살해하려고 모의하다가 누설되어 1367년에 유배되었다. 1371년 신돈(辛旽)이 주살(誅殺)된 뒤에 유배에서 풀려나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을 배하였고, 신돈(辛旽)을 죽이려 하다 참을 당한 조린(趙璘)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지내니 듣는자마다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 해에 수충양절보리공신(輸忠亮節輔理功臣)에 책록되시어 영평군(鈴平君)에 奉하였다. 뒤에 왜구(倭寇)를 막아 누차 공을 세웠다. 1389년 문하평리(門下評理)로 권근(權近)과 함께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왕(王)씨로 공민왕의 후사(後嗣)를 정하라"는 명제(明帝)의 지시를 전함으로써 창왕이 폐위되고 정창군(定昌君) 요(瑤:공양왕)가 즉위하였다. 그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를 역임하였으며 시호(諡號)는 충간(忠簡)이다. 배위는 郡夫人 丹陽李氏로서 版圖判書 거경(居敬)의 따님이시다. 묘소는 長湍 猪加士里 三倍洞에 모셨다고 하지만 失傳되었고 추원단에 碑位를 모셨다. 계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