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 인물/昭靖公派

소 121.

물텀벙 2010. 9. 4. 23:17

 

 

 

 소 121.   이 글에 이의나 추가 정보가 있으시면 쪽지나 댓글을 남겨 주세요. 

  字는 백분(伯奮), 호는 용서(龍西). 侍講院弼善 전(烇)의 아드님이시다.

 1625년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과 예학을 전습하였다.

 1633년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였으며 1635년 성균관 儒生으로 들어갔다.

 이때 이이(李珥), 성혼(成渾)의 문묘종사운동에 참여하여 그 반대자들과 논쟁을 벌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전론을 제기하였으나 아버지가 강화도에서 순절한 뒤에는 일절 국사를 논하지 않고 재야에 은거,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58년(효종 9)부터 학문과 덕행으로 추천되어 공조좌랑, 정랑, 종부시주부, 성균관사업, 사헌부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659년 김만기(金萬基)를 지평으로, 윤원거(尹元擧)를 사업(司業)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확인이 不可하다.

 1660년 복제예송(服制禮訟)에서 남인 권시(權諰)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였다가 송시열(宋時烈)일파의 비난을 받았다.

 1661년부터 여러 차례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1670년 세자시강원 진선에 임명되었을 때에는 상소를 올려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를 논하였는데, 그 요지는 솔선수범, 입지, 정심(正心), 면학, 휼민(恤民), 근검절약, 무사봉공 등이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청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산(尼山)에서 가난하게 살았으나 문거(文擧), 선거(宣擧), 순거(舜擧) 등의 종형제와 학문을 연마하고 후생을 가르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특히 시율에 격조가 높았으나 저술은 즐겨하지 않았다. 뒤에 吏曹參判에 追贈되시었다.

 시문집 용서문집(龍西文集)과 부록 合 4卷 2冊이 傳한다.

배위는 安東權氏이시며 正字 경(儆)의 따님이시다.

 후배위는 延日鄭氏이시며 進士 유원(維垣)의 따님이시다.

 삼배위는 光山金氏이시며 郡守 현(灦)의 따님이시다.

 묘소는 板峙 先山 後 庚原에 品葬으로 모셨다. 후에 연산의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인조(仁祖) 11년 (1633) 계유(癸酉)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1등(一等) 2위

 인조(仁祖) 11년 (1633) 계유(癸酉)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三等) 23위

계보 :

 

 

'파평윤씨 인물 > 昭靖公派'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 123.  (0) 2010.09.04
소 122.  (0) 2010.09.04
소 120.  (0) 2010.09.04
소 119.  (0) 2010.09.04
소 118.  (0) 2010.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