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 인물/版圖公派

판 099.

물텀벙 2010. 9. 5.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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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字는 임지(任之).  坡原府院君 여필(汝弼)의 아들이며, 장경왕후의 오빠로 대윤()의 거두였다.

 무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경주 부윤이 되었다. 1523년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침략 왜선과 싸우다 패하여 충군(充軍)당했다. 인종(仁宗 : 장경왕후 소생)이 세자로 있을 때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경원대군(慶原大君 : 후의 명종)을 낳자 김안로(金安老) 등과 함께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문정왕후와 사이가 나쁘게 되었다. 문정왕후의 오빠인 윤원로(尹元老), 윤원형(尹元衡)이 점차 세자를 바꿀 것을 꾀하자 김안로 등은 문정왕후를 폐할 것을 도모하다가 오히려 반격을 당하여 실각하고 사사(賜死)되었다. 이어 윤원로. 윤원형형제가 집권하자 윤원형일파와의 세력다툼은 더욱 치열해졌고, 1543년부터는 대윤(大尹), 소윤(小尹)으로 나뉘어 정쟁(政爭)이 노골화되면서 그는 대윤의 거두가 되어 윤원형 등의 소윤일파와 치열한 권력투쟁을 계속하였다. 소윤은 대윤이 경원대군을 해치려 한다 하고, 대윤은 소윤이 세자를 해치려 한다고 하여 서로 모함하고 다투었다.

 1544년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자 형조판서를 거쳐 찬성에 올랐으나 재위 8개월 만에 인종이 승하함으로써 1545년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이에 소윤의 윤원형이 득세하여 평소 대윤파와 감정이 좋지 않았던 정순붕(鄭順朋), 이기(李틒), 임백령(林百齡), 허자(許磁) 등 심복들과 더불어 대윤일파를 제거할 계책을 꾸미는 한편, 윤원형의 첩인 난정(蘭貞)으로 하여금 문정대비와 명종을 선동케 하여 윤임, 유인숙(柳仁淑), 유관(柳灌) 등 대윤의 주도적 인물들을 반역음모죄로 몰아 유배시켰다. 그는 남해로 귀양가다가 충주에 이르러 아들 삼형제와 함께 사사(賜死)되었다.

 또한 성종의 셋째 아들 계성군(桂城君)의 양자로 그의 조카가 되는 계림군(桂林君)의 음모에 관련하였다는 무고로 화를 당하였으며, 그의 사위 이덕응(李德應)의 협박, 무고로 인하여 이휘(李輝), 박광우(朴光佑), 나숙(羅淑), 나식(羅湜), 이중열(李中悅) 등 10여 인이 화를 당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을사사화(乙巳士禍)인바, 이후로도 5∼6년에 걸쳐 그를 비롯한 대윤의 인물들을 찬양하였다는 등 갖가지 죄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화를 당하였다.

 후에 그에 대한 평가로 이이(李珥)는 죄가 없다 하였고, 이황(李滉)은 사직에 대한 죄가 없지 않다고 하였다.

 1577년 신원(伸老)되어 관작이 복구되었다. 시호는 충의(忠義)이다.

 배위는 驪興李氏이며 僉樞 보()의 따님이시다.

 후배위는 玄風郭氏이며 兵使 한(翰)의 따님이시다.

 묘소는 高陽 南面 香洞 丙原에 三合葬으로 모셨다.

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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