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 인물/未詳 派

미 020.

물텀벙 2010. 9. 5.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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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봉상시사 윤기무(尹起畝)의 따님으로 조선 제9대 왕 성종의 계비이자, 제10대 왕 연산군의 어머니이시다

 성종 4년(1473년) 간택후궁으로 입궁하여 숙의에 봉해졌다.

 성종 5년(1474년)에 성종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가 승하하자 그로부터 2년 뒤에 숙의였던 그녀가 임신중인 몸으로, 왕비로 승격되어 4개월 뒤 원자(연산군)를 낳아 중전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졌다.

 평소에 질투심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고 하지만, 여자 관계가 복잡한 남편인 성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야사로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성종이 자신의 처소에 들르지 않고 다른 후궁들의 처소만 찾자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이 발단이 되어 왕대비인 인수대비의 분노를 샀다는 설이 있으며, 일련의 사건 등으로 마침내 1479년 음력 6월 2일에 폐비되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그녀가 폐서인이 된 이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있는 점, 세자의 생모라는 점 등을 이유로 들어 그녀를 살려 두고자 하였으나, 성종의 모후인 소혜왕후(인수대비)와 엄숙의, 정숙용 등의 사주로 인해 궁녀들이 성종에게 허위 보고를 하면서 1482년 음력 8월 16일, 결국 사약을 받아 사사되고 말았다.

훗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고, 결국 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처벌하면서 1504년에 갑자사화 등이 일어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로 인해 한명회 , 한치형 등의 사람들이 부관참시를 당하고 그 이외의 사람들이 사사되거나 유배되었다.

 하지만 실제 역사 속의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연산군에 의해 제헌왕후(齊獻王后)에 추숭되고, 회묘는 회릉(懷陵)으로 격상되었으나 , 1506년 중종 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어 연산군이 그의 어머니 윤씨에게 올린 관작은 모두 삭탈되었고, 회릉 역시 회묘로 격하되었다.

 회묘는 현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신동(元新洞)의 서삼릉 경내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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