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 인물/南原伯派

남 098.

물텀벙 2010. 9. 3.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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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명은 갱(鍞)이었으나 25세 때 휴(鑴)로 고쳤다. 字는 희중(希仲). 號는 백호(白湖), 하헌(夏軒). 大司憲 효전(孝全)의 아들이시며 南人의 巨頭이시다.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권시(權시). 이유태(李惟泰). 윤선거(尹宣擧) 등과 교유하였다.

 1656년 학행으로 세자시강원자의(世子侍講院諮議)에 천거되고 이후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60년 효종이 승하하고 1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남인(南人)의 입장에 서서 3년설로 송시열의 기년설(朞年說)에 대항하였으나 실세(失勢)하고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다. 그 후 서울 쌍계동(雙溪洞)에 하헌재(夏軒齋)를 짓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광활한 학문적 기반을 닦았다.

 1674년 현종이 승하하고 2차 예송이 일어나 서인(西人)이 실각하고 남인이 득세하자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에 나아갔다. 이후 대사헌. 성균관 좨주(祭酒).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1679년 송시열의 처벌 문제로 남인이 강온(强穩) 양파로 분열되자 청남(淸南)으로 송시열의 엄벌을 주장했었으나 뒤에는 탁남(濁南)에 속했다.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할 때 갑산(甲山)에 유배되고 이어 허견(許堅)의 옥사에 관련된 혐의로 사사(賜死)되었다.

 1689년 아들 윤하제(尹夏濟)의 상소로 신원되었고, 領議政에 追贈되시었다.

저서로는 독서기(讀書記), 백호집(白湖集), 홍범설(洪範說), 주례설(周禮說), 중용설(中庸說), 효경장구고이(孝經章句攷異), 대학설(大學說), 중용장구보록서(中庸章句輔錄序), 중용대학후설(中庸大學後說), 대학고본별록(大學古本別錄), 공고전장도설(公孤戰掌圖說)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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