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字는 평중(平仲), 號는 우암(憂菴).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 매오(梅塢) 몽열(夢說)의 아들이다. 1602년(壬寅) 출생하여 자랄 때부터 글짓기에 재질이 남보다 뛰어나서 16세때 지은 봉왕부(蜂王賦)는 당시 고을 선비들을 놀라게 하였고 백일장(白日場)에 여러번 장원하여 동료 선비들간에 명망이 높았다. 만휴(萬休) 임유휴(任有休), 주형(朱炯) 등과 더불어 학문을 토론하고 생사를 같이하는 막역한 벗이었으며, 영양(英陽)에 사는 동지 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조임(趙任)의 사위로 한 때 잠시 영양에 머물면서 이름이 높았던 선비 이시명(李時明), 김시온 등과도 글로 사귄 벗으로 영동 영서간에 크게 알려졌다. 1647년 인조(仁祖) 25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어 성균관에 수학할 때 강심경부(江心鏡賦)를 지어 장원하여 대제학(大提學)의 별칭으로 천망(薦望) 되었다. 성품이 온후하고 학문과 덕행을 겸비한 학자로 그 아래서 글을 배운 인재가 많이 배출 되었으며,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사경위기에 있는 모친의 병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리고 정성으로 간호하여 구하였고 또한 형제간에 우애와 족친간 화목으로 많은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1656년 효종(孝宗)7년 삼남지방(三南地方)에서 8년간 한발로 흉년이 계속되자 효종(孝宗)께서 민간 선비들에게 정치에 대한 의견을 듣고자 하교가 내리자 公은 백성들의 고통을 조목조목 지적하여 정책대안인 만언소(萬言疏)를 올리니, 효종(孝宗)께서 감탄하시고 답서(批旨)를 내리는 동시에 그 상소문을 출판하여 팔도에 배포하여 표본이 되게하니 전국적으로 알리게 되었다. 1663년 현종(顯宗) 4년 향년 62세로 돌아가시니 유림에서 힘을 모아 1693년 금매리 몽천(蒙泉)에 몽천사(蒙泉祠)를 건립하여 위패를 모시고 향사하였다. 그후 몽천서원(蒙泉書院)으로 승격되어 1693년 관수(官需)로 제향하다가 고종(高宗) 5년 서원이 철폐되어 삼조어비각(三朝御批閣)에 삼대 우암 시형(時衡), 삼족당 여룡(如龍), 황림 사진(思進)을 모시고 배향하고 있었으며, 문집 4권과 유품이 소장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