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 인물/版圖公派

판 071.

물텀벙 2010. 9. 5.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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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3(선조36)년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광해군 때 벼슬을 버리고 예산에 낙향하였다가 인조반정 후 담양부사, 장흥부사,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 부사공 윤시용 묘갈명(府使公尹是勇墓碣銘)

 공의 자(字)는 사근(士謹)이신데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쓰시여 약관시절에 팔곡(八谷) 구사맹(具思孟)의 제자가 되시여 학문이 날로 성취되시어 같은 동료로서는 따르지 못하였다.

 28세때 왜란(倭亂)을 만나 여러해 동안 피난하시다가 신축(辛丑)년에 사마과에 올라 장원서(掌苑署) 별감(別監)이 되셨다가 금부도사로 천거(薦擧)되시었는데 적은 사건이 관련되시어 그만 두시었다. 그후 선조 36년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시여 주서(注書)로부터 전적(典籍) 예조좌랑(禮曹佐郞)을 거쳐 강진(康津), 용인(龍仁) 두 곳 현령으로 제수되시었다.

 그때 광해의 횡포가 자기 동기간을 죽이고 모후(母后)를 유폐하니 고향에 돌아오시어 잠시동안 두문불출(杜門不出)하셨다가 강계 영변 부사를 역임하신 후 배천군수(白川郡守)가 되셨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공이 영변에 계실 때 그 당시 권세를 잡고 있는 사람의 아들이 마침 그 인근 읍의 수령으로 있어 사람들이 그에게 아부하지만 공은 한 번도 찾아가 본 일이 없었고 읍에 한 기생이 있는데 어떤 세력가가 사랑하였던바 이 기생이 그전 사람이 보낸것이나 받아 먹고 불러도 발걸음을 하지 않하므로 그 죄로 장형에 처하였더니 이러한 사건으로 탄핵받은 바 되었다.

 단도(단島)의 관향사(管餉使) 설공(薛公)의 종사관이 되시었다가 5년만에 평안도사가 되셨고 통정대부로 승차하시어 용천부사(龍川府使)가 되셨다. 공이 서도(西道)에 계시기가 싫어서 병을 칭탁하시고 사직(辭職)코자 하시니 감사가 벌써 장계하여 바꾸었다. 암행어사(暗行御史) 송상인(宋象仁)이 길에서 공의 가족(家族)이 먼저 치행하여 올라 가는데 이삿짐이 너무 초라한 것을 보고 수색한 결과 그 아드님에게 전하는 편지를 살핀즉 다만 무량(無恙=아무일이 없다는 뜻)하다는 것과 노끈으로 꼬맨 나막신 한켜레로 너무 초라한 행장이였다. 암행어사가 감사에게 보고하되 윤용천은 참으로 청렴한 수령이니 장계를 중지하라 하고 그가 돌아가서 왕께 아뢰어 공의 행장과 청렴한 것을 칭찬하여 공과는 마음 속의 벗으로 맺어졌다.

 그 후 공은 대사간으로 계시다가 또 세 고을의 수령(守令)을 더 지내셨고 담양부사로 관직(官職)을 마치시고 인조(仁祖) 15년 5월 28일에 세상을 떠나시니 춘추가 73세이셨다. 배위는 광산 김씨(光山金氏)로서 목사공 입휘의 따님이시고 후배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참봉 후안의 따님이시다.

 

 공의 묘소는 예산군 신양면 만사리에 있고 두 부인은 양주 명우리 간좌에 쌍분으로 모셨는데 공이 하세하신후 346년만에 두 부인을 이장하여 삼위 合窆으로 모셨다.

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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