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 자료/파평윤씨 자료

시조 태사공(太師公) 휘 신달(莘達)

물텀벙 2012. 1. 14. 20:32

시조 태사공(太師公) 휘 신달(莘達)

(1) 시조탄강사(始祖誕降史)

경기도 파주 파평산 기슭에는 아득한 태고 적부터 큰 연못이 있어 이를 용연(일명 가연)이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전설에 따르면 이 못 속에는 용인(龍人)이 살고 있어 연못이 불결해지면 천둥소리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몰아 친다고 전한다.

예로부터 우리 종중에 전해오는 가첩(家牒) 언전(諺傳) 및 그 밖의 문헌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1,110여년 전, 즉 신라 진성왕 7년(서기 893) 계축(癸丑) 음력 8월 15일, 용연 위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요란한 천둥번개가 치면서 큰 연못 위에 한옥함이 떠올랐다. 마을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겨 고을 태수에게 고하여 연못에 이르니 떠올랐던 옥함이 연못 복판으로 밀려들어갔다.

날이 저물 무렵 한 노파가 연못가에서 빨래를 하는데 옥함이 다시 떠올라 밀려오므로 이를 건져내어 열어보니 그 속에 한 옥동자가 오색의 우모(羽毛)에 싸여 들어 있었다(이 옥함에 관해서 일부 문헌에는 석함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태사공 묘지에는 금궤로 되어 있다).

찬연한 서기(瑞氣)를 발산하면서 옥함에서 나온 옥동자는 융준용안(隆準龍顔)으로 코가 우뚝하고 용의 상을 닮았으며, 양쪽 어깨에는 붉은 사마귀가 있어 해와 달을 상징하고, 좌우 겨드랑이에는 비늘 81개가 돋아 있고, 발에는 7개의 점이 있어서 북두칠성의 형상과 같았으며, 온 몸에서 광채가 솟아서 눈을 부시게 하였으니, 이 어른이 바로 우리 파평(坡平) 윤씨(尹氏)의 시조 태사공(太師公)이시다.

시조 태사공(太師公)이 득성(得姓)하신 연유에 관해서 예로부터 종중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용연에서 옥함을 건져낸 노파의 성을 따 윤성(尹姓)이 되었다고 전하나, 가첩 및 그 밖의 문헌에 따르면 옥함 자체에 윤(尹) 자(字)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윤성이 되었다고 하며, 또한 옥함에서 나오실 때 그 어른의 손바닥에 윤(尹)이라는 글씨가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고도 전한다. 태사공의 휘(諱) 신달(莘達)이며, 또 하나의 휘로는 화신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옥함에서 탄강하신 태사공께서는 노파의 극진한 정성과 사랑으로 양육을 받으셨는데, 자라남에 따라 기골이 장대하고 재기가 뛰어나셨다. 태사공께서는 파평산 아래에 사시면서 학문과 무예를 닦으셨다. 그리고 파평산 마루에 길을 닦고 용마를 달리며 무예를 연마하셨는데 그 곳을 치마대(馳馬臺)라고 하며 지금도 태사공께서 길을 닦으셨던 석축이 일부 남아 있다.

치마대에는 태사공께서 무예를 닦으시던 중 애마가 죽어 이를 추념(追念)하여 철마를 만들어 놓아두었는데, 후일 어떤 철공이 그 철마를 훔쳐갔다가 즉사함으로 같이 갔던 사람이 두려운 마음에서 흙으로 작은 말을 빚어 구워서 그 곳에 가져다 놓았다고 전해오나 지금은 그 형적이 남아 있지 않다.

또 태사공께서 학문을 닦으시던 옛 집터인 금강사(金剛寺)도 지금은 형적이 없으나 그 절터만은 역연(歷然)하게 남아있다.

태사공께서는 일찍이 파평에서 개경 임지까지 임진강 나루를 건너 내왕하였는데 공이 강을 건너실 때에는 으레 강물이 갈라지며 홀연히 백사장이 드러나서 신발을 적시지 않고도 강을 건너시게 되니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겼다는 전설이 있다.

또 태사공께서는 송도(松都) 조정에 출사하신 뒤에도 말을 타시고, 파평 사저(私邸)에서 강건너를 내왕하셨는데 말의 빠르기가 나는 듯하였고, 강을 건널 때에는 물이 양쪽으로 갈라졌다고 하는데, 이를 두고 사람들은 물결을 끊고 마시듯 강을 건넜다 하여 이곳을 여음진(如飮津)이라고 이름지었다. 그 후에 음진(飮津)으로 고쳤는데, 이것이 다시 후세에 와서는 음(音)이 변하여 임진강이 되었다고 전한다. 용연 동쪽에 금강사 유허(遺墟)가 있는데 그곳은 원래 태사공께서 자라시며 학문과 무예를 닦으시던 옛집 터로서, 3세 복야공이 그곳에 금강사를 짓고 승려를 두었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문숙공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성스러운 곳으로 그 인근에는 암자 미타사(彌陀寺)가 있다.

우리 나라의 고사를 보면 건국 신화나 씨족 설화에는 여러 가지 기적이 담겨져 있는데 삼한 통합에 큰공을 세우신 우리 시조 태사공의 경우에도 탄강(誕降)하실 때의 기적에 대해 그와 같은 영서로운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씨족 탄생에 얽힌 고대 설화들은 천강설, 지생설 등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우리 시조의 용연 탄강설화를 어느 범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인지는 차치하고라도 우선 파주 용연의 지리적 위치가 우리의 주목을 끌지 않을 수 없다. 즉 우리 나라의 중심부에 위치한 파주땅에서 탄강하셨다는 점이 대부분의 다른 대성(大姓)들의 관향(貫鄕)과 다르다고 하겠으며, 이러한 지리적 이유에서도 우리 윤씨가 전국 방방곡곡에 고루 퍼져 번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파주의 산명이나 지명에 있어서 ‘용(龍)’자가 많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특히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용연 바로 옆의 파평산은 원래 미라산이라고 불렀는데, ‘미라(彌羅)’는 한자로 풀이하면 ‘두루 사방으로 퍼진다’는 뜻이 되고, 또한 ‘미라’는 용을 뜻하는 우리의 옛말 ‘미르’와도 통하여, 파평산은 ‘용의 산’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점에 비추어 보아 시조께서 용인이 살고 있다는 용연에서 태어나시고 ‘용의 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파평산에서 자라 백만을 헤아리는 동방의 일대 거족의 비조(鼻祖)가 되셨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상징적이며 영예로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더구나 파평산의 주변에는 용이 서리고 있다는 반룡산이 있고, 또한 용이 일어난다는 용발산이 있으며, 또 사찰 중에도 용상사가 있고, 지명 중에서 용지동이 있고, 미륵불이 솟아 있는 용미리 등이 있다는 사실은 용연을 중심으로 한 파주 땅이 삼한(三韓) 갑족(甲族)인 우리 파평 윤씨의 발상지다운 성지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하겠다.

용(龍)은 또 임금의 상 또는 천자의 사물에 쓰는 글자인데, 용연에서 탄강하신 우리 시조 태사공의 후손 중에서 여섯 분이나 국모가 나시어 이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을 일곱 분이나 탄생하셨으니, 이 또한 너무나도 신기로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2) 태사공(太師公) 약사

우리 시조 태사공께서는 신라의 천년 사직이 붕괴되고 후삼국의 혼란기를 거쳐 이 나라가 재통일되는 역사적인 일대 변혁기에 탄강하시어 마침내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을 통합하신 위인이시다. 지금으로부터 1,100여 년 전인 신라 경명왕(景明王) 2년(918)에 태사공께서는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등 동료들과 협력하여 궁예를 무찌르고 왕건을 국왕으로 추대하여 백성의 호응을 얻으니 이로써 삼한을 통합한 고려 왕조가 수립되었던 것이다.

당시 신라는 귀족 사회의 부패와 국왕의 난정(亂政)으로 도처에 도적이 횡행하고 각지에서는 토호(土豪)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전국적인 동란기(動亂期)의 와중에 있었다.

그리하여 신라는 국력이 극도로 쇠퇴하고 각처에서 군벌이 봉기하여 궁예가 송도(개성)에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강원도, 황해도 및 평안도까지 점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궁예는 도읍을 철원으로 옮겼는데 왕건은 그 휘하에서 대장으로 있었고, 태사공께서는 왕건의 동료이셨던 것으로 추측된다.

궁예는 천성이 잔인하고 횡포하여 폭정과 학살을 자행하여 민심이 완전히 이탈되었기 때문에서 태사공께서는 제장(諸將)과 더불어 궁예를 물리치고 왕건을 국왕으로 추대한 것이었다.

그 때 궁예는 궁중에서 주색에 잠겨 있다가 왕건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왕건과 윤신달(尹莘達)이 쳐들어온다니 나는 이제 끝났다.” 하면서 궁중을 빠져나가 도망치다가 강원도 평창 산골에서 백성들에게 피살되었다. 그보다 앞서 왕건과 그 부인 류씨는 태사공의 인품이 비범함을 알고 류씨의 형부로 맞이하였던 것인데, 궁예를 정벌할 당시 제신들과 함께 공이 왕건을 적극 추대한 동기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왕건 태조는 등극과 동시에 국호를 고려라 고치고 송도(개성)로 도읍을 옮겼다. 그 뒤에 신라를 자주 침범하는 후백제 견훤의 아들 신검을 수차 정벌한 사실이 있었는데, 태사공께서 그때마다 왕건 태조와 같이 출정하셨던 것이다. 왕건 태조가 고려를 건국한 뒤 18년이 지난 서기 935년에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는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태자 이하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고려 왕건 태조에게 나라를 바치고 투항하였다.

왕건 태조는 투항하여 온 경순왕에게 왕녀를 하가(下嫁)시켜 별궁에 거주케 하면서 백관의 상위로 우대하였다. 그때 왕건 태조는 서라벌에 동경, 즉 경주대도독부(慶州大都督府)를 설치하여 대도독으로 하여금 신라 유민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 다음해에 왕건 태조는 끝까지 반항하는 후백제 신검을 정벌하여 항복을 받아 드디어 삼국을 통일하였으니 지금으로부터 1,100여 년 전인 고려 태조 19년(936)의 일이었다.

왕건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기까지에는 “인의와 도덕으로 백성을 다스려 천하를 이롭게 해야 합니다.”라고 태사공이 항상 충간(忠諫)하였는데 왕건 태조는 그 충간을 감명 깊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을 통일한 뒤에 조회석상에서 왕건 태조는 여러 신하들에게 “이 대업을 이룬 데는 윤신달의 공이 크다.”고 유시(諭示)하였던 것이다.

그 때 공신으로 일등이 5명, 이등이 12명, 삼등이 10명, 사등이 2명으로 모두 29명이 책훈 되었는데, 태사공께서는 이등공신으로 벽상삼한익찬공신의 공호와 삼중대광태사라는 관작(官爵)을 받으셨다. 태사라는 관작은 태부, 태보와 더불어 삼공의 예우를 받는 직위였다. 이때 같이 공신으로 책훈된 인물 중에는 신숭겸, 배현경, 홍유, 복지겸, 김선평, 류차달, 이도, 장길 등이 있다. 공의 휘는 신달이요, 일휘는 화신이며, 시호는 소양이시다. 신라 진성여왕 7년(893) 계축년 음력 8월 15일 파주 파평산 아래에서 출생하셨다. 용연 부근에서 성장하심에 따라 범상치 않은 풍모를 지니시고 재기가 뛰어나시어 날로 영특한 자품(恣品)을 갖추시게 되었다. 공께서는 자라시면서 학문을 익히고 또 파평산에 올라가 무술을 연마하신 후 성년이 되면서 어느 재상 댁에 문객(門客)으로 계시게 되었다. 그때 가뭄이 극심하여 곡식이 타죽게 되니 나라에서는 기우제를 지내기로 결정하고 국왕이 그 재상에게 제문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재상이 자택에 돌아와서 제문을 지으려 하였으나 좀처럼 머리 글귀가 생각나지 않아서 고민하고 있을 때에 태사공께서,

“이렇게 지으시면 어떠하리까?” 하시면서,

“宣君臣地有罪甘受災殃 奚草木之無知等蒙焦熟”이라고 써서 재상에게 제시하시자 재상은 그 글귀를 보고 과연 명문이라고 칭찬하면서 제문을 지어 국왕에게 바쳤던 것이다.

그 글 뜻은 “임금과 신하가 죄가 있다면 마땅히 재앙을 받겠지만 어찌 초목까지 타서 마르게 하나이까.”라는 내용이었다.

태사공께서는 그 재상의 추천으로 여러 관직에 오르셨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자세한 문헌이 없다. 고려 건국 후 25년만인 서기 943년 왕건 태조가 승하하고 제2대 혜종(惠宗)이 등극하였다. 원래 동경(東京:경주) 대도독부(大都督府)와 서경(西京:평양) 대도호부(大都護府)에는 가장 신망이 높은 중신을 보냈던 것인데, 혜종은 등극과 동시에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서경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에는 가까운 왕족을 보냈고 동경 대도독(大都督)에는 태사공을 보냈다. 그 때 태사공의 보령은 52세였다.

태사공께서 동경에 부임하셨으나 한편 아드님이신 공신공(功臣公)께서는 종신(終身)토록 송경을 떠나지 못하셨다.

그 이유는 중국에서 천자가 작은 나라를 점령하고 제후왕(오늘의 總督)을 봉할 때에는 아무리 신임하는 사람을 보내도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제후왕의 장자를 볼모로 왕경(王京)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던 일에 근거한다. 따라서 혜종도 그렇게 신임하는 분을 보내면서도 신라의 유민이 많았기 때문에 만일을 염려하여 공신공을 송경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태사공께서 동경을 부임하셔서 30년간 재임하시다가 81세에 서거하셨는데 그간에 부자(父子)께서는 한 번도 상면하실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바칠 때 태자(마의태자)와 중신들이 크게 반대하였던 것이므로, 신라 백성 중에도 원래가 적대시하였던 고려에 대하여 불복하고 반항심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은 실정이었다. 그런데 『고려사』나 기타 어느 문헌에도 신라 유민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전연 없다. 그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태사공께서 대도독으로 부임하셔서 신라 유민을 통치함에 있어서 얼마나 훌륭한 왕도 정치, 즉 도의정치를 베푸셨는지 그 선정의 정도를 능히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뿐 아니라 조정에서도 30년이나 유임시킨 것도 태사공의 통치가 목민 위주의 정치였다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태사공의 묘소가 실전(失傳)되었다가 수 백년이 지나서 찾았는데 그 지방민들로부터 그 곳은 ‘윤릉(尹陵)골’이라고 전해 온다는 말을 들은 것이 단서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신라 유민들이 태사공의 덕치에 감동되어 마치 왕과 같이 섬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사공께서는 서거하실 때까지 동경에서 30년 동안이나 머무르며, 신라 유민을 선치(善治)하여 완전하게 고려의 충성된 국민으로 감화시켰기 때문에, 공이 서거(逝去)하신 지 10년 후인 성종(成宗) 2년에 대도독부는 폐지되고 각 군은 그 고을 수령에게 맡기도 경주 한 고을만 다스리는 동경(東京) 유수(留守)를 두도록 직제를 개정하였던 것이다. 공의 배위(配位)는 문화류씨(文化柳氏)로서 그 아버님은 월흑산장(月黑山長) 보림(普林)이고, 조부는 해평산장(海平山長) 무선(茂先)이며, 문화 류씨 시조 차달(車達)의 누이가 되시며 장절공 신숭겸 부인의 동생이고, 고려 태조의 비 류씨의 언니이시다(『류씨가정간행보(柳氏嘉靖刊行譜)』).

공이 고려 광종 24년 계유(973)년에 임소(任所)에서 서거하시니 향년 81세였다. 공의 묘소는 경주 기계현 벌치동(現 포항시 기계면 봉계동) 운주산 고봉산 아래 유원에 모셨었는데 중간에 실전(失傳)되었다가 영조 때 심묘(尋墓)하여 개봉축(改封築)하고 영조 16년에 비를 세웠다. 배위(配位) 묘소에 관해서는 봉강재(鳳岡齎) 소장(所藏)의 태사공 심묘기에 경주 남면(南面) 봉동산 아래 박달리 감룡(坎龍) 자좌오향(子坐午向) 득수진파 동서분(得水辰破東西墳)으로 모시고, 비석을 묘 아래에 묻었다고 전하나, 태사공 묘표기(墓表記) 및 묘지에는 합장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앞으로 규명되어야 할 문제로 남아있다.

(3) 고려 개국 통합 삼한익찬공신 책훈조서

고려 태조 천수(天授) 원년 무인(918)년 8월 신미일(辛未日) 왕이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신하로서 기대를 향도(嚮導)하기에 알맞은 기발한 토략(討略)을 운용하여, 개세(蓋世)의 높은 공훈을 세운 이에게는 땅을 베어 식읍(食邑)으로 대하고 높은 위계(位階)와 관작(官爵)을 주어 포상하는 것은 백대의 떳떳한 전장(典章)이며, 천고의 뚜렷한 규례(規例)이다. 내가 출신(出身)과 재식(才識)이 모두 변변하지 못한 터에 여러 동지의 바라는 바에 힘입어 새 나라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횡포한 구왕조(舊王朝)의 주인을 폐출(廢黜)하는 혁명의 과정에서 나에게 충신의 절개를 오로지 받쳐온 이에게는 마땅히 상뢰(賞賚)를 시행하여 그 훈로(勳勞)를 포장(襃獎)하여야 하는데, 그 등급에는 차가 있겠다. 내가 공들과 더불어 이룬 과업이 생민(生民)을 도탄(塗炭)에서 구하기 위한 부득이한 의거였다고 할지라도 구왕조의 신하로서 절의는 마침내 지킬 수 없었으니 이번 혁명을 공으로 본다는 것은 나로서는 어찌 부끄러움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공이 있는데도 포상하지 아니함은 장래를 권장하는 도리가 아니므로 오늘의 상을 마련한 것이니 공들은 나의 뜻을 분명하게 알기 바란다. 우리 고려를 개국하여 삼한을 통합하는데 힘이 큰 공신들의 차례는 일등이 5명으로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최응이요. 이등은 12명으로 윤신달, 유금필, 김선평, 장길, 류차달, 이도, 함규, 김선궁, 홍규, 왕필, 심선술, 박윤응이요. 삼등이 10명으로 왕식렴, 진평, 견권, 박희술, 능식, 권신, 겸상, 연주, 마환이요. 사등이 2명으로 김홍술과 박수경이다.

(4) 시조 태사공(太師公)의 묘표(墓表)

아! 이곳은 파평(坡平) 윤씨(尹氏)의 시조 고려의 태사(太師) 휘 신달(莘達)의 묘소이다. 태사공께서는 처음 파평에서 나셨는데,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三韓)을 통합하여 공신이 되셨으며, 벼슬은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가 되셨다. 돌아가신 뒤 이 곳에 모셨으니, 즉 경주(慶州) 기계현(杞溪縣) 벌치동(伐治洞) 구봉산(九峰山) 아래 유좌(酉坐)의 언덕이다. 옛날에는 무덤 앞에 표석이 있었는데 장지(葬地)를 시기한 사람이 비석을 깨뜨려 숨겼기 때문에 자손들이 마침내 그 무덤이 있는 곳을 잃어버렸다. 간혹 전해지는 기록과 전하는 말이 족보에 실리기는 했으나, 또한 살펴볼 만한 근거가 없어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후손 이(理)가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있을 때 찾아 다녔지만 얻지 못하였다. 영조(英祖) 13년 정사년(1737)에 봉정(鳳廷)이 영장(營將)이 되었는데, 이 지방 사람들이 모두 어떤 곳을 가리켜 윤태사(尹太師)의 무덤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곧바로 묘 아래에 가서 근처의 흙을 파내어 ‘대부윤(大夫尹)’이라고 3자가 크게 새겨진 부서진 비석 한 조각을 얻었다. 이에 가문 사람들이 모두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는 글자 3자 가지고는 충분히 확증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염려하였다. 그러다가 이(理)의 아들 판서 양래(陽來)가 경상도(慶尙道)에 부임하여 일꾼들을 더 내어 무덤의 좌우를 두루 파헤치며 7일 동안 수색해서, 또 ‘선지금강(先之金剛)’이라고 4자가 작게 새겨진 돌 조각 하나를 얻었다. 그런데 이는 곧 공의 아들 삼한공신(三韓功臣)과 손자 좌복야(左僕射) 두 분의 휘이다. 비석의 자획이 앞서 얻은 것보다 크기가 작기는 하지만 실은 서로 비슷한 것으로, 큰 글자는 전면에 표기한 글자이고, 작은 글자는 후면의 음기임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 태사공이 묻혀 계시다는 것을 의심치 않게 되었다.

모든 우리 윤씨 성을 가진 사람 가운데 기이하고 다행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서로 경사 스럽게 여겼다. 이에 혜교(惠敎)가 양래(陽來)․부사 동설(東卨)․승지 휘정(彙貞)․현령 사도(師道)․참관 용(容)과 함께 도모하여 이르기를, “우리 시조의 성대하신 덕과 위대한 공 때문에 대대로 계승하여 이제까지 거의 천년에 이르고 조선(朝鮮)에 들어와서는 네 분 국모(國母)가 탄생하였으니 더욱 성대하였다. 묘소에 대한 일은 마땅히 삼가고 지켜서 틀리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도 중간에 잃어버렸다. 한 번 잃은 것은 찾기가 대단히 어려운 데도 이제 다시 찾았으니, 이 어찌 때때로 밝았다 어두웠다 하는 것은 때가 있고 또한 음으로 도와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을 잇고, 빠지고 없어진 것을 보충하고 마련해서 오래도록 영구하게 전할 것을 도모하는 것은 우리 후손들에게 달렸다.” 하고서 드디어 팔도에 흩어져 사는 후손들에게 두루 알려 각각 힘을 모아 돕도록 하였다. 마침 휘정(彙貞)이 고장을 지키게 되어서, 이 일을 도맡아 보게 되었고 돌을 갂아 이 묘소의 모든 것을 표기하게 되었기에 혜교가 간략하게 그 사적만을 기록한다.

공의 언행(言行)과 사업(事業)과 같은 문헌은 이미 고증할 수 없게 되었고, 후손들은 번성해서 나라 안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5) 태사공(太師公) 심묘사적(尋墓事蹟)

공의 묘소는 경주 기계현 벌치동(現 포항시 기계면 봉계동) 구봉산 아래에 장례를 모셨고, 묘 앞에 표석을 세웠었는데 조선조 중엽 어느 때에 경주의 토호 품관인 이하지라는 자가 묘소의 표석을 부러뜨려 땅에 묻고 투장(몰래 묘를 쓴 것)하였다.

그 후 후손들이 공의 묘소를 찾았으나 거기에는 딴 사람의 묘로 봉분이 변하여 있었으므로 알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 경주에 거주하던 후손 윤숙이 공의 묘소를 일찍이 짐작하던터이라 숙종 45년 己亥(1719) 정월에 서울에 올라가 종중 제족에게 이 사실을 호소하였다.

서울에 있던 후손들로서 당시 영부사 윤지완, 참판 윤헌주, 승지 윤봉조, 사부 윤봉구, 직장 윤봉휘, 광주부윤 윤양래, 도사 윤사훈, 전판부사 윤지선, 한림 윤세주, 이조좌랑 윤선, 현감 윤이풍등, 요로에 계신 분들이 종중에 통문을 발송하여 종회를 열고 협의한 끝에 종중사인 정로를 경주에 내려보내여 경주부윤에게 소청을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동리의 리임(理任)등과 결탁하여 붙잡아 가두고 그 입을 봉하고자 죽여 없애려는 악랄한 흉계까지 꾸몄고, 경주 부윤도 “오래된 일이어서 알 수 없는 일이니 무슨 증거가 있느냐?”고 들어주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공갈과 위협으로 대하고 부당한 곤욕으로 이 정당한 청원에 대한 처리를 고의로 회피하는 것이었다. 태사공으로 말하면 고려의 건국공신이시고 그 후손으로 국구(임금의 장인) 성모(왕비)가 여러분 계셨고, 명상현신들이 많을 뿐 아니라 그 후손의 수효만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거족이거늘 먼 시골의 일개 품관 따위의 농간으로 수령의 지위에 있는 자까지도 이에 동조하였다 함은 실로 한심스럽고 통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울의 제종들은 이에 대한 대책을 숙의한 후 각종 전기, 보책 등 사료를 수집하였으나 확적한 증거될 만한 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심증으로만 공의 묘소가 과연 어디라는 것만 내걸고 계속하여 찾아내기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을 뿐이다.

그 후 후손 이(理)가 경주 부윤이 되어서 현지에 가서 물적 증거를 찾았으나 얻지 못하였다. 영조 13년 정사(1737)년에 후손 봉정이 본부영장이 된 후에 그곳 토민들의 가리킴을 듣고 “태사공 묘소가 곧 여기라”고 지목되는 묘 아래 바로 밑을 파헤쳐 본 즉 과연 깨어진 비석 한 조각에 양각으로 각자(刻字)된 대부윤이라는 큰 글자인 세 자를 얻었다.

비로소 종인들은 기쁨에 넘쳐 묘소를 찾아내는 희망을 걸게 되었다. 이와 함께 소위 이가 양반이란 자들을 문초하여 자백을 얻은 후 세사람을 옥에 가두고 엄하게 다스렸다.

기미(1739)에 이(理)의 아들 익헌공 양래가 본도 감사에 도임한 후, 부근 일대의 좌우 양쪽을 파헤쳐 또다시 선지금강이라는 넉자의 작은 음기로 된 돌조각을 얻음으로써 더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었으니, 선지는 태사공의 아들 삼한벽상공신이시고, 금강은 공의 손자 휘(諱)인 까닭이다. 이리하여 이 사실을 종회에 통고하는 동시에 성금을 모아 경신년(1740)에 묘표를 세우고 당시 후손 중 재산가들로서 제전을 마련하여 분묘를 다시금 모셔 수호하기에 이른 것이다.

신미(1751)년에 후손 지돈녕 광소가 안동 부사였을 때 묘암을 창건하고, 재실을 묘 좌편에 짓고, 제기의물을 마련하고, 중을 두어 수호케 하였다. 후손 판서 방이 본부에 도임해서 더 확장하여 모두 40여 간이나 되게 하였다. 그 후 임신(1752)년에 정승 동도공이 본도 감사였을 때 제전 한섬 30두락을 마련하였다. 그 후 후손 광안과 성대가 또한 본도 감사와 동래부사가 되어 묘사를 다시 중수하고 제전을 증가시키는 동시에 후손들로서 재산가나 각 고을 수령인 분들에게 돈과 곡식 지물 등을 거출케 하여 전답을 늘리고 문권을 작성하며 본부에서 수호하여 받드는 방도를 만들어 비로소 만전을 기하게 하였다. 그 후에 묘소 2리 근처에 봉강 서원을 창건하고 공을 향사하여 본부에서 봄가을로 제전을 드리게 하였는데, 그 후 고종 5년 무진(1868)년에 대원군에 의한 서원 페지로 철원케 됨에 후손 울선이 제전 168두락을 바쳤고 원답은 재소에 환속시켰다.

배위(配位)의 묘소는 경주 남면 봉동산 아래 박달리에 감용 좌좌오향 득수진파 동서분으로 모셨고, 비석을 묘 아래에 묻었다고 전하나 태사공과 합폄되셨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런데 한 가지 아름다운 사실은 후손 동도가 본 고을 감사 재임 당시, 재실을 창건하는데 대들보 등으로 쓸 재목이 마땅치 않았는데 마침 경주 고척박씨 문중 선영이 구천면에 있어 큰 재목이 있으므로 그 중 40여 주를 무상으로 기부를 받아쓰게 된 사실로서 그들 박씨문중과는 상부상조한 잊지 못할 정의를 맺게 하였다.

태사공의 묘소에는 묘표와 묘지가 있는데 묘표는 25대손 이조판서 혜교가 지으시고 25대손 경주부윤 휘정이 쓰셨으며, 묘지는 공의 사적과 탄생에 대한 설화를 기록하였는데 이는 30대손 가선대부 이조참판폄 홍문관 부제학 태준이 쓰셨다. 지난 1971년 가을에 후손 귀보가 단독으로 성재를 내어 신도비를 세웠다.

(6) 고려 태사 윤공 휘(諱) 신달(莘達) 용연기적비문(龍淵紀蹟碑文)

우리 파평 윤씨는 고려(高麗) 태사(太師) 휘(諱) 신달(莘達)을 비조(鼻祖)로 한다. 공께서 출생하실 때, 영묘하고 이상한 행적이 있었다.

가첩(家牒 : 족보)을 보면 파주의 파평산 서쪽 기슭 아래에 큰 연못이 있으니 이르기를 용연이라 하는데, 당나라 소종 경복 2년 계축년 8월 15일에 하늘에서 큰 비가 내리가 우레가 치고 구름이 일어 사방이 어두워지더니 돌 상자가 용연에서 떠올랐다.

태수께서 이를 듣고 이상히 여겨 용연으로 가서 본 즉 상자가 연못 속으로 들어갔다. 마침 시골 할머니가 연못 가장자리에서 옷을 빨고 있었는데 날이 저물어 상자가 다시 떠올라왔다. 할머니가 상자를 열어보니 오색의 찬란한 깃털 속에 한 갓난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의 양쪽 어깨에는 붉은 점이 있었는데 그 모양이 해와 달 같았고, 좌우 갈비뼈 아래에 81개의 비늘이 있었고, 발에는 7개의 점이 있었는데, 그 모얌은 마치 북두칠성을 수놓은 것 같았다. 손에는 윤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할머니가 이내 아이를 보호하고 기르니 점차 자라매 용모가 장대하고 훌륭하며 재주와 도량이 남보다 뛰어났다. 그러너 인연으로 파평산 아래에 자리잡고 살았는데 마침내 신마(神馬)를 얻어서 산언덕 위를 마치 나는 듯 달렸다.

개경에 조참(朝參)하기 위하여 이 말을 달려 강을 건너는데 물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이로써 후세에 사람들은 그 언덕을 치마대라 불렀으며, 그 나루터를 물결을 끊고 마시듯 강을 건넜다 하여 여음진(如飮津)이라고 이름지었다.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을 통합하니 그 공훈으로 벽상익찬공신(壁上翊贊功臣)으로 책훈되고 관직이 삼중대광태사로 올랐다. 일찍이 왕께 덕을 닦고 이를 행하기를 권하니 왕께서는 가상하게 생각하셔 시신에게 이르기를 “신라와 백제를 평정한 것은 공의 공이로다.”라고 하였다.

공이 81세 되시던 해에 동경 유수로 재임 중에 돌아가시니 동경의 기계현 벌치동 구봉산 유좌의 언덕에 장례를 모셨다. 때는 바로 송 태조 개보 6년 계유년이다.

1,000여 년의 세월이 구름과 같이 흘렀도다. 앞으로 공의 행적은 만 억년 동안 뻗치리라.

이름을 빛내어 지금에 이르러서도 대성으로 칭하니 이것은 어찌 공께서 닦으신 기운이 오랫동안 후손에게 물려지고, 후손들이 이를 받들어 그 공을 크게 선양한 연유로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 무릇 사람이 정기를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나나 일은 경사에서 간간이 찾아 볼 수 있는 일로써 이는 충분히 증명할 수 있는 일이로다. 우리 윤씨에게서 볼 수 있는 이런 일은 더욱 확연하여 세상에 귀로써 듣고 전하여 온 지가 오래도다. 자손된 자 어찌 이 행적을 인멸할 수 있을 것이며, 또 이를 크게 선양하여 표창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모든 종친이 서로 의논하여 비를 세워 자취를 기록하는 것은 장하도다.

공이 탄생하신 지 1028년이 지난 경신(庚申)년 4월에 후손 상건(相健)이 재력(財力)을 내어 그 일을 관장하여 시영(是永)에게 그 일을 감독하기를 부탁하고, 스스로 글을 가지고 상익에게 달려가 지을 것을 삼가 부탁하니 그 대략은 위와 같으니, 후손들이 볼 수 있도록 도모함이다.

31대손 가선대부 전 행 사간원 대사간 상익(相翊)은 삼가 지음

30대손 자헌대부 전 행 궁내부 특진관(特進官) 조영(祖榮)은 삼가 씀

(7) 시조 태사공(太師公) 신도비문(神道碑文)

내가 일찍이 아버지를 모시고 파주에 있는 용연에 가 보았는데 연못은 거칠고 풀이 무성하였으니 상서로운 기운과 왕성한 모양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우리 시조가 이곳에서 태어나셨는데, 그 태어나심이 신의 힘으로 되는 불가사의한 일로 괴이하게 생각되나 우리 자손들은 족보를 살펴보건대 상고할 수 없는 일이다. 공의 휘는 신달이다. 처음 휘는 화신이요, 성은 윤씨이다. 신라 진성왕 7년 계축(서기 893)년 8월 15일에 태어나시어 본을 파평으로 삼았다. 공은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을 통합하고 벽상삼한익찬공신 삼중대광태사가 되셨으니, 혜종이 동경 대도독으로 나가시게 한 뒤에 30년 동안이나 다시 부르지 않았다. 또 한 가지 전하는 바에 의하면 파평산 아래 큰 연못이 있었는데 윤노파가 물위에 떠 있는 상자를 건져보니 어린아이가 있었으며, 양쪽 어깨에 큰 붉은 반점이 있었는데 일월(日月)의 형상을 했으며, 발에는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어 북두칠성과 같은 모양이 그려져 있어 기이하게 생각하여 품에 안고 와서 기르시니 그 성이 윤씨요, 이름이 화신이다. 점점 자라매 지혜와 재주가 출중하여 오경(五經)에 능통하셨고 병서와 말타기 활쏘기를 파평산에서 익히시어 뒤에 사람들이 이곳을 치마대라고 하였으며, 윤노파가 돌아가신 뒤 의지할 곳이 없어 재상 유보림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집 사람들의 꿈에 공의 침소에서 황룡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날이 가물어 주인이 기우제 제문을 지으려고 하는데 글귀가 떠오르지 않던 중, 공이 옆에서 제문을 지어 바친 즉 그 내용이 “군신이 재앙을 받는 것은 마땅하나 아무것도 모르는 초목까지 마르게 할 수 있는가?”하여 주인이 그 글을 택했다. 그 후 장녀를 공의 부인으로 차녀는 왕건 태조의 비(妃)로 고려 왕조와 인척간이다.

공은 고려 태조를 도와 개국 공신으로 벼슬이 태사에 오르셨고 매양 군사를 이끌 때 덕행으로 다스려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어서 신라 경순왕이 항복하여 왔으며 조정에서 조회할 때 왕께서 태사공을 보시고 하신 말씀이 “고려를 창업하게 된 것은 모두 태사공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셨다. 왕건 태조가 돌아가신 후 혜종이 등극하여 전왕의 공신들을 의심하여 유금필은 자곡령에 유배하고 공은 경주도독으로 나가시게 하였다. 보첨마다 공의 탄생에 대한 유래가 다소 다른 점이 있으나 조상에 대하여 욕되는 바는 없다. 고려 광종 계유(973)년 81세에 서거하시니 묘지를 경북 기계현 벌치동 구봉산 아래 유좌의 언덕에 모셨으며, 그 근처에 봉강서원을 짓고 제향을 지냈다. 배위는 문화 류씨인데 합장했다. 아들은 휘 선지로 벽상담한공신이요, 손자는 휘 금강이요, 좌복야인데 이하는 쓰지 않는다. 공의 위훈이 컷음에도 아직 신도비가 없던 차에 종인 귀보가 찾아와 조상을 위하는 조그만 정성으로 장차 묘문 밖에 비석을 세우고자 하는데, 그 새길 글을 청하기에 거듭 사양하였으나 사양을 이루지 못하고 감히 보첨에 있는 것을 소재로 삼고 어른들의 말씀에 따라 글을 지었다.

명에 이르기를

! 큰산에서 신령이 강림하여 옥동자로 태어났네.

저 맑은 물 동쪽에서 어진 재상 태어났네.

공께서 태어나심이 또한 신기하고 이상했네.

지금도 검소하고 순박하니 대궐의 도리를 의심하리.

높은 덕으로 집을 일으키셨으니 파평산은 우리조상 위함일세.

재주는 나라에 크게 쓰여 고려조를 세우셨네.

공훈은 높아 벽상이니 영화로움 다 했도다.

동경을 지키라는 명을 받고 변방으로 나가셨네.

그 밝고 그 어두움은 공의 잘잘못은 아니로다.

세상을 위하는 도리로는 탄식으로 그칠 수 없네.

어찌하여 대통을 이어받은 후 창업전 일을 생각지 못하는가.

엄격한 교훈으로 충효를 전하였네.

어진 후손들은 이름난 재상과 큰 벼슬을 했네.

천만 대에 걸쳐서 이어지고 또 이어지리라.

시조강생 1074년 신해 9월 27일

32세손 귀보 삼가 세우고, 31세손 석훈은 삼가 찬하고,

33세손 대혁은 삼가 전자를 쓰고, 36세손 동직은 삼가 쓰다.

(8) 장단종인사록(長湍宗人私錄)

시조 태사공(太師公)의 묘는 경주(慶州) 기계현(杞溪縣) 벌치동(伐治洞) 구봉산(九峰山) 아래 유좌(酉坐)의 언덕에 있다. 공이 동경(東京:慶州)의 유수로 계시다가 임소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경주에 장사지내고 부인 유씨(柳氏)도 합장하였다(고려 태조왕비(太祖王妃)와 신장절공(申壯節公:申崇謙)의 부인이 모두 유씨라고 한다).

2세 벽상공신공(壁上功臣公)의 묘는 풍덕(豊德) 덕물현(德物縣) 남쪽 25리 증택(甑澤)의 위북쪽 인좌(寅坐)의 언덕에 있으니, 공이 인질로 송경(松京)에 머물러 있다가 돌아가셔서 장차 경주로 모셔가 장사지내려 하였는데, 괘감령(掛龕嶺)을 넘다가 상여가 부러져서 멈추고 그 곳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정씨(丁氏)라고 한다.

3세 좌복야공(左僕射公)의 묘는 위와 같은 곳인데, 속칭 ‘윤금릉(尹金陵)’이다. 같은 언덕에 있다. 부인은 유씨(庾氏)와 왕씨(王氏)니, 각각 장사지냈다.

4세 소감공(少監公)의 묘는 파주(坡州) 분수원(焚修院) 위 간좌(艮坐)의 언덕에 있으니 앞에 교자총(轎子塚)이 있고, 청룡(靑龍) 밖에 전마총(戰馬塚)이 있다. 부인은 소성(邵城) 이씨(李氏)니, 묘지는 연안(延安) 자달동(紫達洞)에 있다.

6세 문강공(文康公)의 묘는 문숙공(文肅公)의 묘와 같은 곳에 있으니, 심재상(沈宰相)의 묘위에 있으며, 용미(龍尾) 뒤에 있다.

7세 이부시랑공(吏部侍郞公)의 묘는 임단 석주원(石柱院) 남쪽에 있다.

8세 서경부유수공(西京副留守公)의 묘는 임단 석전곡(石田谷) 유좌(酉坐)의 언덕 집터 뒤에 있다. 여기에 입암(立巖)이 있는데, 부인 김씨가 노비 설매(㐥梅)로 하여금 동네 가운데에 쌓아 돌무더기로 표석을 삼았다 한다. 서쪽에 긴 골짜기가 있고, 북쪽에도 긴 골짜기가 있으니, 도랑의 물이 갑파(甲破)에서 합한다. 석주원(石柱院)과의 거리가 남쪽으로 5리요, 문현공(文顯公)의 묘로부터는 서쪽으로 10리이다(「좌계종인사기(左溪宗人私記)」에 이르기를, 지금은 우원주(禹原州) 묘소의 계단 섬돌 앞이라 한다).

9세 녹사공(綠事公)의 묘는 위와 같으니 혹은 덕현(德峴) 남쪽 1리 자좌(子坐)에 있다고 한다.

10세 감찰어사공(監察御使公)의 묘는 위와 같으니 매송현(梅松峴) 위라 한다(위와 같다는 것은 같은 군(郡)이라는 것이요, 같은 기슭이라는 것은 아니다).

[주석 : 내가 예전에 「장단종인사록(長湍宗人私錄)」 일체를 얻어 보니 시조 태사공 이하 10대의 묘지와 4대의 부인이 자못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근거할 것이 없기 때문에 감히 깊이 믿지 못하였다. 뒤에는 기계(杞溪) 분수원(焚修院)의 두 산이라는 설이 서로 같았지만 믿을 만해도 또한 그 보첨에 기록된 것을 견강부회하는 것이라 여길 따름이었다.

지금 풍덕(豊德)에서 양세의 묘지를 거듭 찾고 보니, 그 지명. 도리(道里). 좌향(坐向). 속칭이 기록과 조금의 차이도 없어서 비로소 그것이 믿을 만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진실로 이 기록을 근거하여 힘을 다해 정성껏 찾는다면 소감공(少監公) 이하 여러 공의 묘를 또한 어찌 일시에 찾을 방도가 없겠는가? 지금 풍산(豊山)의 묘문으로 추정하여 보책을 간행함에 이에 이 기록을 첨부하여 뒷날 사람들의 근거 자료로 삼고자 한다.]

성상(聖上) 5년 신축년 8월에 하완(下浣) 동섬(東暹)은 삼가 기록한다

 

 

 

 

'파평윤씨 자료 > 파평윤씨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304. 가나자와 형무소 -스크랩한 글-  (0) 2013.03.09
파평윤씨 유적 및 배향소  (0) 2012.04.10
몇장의 사진  (1) 2011.05.16
尹東柱의 생애(生涯)  (0) 2010.06.12
尹東柱의 詩 (6)  (0) 2010.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