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조선국 통훈대부 행군자감판관 윤은(尹訔) 묘갈명 : 서문을 아울러 짓다.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 지의금부사 이사균(李思鈞)이 글을 짓고, 급제 김로(金魯)가 글씨를 쓴다.
군의 이름은 은(訔)이요, 자는
화중(和仲)이니 남원의 훌륭한 성씨이다. 청백함으로 세상에 행세한 분이 함길도(咸吉道)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림(臨)이고 이분이 선공감봉사
지득(之得)을 낳았는데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곧 군의 아버지이다. 공조전서 기면(奇勉)의 따님에게 장가갔는데 기씨 역시 명망 있는 집안이라
가정을 다스림에 어김이 없었으니 집에서 교육받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군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고 성장하여서는 능히 스승에게 나아가
경전에 통달하였으나 과거에 응시하여 연이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만년에 음직으로 관직에 나가 은계도(銀溪道)찰방에 임명되고 뒤에
금화사(禁火司) 제검에 제수되고 다시 옥과현감이 되었다.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다시 복직하여 사도시주부, 사축서사축을 지내고
군자감판관으로 관직을 마쳤다. 낮은 관직에도 게으르지 않고 작은 일에도 소홀하지 않으며 30여년을 삼가하며 공손하게 지내고 이로써 집안의
규범을 삼아 자손에게 물려주었다. 향년 82세로 가정 무자년(1528, 중종 23) 11월 27일에 가벼운 병을 앓다가 별세하였는데 사람들은
군이 늙을수록 더욱 건강한 것을 보고 오히려 능히 수명을 누리지 못했다고 한탄하였다. 군의 부인은 곧 지승문원사 조원희(趙元禧)의
따님이요, 승정원지신사 서로(瑞老)의 손녀이다. 부인의 도리를 모두 갖추었으니 집안 친척들은 그 행실에 탄복하고 동리에서는 그 훌륭함을
칭송하였다. 76세에 병으로 먼저 별세하니 이때가 갑신년(1524, 중종 19)이다. 김포 임촌리(林村里)에 장사지냈다가
기축년(1529, 중종 24) 2월에 이곳에 매장하니 유언을 따른 것이다. 네 아들이 있는데 장남은 시영(時英)으로 갑자년(1504,
연산군 10)에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 군자감정이고, 차남은 봉직랑 시웅(時雄)이며, 다음 시호(時豪)는 병자년(1516, 중종 11)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성균관 전적에 이르렀으나 일찍 죽었다. 다음은 시걸(時傑)은 경진년(1520, 중종 15)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 형조정랑이다.
딸은 셋으로 장녀는 유종번(柳宗蕃)에게 출가했는데 학자이고, 다음은 습독관 박현령(朴玄齡)에게 출가했으나 먼저 죽었고, 다음은 생원
김장(金璋)에게 출가하였다. 내외의 손자와 증손이 30여명이다. 아들과 사위가 갈 길 아직 멀어 나아가는 바가 반드시 여기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니 군이 후손에게 남긴 복록이 다하지 않음을 알겠구나. 명하노니,
외모가 순수하고 사람도 또한 순수하구나. 집안에서는
순리로 다스려 서로 보완하였네. 마음에 강직함 가득하지만 법도를 어김이 없고 자식을 엄하게 가르치되 또한 성내지 않았네.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니 가문에 훌륭한 영광이라, 자식이 음덕을 입으니 아버지의 덕이 아닌 것이 없구나.
가정
16년(1537, 중종 32) 5월 일에 세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