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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윤의립 묘갈문(尹毅立 墓碣文)

물텀벙 2015. 3. 14. 07:39

24. 윤의립 묘갈문(尹毅立 墓碣文)

 

 

 

이 비는 1791년(정조 15년) 경기도 양주에 건립된 윤의립묘갈(尹毅立墓碣)로 윤필병(尹弼秉)이 비문을 짓고, 아울러 글씨도 썼다.
윤의립(尹毅立 : 1568~1643년)의 자는 지중(止中)이며, 호는 월담(月潭)이다.

1594년(선조 27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정자를 지낼 때 조카가 이괄의 난(인조 2, 1624년)에 가담하여 처형된 뒤 벼슬을 사직하였다.

2년 뒤 관계에 재진출하여, 1626년(인조 4년) 경주부윤이 되었고, 이어 경기도관찰사,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의정부좌참찬에 이르렀다. 그림과 글씨에 능하였고, 산수화로 이름을 떨쳤다. 저서로 『산가청사』가 전해진다.

 

 

 

有明朝鮮國資憲大夫議政府左叅贊兼知春秋館事月潭尹公墓碣銘幷序
公初諱義立字止中後避改義爲毅號月潭我尹系出坡平諱莘達始顯而爲麗朝開國功臣諱瓘▨▨▨▨▨▨▨▨▨▨▨▨▨ 祖諱廷霖縣監 贈吏曺叅判祖諱希廉縣令 贈吏曺判書 宣廟潛邸師傅考諱國馨工曺判書妣平壤趙氏▨▨▨▨▨▨▨ 戊辰八月己卯生公甲午擢庭試由槐院薦翰苑至待敎選弘文館自正字至應敎春坊自兼說書▨▨▨▨▨▨▨▨▨▨▨▨▨ 令乙巳以校正郎陞通政爲左副承旨戶曺叅議己酉丁判書公憂丙辰陞嘉善爲判決事訓鍊都監提調▨▨▨▨▨▨▨▨▨▨ 仁祖改玉除刑曺禮曺叅判備局有司堂上 仁烈王后山陵都監提調丁丑以扈 駕勞陞嘉義▨▨資▨▨▨▨▨▨▨▨▨▨ 右叅贊奉 命則海運判官 聖節書狀冬至副使舟師御史接毛文龍餞黃監軍外則楊州江華廣州長端▨▨▨▨▨▨▨▨▨ 有去思碑慶尙全羅監司開城留守不赴公淸京畿咸鏡道皆準瓜以癸未九月二十九日卒致賻弔▨▨禮▨▨▨▨▨▨▨▨▨ 積城治南庚申洞壬坐原元配竹山朴氏正文榮女墓在楊州長興達峴辛坐原繼配草溪鄭氏牧使倫女▨▨▨▨▨▨▨▨▨▨ 牧使黃瀡郡守安鋌侍直朴以章縣監李孝承前夫人出男世獻郡守世曼世翊女適監司吳挺塡後夫人▨▨▨▨▨▨▨▨▨▨ 男以乾以復郡守以泰以豊縣監女金洪命金益夏鄭度弘趙遠朋府使世曼娶李茂林女繼子以泰世翊娶南▨智▨▨▨▨▨▨ 李台龍曺廷亮黃生호大司成及筞安鋌生壽星五星弼星朴以章生之顯之碩李孝承生東星府使及東垣吳挺垣生▨▨▨▨ 始大監司始亨判官始績判官以乾子來慶就慶來慶子師奭无後繼子師德生弼漢弼咸以復子錫慶繼子執一繼子弼郁▨▨▨ 以泰繼子就慶子師吉師德師吉子弼沃生永相以豊子振慶子師喆生弼碩餘幼不記公內行純備事親怡愉友兄弟睦親黨出▨ 立于朝誠信篤忠受知 君上孼侄仁發詐死投逆适祹將不測李完卒張玉城力陳不可坐 上從其議非實德素孚殆矣 經筵 陳戰服臨講之非而受華使屛風書之 賜論中使干預軍政斥道臣賂遺宦官而蒙嘉納乎靑布之宜而惠遍西民憾積毛帥患阿 堵辭職彈以欲免送質噫公跡旣危甈重困巧躋不能展布其萬一此實世道之恨也有遺稿二卷藏于家內外世譜溯源也挹薰錄 集近世名人言行也懷恩錄裒甲子後䟽章也山家淸事存物表想也野言通載 國朝典古也昔我六世祖考達村公爲 宣廟朝 藎臣繼以監司公叅贊公同時立朝德業俱著鼎軸之望在公三父子旣而達村公位不稱德監司公嗇於壽叅贊公宜受報施而官 又止於是豈非家之運與時命之舛耶湖洲誌壙東洲銘神道皆信筆也公五世孫弼漢立石表墓小子生晩雖昧於世德敢爲之序 銘曰純粹輝光湖翁飫仁玉栗金剛觀海傅神忠淸謙恭庭訓是遵于以孝德式我後人

旁五世孫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兼經筵叅贊官春秋館修撰官弼秉謹撰幷書
崇禎紀元後三辛亥 月 日建」

※ ▨▨▨▨▨ : 판독 불가 문자임. ※ 호(창 호) : 户↓木

 

 

 

윤의립묘갈

유명조선국자헌대부의정부좌참찬겸지춘추관사월담윤공묘갈명 병서

공의 처음 이름은 의립(義立)이고 자는 지중(
止中)이었는데 후에 의(義)를 피하여 고쳐 의(毅)라고 하였으며, 호는 월담이다. 우리 윤씨의 세계는 파평에서 나왔는데, 신달이 비로소 고려조에 현달하여서 개국공신이 되었다. 윤관 -마멸- 증조할아버지는 윤정림(廷霖)으로 현감을 지냈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는 윤희렴(希廉)으로 현령을 지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선조께서 왕위에 오르기 전의 스승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국형(國馨)으로 공조판서를 지냈다. 부인은 평양조씨 -마멸-
무진년(선조 1, 1568년) 8월 기묘일 생이다. 공은 갑오년(선조 27, 1594년)에 정시에 뽑혀 인하여 괴원에 들어갔다가 한림에 뽑혀 대교에 이르렀다. 홍문관에 뽑혀 정자로부터 응교에 이르렀고, 세자시강원에 나아가 겸설서로부터
-마멸- 령이다. 을사년(선조 38, 1605년)에는 교정랑으로서 통정대부에 올라 우부승지 호조참의가 되었다. 기유년(광해군 1, 1609년)에는 판서공의 상사를 당하였다. 병진년(광해군 8, 1616년)에는 가선대부로 올라 판결사 훈련도감 제조가 되었다. -마멸- 인조께서 옥을 바꾸어 형조, 예조 참판 비국 유사 당상 인렬왕후 산릉도감 제조를 제수하였다. 정축년(인조 15, 1637년)에는 어가를 호종하였다 하여 가의대부 -마멸- 우참찬이 되었다. 명을 받들어 곧 해운판관 성절서장 동지부사 주사 어사로 모문룡(명나라 장군)을 접반하였으며, 황감군을 전별하였다. 외관으로는 즉 양주 , 강화, 광주, 장단 -마멸- 인데, 거사비가 있다. 경상감사, 전라감사, 개성유수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공청, 경기, 함경도에 나아가서는 모두 임기를 다하였다. 계미년(인조 21, 1643년) 9월 29일에 졸하였는데 부조를 다하였다. -마멸- 장지는 적성 경내 남쪽 경신동 북북서쪽을 등진 언덕이다.
원래의 부인은 죽산박씨로 정문영의 딸이며, 묘소는 양주 장흥 달현의 서북서쪽을 등진 언덕에 있다. 두 번째 부인은 초계정씨로 목사 윤의 딸이다.
-마멸- 사위는 목사 황수, 군수 안정, 시직 박이장, 현감 이효승이다. 전 부인이 낳은 세헌은 군수이고, 세만, 세익이 있으며, 딸은 감사 오정전에게 시집갔다. 후 부인 -마멸- 아들로서 이건, 이복은 군수이고, 이태, 이풍은 현감이다. 사위로는 김홍명, 김익하, 정탁홍, 조원붕이 있다. 부사 세만은 이무림의 딸을 부인으로 맞았는데 이태가 양자이다. 세익 -마멸- 이태룡, 조정량이다. 황수의 아들 호는 대사성이고 또 영이 있다. 안정은 수성, 오성, 필성을 낳았고, 박이장은 지현, 지석을 낳았으며, 이효승은 동성을 낳았으니 부사이고, 또 동원이 있다. 오정전은 -마멸- 시대는 감사이고, 시형은 판관, 시적도 판관이다. 이건의 아들은 내경, 취경이고, 내경의 아들은 사석인데 후사가 없고, 양자 사덕은 필한, 필함을 낳았다. 이복의 아들로는 석경과 계자 집일, 계자 필욱 -마멸- 이다. 이태의 양자는 취경이고 그 아들은 사길, 사덕이다. 사길의 아들은 필옥으로 필옥은 영상을 낳았다. 이풍의 아들은 진경이고 진경의 아들은 사철이고 사철은 필석을 낳았다. 나머지는 어려서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내행이 정순하게 갖춰져 부모를 섬김에는 기쁘고 즐겁게 하였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있으며, 친족간에는 화목하였다. 나아가 조정에 있어서는 성신과 두터운 충선으로 군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얼질(
孼侄 : 서조카) 윤인발을 거짓 죽였다 하여 역적 이괄과 이도에게 보내자 장차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이완이 졸하자 장옥성이 힘써 진언하였으나 가라앉힐 수 없었다. 임금이 그 의논을 다르니 진실 된 덕은 바탕과 껍질이 위태롭지 아니하다 하겠다. 경연에서는 전복으로 강에 임하는 그릇됨을 진언하였고 명의 사신이 쓴 병풍을 하사받았다. 중국의 사신이 군정에 간여하는 것을 논하였으며, 관찰사가 환관에게 뇌물을 주는 것을 배척하여서 받아들여졌다. 청포의 값을 바로 세워서 서도의 백성들에게 혜택이 미치게 하였으나 명의 장수 모문룡에게 서운함이 누적되니 근심이 쌓여서 사직하였는데 탄핵되어 인질로 보내지는 것을 면하도록 하였다. 아아! 공의 자취가 이미 위태롭고 깨질 듯하며 두루 괴롭게 되어 배척되었으니 만 가지 중의 하나라도 전포할 수 없었다. 이것이 진실로 세상이 한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유고 2권이 가문의 내외 세보에 실려 있으니 사물의 근원을 구명한 것이고, "읍훈록"은 근세 명인의 언행을 모은 것이다. "회은록"은 갑자년(인조 2, 1624년) 이후의 소장을 모은 것이고, "산가청사"는 만물의 표상을 물은 것이며, "야언통"은 "국조전고"에 실려 있다.
옛날 우리 6대 할아버지인 달촌공이 선조조에 충신이 되었는데, 이어서 감사공, 참찬공이 동시에 조정에 나아가 덕업이 함께 드러났고 정승의 자리에 오르리라는 기대가 공에게 있었으니, 3부자가 이미 이룬 것이다. 달촌공의 지위는 덕에 맞는 것이라 할 수 없고 감사공은 천수를 누리지 못했으며, 참찬공은 마땅히 보답으로 인하여 관직이 이에 그쳤으니, 어찌 가문의 운명과 시명의 상치된 것이 아니겠는가?
호주(湖洲 : 채유후)가 묘지를 쓰고, 동주(東洲 : 李敏求)가 명을 하였으며, 신도비는 모두 믿을 만한 필적이다. 공의 5대손 필한(弼漢)이 비석을 세우고 묘표를 하고 소자 생만이 비록 선대의 덕에 어두우나 감히 서한다.

명에 이르기를,
순수
(純粹)는 휘황하게 빛나 호옹은 어짊을 넓히고,
옥은 단단하고 금은 굳세게 되었으며,
관해(보는 바가 큰 것을 말함)함은 신을 스승으로 삼은 것이었다.
충과 청렴함이 있어 가훈을 따름이 옳아
효덕으로서 이르게 되었으니, 우리 후인들이 본받아 따를 만하다.
방계 5세손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필병이 삼가 글을 짓고 아울러 쓰다.
숭정기원후 세 번째 신해년(정조 15, 1791년) 월 일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