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은 어렸을 때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슬퍼함과 치상하는 것이 모두 예법에 맞았다. 천성적으로 타고난
독실한 효성이 이와 같았다. 상을 마치자 사간에 제배되었다. 그때 마침 공의 효행을 기리고자 하는 의논이 있었다. 공은 극구 사양하고
강하게 저지했다. 그리하여 논의가 비록 사그러들긴 했지만 이름은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사재감(司宰監), 사복시(司僕寺), 사섬시(司贍寺)의
부정(副正), 보덕, 사성(司成)을 거쳐 다시 사간과 집의가 되었으며, 또다시 사복시로 옮겨갔다가 상의원이정(尙衣院二正)이 되었다. 조정에서
공의 명망과 행의라면 경연에서 진강하는 것을 감당할 수 있다는 논의가 있었으므로 특별히 자급을 강등하여 부응교(副應敎)로 삼았다. 곧바로 응교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승정원동부승지로 발탁되었는데, 이윽고 우부승지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일로 인해 좌천되어 군위(軍衛)로
서용(敍用)되었으며 오위장을 겸하였다. 또 예조참의에 제수되었다가 대사간이 되었으며, 다시 상호군(上護軍)으로 강등되었다. 외직으로 나가
충청도감사를 지낸 뒤 들어와 좌부승지가 되었으며, 세 번 옮겨 다닌 다음 도승지에 올랐다. 승정원에 있은 지 모두 해서 3년이었는데, 출납할
때마다 모두 윤허를 받았다. 뜻하지 않은 일에 연루되어 군위(軍衛)로 이직하였다가 곧바로 다시 호조참의가 되었다. 공은 오랫동안 지위가
오르지 않아 여러 해 동안 제자리를 빙빙 돌았다. 그러자 부당하다는 여론이 일어 특별히 2품의 자급이 더해져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기한이 찬
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형조참판으로 옮겼으며, 다시 중추부(中樞府)로 옮겨갔다. 하지사(賀至使)에 보충되어 연경(燕京)에 조하하고
돌아온 다음에는 예조참판에 제수되었다. 경상도(慶尙道)에 처리할 일이 많아 조정에서는 관찰사를 선택하기 어려웠는데, 공이 명을 받아 가서
다스리자 적체된 일이 말끔히 처리되었다. 그곳 사람들이 발을 구르며 칭송하였는데, 지금도 잦아들지 않았다. 돌아와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우윤, 병조참판을 거쳐 마침내 순서를 뛰어넘어 형조판서에 제배되었다. 곤궁한 선비가 소송을 낸 경우가 있으면 공은 맨 먼저 그 원통함을
펴주니 정권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 싫어하여 끝내 얼거리를 잡혀 파직당하고 말았다. 몇 달 뒤 다시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며, 공조판서로 옮겼다가
의정부우참찬, 예조판서 겸 도총관, 지의금부사, 동지성균관사를 역임하였다.
공은 세 번 호조판서를 지냈고, 두 번 이조판서를 지냈는데, 모두 지경연춘추관사를 겸하였다.
숭반(崇班)으로 특진하여 찬성이 되었다가 병조판서로 옮겨갔으며, 다시 우찬성이 되었다. 공은 오랫동안 재상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중종은 여론을 받아들여 공을 발탁하여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 감춘추관에 제배하였다. 5년 뒤 중종이 승하하자 공은 승진하여 좌의정 겸
산릉총호사(左議政兼山陵摠護使)가 되었다. 공이 옛 법을 참작하여 예제를 준수하려고 힘쓰자 사람들이 모두 흡족해 하였다. 인종(仁宗)이 국상
중이라 공이 신정(新政)을 대리하고 보좌하였는데, 조정 안팎에서 모두 의지하였다. 곧바로 영의정 겸 영경연 관각
관상감사(領議政兼領經筵館閣觀象監事)로 승진되어 정사를 바로잡고 보필하는 공로가 더욱 커졌다. 을사년(인종 1, 1545년)에 임금이
병으로 눕자 공은 내의원제조로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입시하여 살폈다. 임금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곧바로 병조를 불러 금군을 꼼짝 못하게 한 뒤,
현재 임금(명종)의 사저에 군위(軍衛)를 보내 직접 가서 맞이하여 당일로 보위를 잇게 하였다. 공은 위사공신(衛社功臣)에 녹훈되고
파평부원군(坡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정미년(명종 2, 1547년)에 공은 나이가 늙었다는 것을 들어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하였다. 임금은
위로하고 머물게 하며 허락하지 않고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이듬해에 재상의 자리가 비자 임금이 누가 좋겠냐고 물었다. 공은
홍언필(洪彥弼)을 천거하였는데, 이로 인해 좌의정으로 내려갔다. 이해 7월에 공이 병이 있다고 고하자 임금은 어의에게 특명을 내려 진맥하고 병을
다스리게 하고 여러 번 내관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그러나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향년 73세였다. 임금이 몹시 슬퍼하고 애도하여 조시(朝市)를
사흘 동안 정지하였으며 부의를 내리고 치제를 융숭히 하였다. 공의 의용이 뛰어났으므로 사람들은 진작부터 재상의 그릇이라는 것을 알았다.
평생 급하게 말하거나 당황한 적이 없었으며, 사람을 상대하거나 아랫사람을 부릴 때는 귀천을 따지지 않고 한결같이 관대하고 온화하였다. 잘하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가상하게 여겼고, 못하는 사람을 보면 불쌍하게 여겼기 때문에 모두의 환심을 샀다. 국가의 정무를 맡아 일을 처리할
때는 대체(大體)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세세한 것까지 밝혀 의혹을 풀어 확고부동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믿고 따르게 되었다. 일찍이
옛사람들의 격언 수십 조목을 추려서 옆에 두고 반성하고 신칙하는 자료로 삼은 일도 있었는데, 아무리 한가하게 집에서 지낼 때라도 반드시 복장을
단정히 하고 똑바로 앉아 흐트러진 모습을 하지 않았다. 일을 처리할 때는 새로 고쳐서 정돈하였으므로 아랫사람이나 어린 사람도 게을리 하지
못하였다. 선조를 추모하고 제사를 지낼 때는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으며, 새벽과 저녁에는 직접 고하여 생전에 모실 때와 똑같이
하였다. 위아래의 촉망이 한창 무성한 때에 갑자기 하늘이 빼앗아갔으니 통탄스럽다. 공의 첫 번째 부인은 현감 김지수(金之壽)의
딸이고 두 번째 부인은 종실 진안부정(鎭安副正) 이영남(李永男)의 딸이다. 모두 후사가 없어 종형 윤인복(尹仁復)의 아들 윤현(尹俔)을 후사로
삼았다. 윤현은 무과에 급제하여 자급이 쌓여 절충(折衝)에 이르렀으며 외직으로 인산절제사(麟山節制使)에 보임되었다. 공보다 먼저 사망하였다.
측실에서 아들 하나를 얻었는데 이름은 윤억(尹億)이고 겸사복(兼司僕)에 속해 있다가 상호군이 되었다. 윤현은 증 병조참의
이양필(李良弼)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4남을 두었다. 첫째 아들 윤사철(尹思哲)은 교동현감(喬桐縣監)이고, 둘째 아들 윤사민(尹思敏)은
사산감역(四山監役)이며, 셋째 아들 윤사신(尹思愼)은 선공부봉사(繕工副奉事)이고, 넷째 아들은 윤사흠(尹思欽)이다. 공의 선영은 양주
송산리(楊州松山里)에 있다. 공은 일찍이 그 옆 을좌신향(乙坐辛向 : 동남향)의 언덕에 묏자리를 잡아놓았으므로 이때 이곳에 하관하였다.
가정(嘉靖) 27년(명종 3, 1548년) 9월 25일의 일이었다. 나(정사룡(鄭士龍))는 공과는 연배가 다르지만 가장 깊이
알아주었으므로 윤사철이 묘명(墓銘)의 일로 와서 부탁하였다.
명(銘)하기를, 물건은 예리하면 피하고 이름은 빨리 나면 터덕거리지 정말로 실질이 있으면
비록 멀더라도 반드시 이른다네. 공은 처음엔 어려웠으나 실질이 있어 나중에 발했고 붓 잡는 데서 그르쳤으나 외직에 나가
떨쳤으며, 낭관을 지내고 고을을 맡아 명성은 더욱 빛났네. 행의로 몸을 장식하고 하늘이 준 덕행도 갖춰서 사헌부에 나가고 진강도
하니 다투어 천거하여 마침내 현달한 자리에 올라 의표로서 행세했네. 방백 되어 정사를 보고하고 육조의 업무도 맡아 공훈이 모두
드러나니 임금의 은혜 감돌았고 중망에 부합하여 삼공으로 백관을 지휘했네. 화합하여 국난 헤치고 위태한 상황 타개하여 녹훈하고
봉작하여 부지런한 보필에 보답하니 누가 이름을 견주고 누가 이보다 평탄할까? 씨 뿌리지 않은 것은 수확하자마자 떨어지는데 내
이미 실질을 거두어 마음 다발에 실었으니 순풍에 돛단배요 낯익은 길 달리는 천리마네. 스스로 다하여 도달했으니 누가
넘어뜨릴쏜가? 울창한 저 송산이여, 거북점 일찍이 얻었으니 내, 묘지명을 묻어 공의 덕행 분명히 하노라
무덤으로 가는
길에 귀부(龜趺)만 있고 이수(螭首)는 없었다. 선친(윤리(尹理))이 전에 홍주(洪州)를 다스리고 있을 때 돌을 캐가지고 와서
족형(族兄) 윤상기(尹商耆)와 함께 의논하여 장차 이것을 가지고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지은 묘지명을 새겨 세우기로 하였다. 그러나
가세가 넉넉하지 않아 품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저희들이 선친의 뜻을 잇지 못하여 끝내 현각(顯刻)이 없게 될까 적이 걱정되어 마침내 재물을
모으고 돌을 끌어올려 예전의 귀부 위에 세웠다.
이 글은 본래 묘지(墓誌)인데 이번에 신도비명(神道碑銘)으로 고쳐서 그대로 썼다. 내가 묻은 묘지명 중 "증시(贈諡)" 한
구절은 사실 글이 완성된 후에 있은 일이라 앞줄에 첨가해 써넣었다. 증손과 현손 이하의 자손은 매우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하고 다만 각 계파
중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이 있는 사람만 아래쪽에 기록했다. 윤사철(尹思哲)은 관직이 현령에 이르렀고, 윤사민(尹思敏)은 관직이 감역까지
올랐으며, 윤사신(尹思愼)은 관직이 판관까지 올랐고, 고조부인 윤사흠(尹思欽)은 수사(水使)를 지냈다. 주부(主簿) 윤보형(尹保衡), 생원
윤의형(尹義衡), 세마(洗馬) 윤선(尹瑄), 참봉 윤관주(尹觀周)는 현령공파이고, 봉사(奉事) 윤황(尹滉), 선전관 윤찬(尹巑), 호군
윤린(尹嶙)은 감역공파이며, 진사 윤석형(尹碩衡)은 판관공파이다. 증조부 윤영(尹泳)은 현령을 지내고 승지에 증직되었고, 윤희선(尹熙善)은
선전관을 지냈으며, 조부 윤지선(尹止善)은 참판에 증직되었고, 윤숙(尹璹)은 진사이고, 부친 윤리(尹理)는 부윤을 지내고 참판과 홍문관제학에
증직되었다. 윤상래(尹商來)는 판관이고, 윤정래(尹鼎來)는 진사이며, 윤창래(尹昌來)는 첨정이고, 윤석래(尹錫來)는 참판이며, 윤익래(尹益來)는
진사이고, 윤양래(尹陽來)는 참판이며, 윤승래(尹升來)는 봉사이고, 윤기언(尹紀彦)은 생원이며, 윤명언(尹明彦)은 참봉이고 윤충언(尹忠彦)은
도사인데, 수사부군(水使府君)파이다.
6대손 사도시첨정(司도寺僉正) 윤창래(尹昌來) 기록. ※ 도 : 道↓禾 숭정 갑신후 90년 계축년(영조 9,
1733년) 9월 일 세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