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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윤임 신도비문(尹任 神道碑文)

물텀벙 2015. 3. 14. 07:49

28. 윤임 신도비문(尹任 神道碑文)

 

 

1606년(선조 39)에 세워진 윤임(尹任)의 묘비이다. 조선 중기 문인으로 명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간이(簡易) 최립(崔岦)이 글을 짓고, 서자는 김현성(金玄成)이며 제액(題額)은 김상용(金尙容)이 전서(篆書)로 썼다.
윤임(1487~1545)의 자는 임지(任之), 시호는 충의(忠義)이다. 중종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오빠로 대윤(大尹)의 거두였다.

무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경주부윤에 올랐다. 대윤의 거두이며,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경원대군(慶源大君:명종)을 낳자, 김안로(金安老)와 함께 세자 보호를 둘러싸고 문정왕후와 알력이 생겼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가 실각하고 윤원형(尹元衡)이 집권하면서 세력다툼이 심하여졌다. 1543년부터 그를 대윤, 윤원형을 소윤이라 불렀다. 1545년 소윤은 을사사화를 일으켜 정적인 대윤 일파를 숙청하였는데, 이때 아들 3형제와 함께 사사(賜死)되었으며, 1577년(선조 10) 신원되었다.
묘비의 초반부는 윤임의 가계에 대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그 뒤로 윤임의 관직생활에 대한 서술이 간략히 있고, 중반부에는 윤임과 윤원형의 대립에 대한 서술이 이어진다. 이어서 윤임의 효성에 대한 서술이 있으며 윤임의 부인과 자식들에 대한 서술이 있다.

후반부에는 명(銘)이 있으며, 윤증(尹拯)에 대한 간략한 서술이 추가되어 있다.

 

 

 

贈領議政尹公神道碑銘

有明朝鮮國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五衛都摠府都摠管尹公神道碑銘竝序
公諱任字任之其先尹莘達坡平縣人事高麗太祖冊三韓功臣有曰瓘平女眞立大功官至太保門下侍中上柱國自是世益顯高祖諱璠爲貞熹王后考由判中樞府事封坡平府院君 贈領議

政府事曾祖諱士昀靖難佐翼功臣判工曹事寶文館大提學鈴平君祖諱甫工曹參判贈領議政坡陵府院君考諱汝弼靖國功臣領敦寧府事坡原府院君妣順天府夫人朴氏敵愾定難翊戴功
臣判敦寧府事平陽君 贈領議政仲善之女寔生 章敬王后而公則其丈夫子也生於正德丁未狀貌峻嚴有器宇用門蔭授宣傳官中壬申武科遷都摠府都事司僕寺僉正正加通政慶源府使 中宗大王悶其獨子遠違坡原 命毋行歷忠淸道水使兵使南陽府使兵曹參議承政院承旨進嘉善兵曹參判資憲兵曹戶曹刑曹工曹判書議政府參贊崇政議政府贊成判敦寧府事于時 中廟在位 仁廟貳極姦兇尹元衡兄弟自以肺附門戶異陰懷禍心計間 兩宮大小尹之說頗
行公自處坦敞殊不▨掛念乙巳仁廟諒闇疾大漸未有儲嗣中外洶懼曁昇昇遐之日公承末命以兄亡弟及之義首言於朝人心始定事幾無毫髮疑而彼之宿隱終▨構成叵測以不自安三字陷公竄之南海行至忠州有後 命是歲八月三十日也年五十九自後益煽大獄何所不至非唯公家聯及拜與腹是非者半朝名人殆翦焉矣幸 明廟自奉 垂簾之政已邁漢昭之辨姦及旣春秋鼎盛則直枉之擧端序則見於是有丁卯之釋公子孫錮籍至聖上洞察輿情 快從廷論 改更
之難 繼述之究要以當於天理人心於是有庚午之群兇伏罪而復公二子職名還籍沒家産丑之僞勳鐫削而復公官爵至錄用見在子三人蓋次第施而無遺憾矣公天性至孝傷先夫人早卒卽所居設位筵一如生時朔望時食必躬薦不以疾故解刑家有則妾媵雖多絶無嬌妒之色服用儉約痛惡踰僭以帥家人子姓左右琴書如文人學士之居遇儒冠必折己下之仁恤寒族其來如歸爲官無不擧職判四曹及京兆題覆必皆手槀郞僚不能贊一辭史不敢仰視人亦毋得干以私太理之獄無寃滯度支之防奸革弊至今稱道之或爲成法云公前夫人驪興李氏僉樞俌女生三男二女男曰興仁武科正郞曰興義生員曰興禮監役女長適及第李德應次適李洪胤後夫人玄風郭氏 贈參判翰女生三男曰興智縣監曰興信武科郡守 贈兵曹參議曰興忠郡守側出二男一女興孝興悌及僉使金賢良妾興仁娶判官安世亨女有男瓊次琥武科僉知次발及女沈光寶監察林應祐等其壻也興義娶府使韓顯女有女武科判官李見龍顯監具思閔等其壻也興禮娶縣監梁允溫女無後李德應有男光坤參奉次光埏及女監役柳伯善壻也李洪胤有女河萬澤壻也興智娶萬戶朴世弘女有女進士洪慄壻也及妾男璹女林篁妻興信娶別坐申孝誠女有女僉正韓守謙壻也興忠娶永原監義壽女無後瓊娶明松守芸女有女恒山守楨壻也及妾男承男琥娶唐城尉洪礪女有男廷彦及女金景祿朴元緖奉事尹翊虞候李仁男監察申景祉等壻也발娶生員柳璜女有男廷顯廷秀沈光寶有男鍈參奉鐸武科鏐錪林應祐有男澄具思閔有男女幼李光埏有男馨遠文科正郞女昌平縣令鄭▨女幼河萬澤有男沃前夫人以嘉靖戊子卒而命年二月卜葬于高陽南面香洞巽坐乾向之原丙午以公之喪歸就而同葬後夫人萬歷己丑
卒于瑞山郡子興信治所後於公卒四十四年年七十二是歲八月葬用同洞別壟午坐子向庚寅十月復以公及前夫人遷而就之公居中而夫人左右焉銘曰 由武發名乃文以吏 孰曰貴戚而都幸位 人或疑公權不知避 罪患無辭奈何乎彼方其成獄禍豈在家 亦旣復爵國與有嘉 經紀丘原尙多子孫公其不昧以恩塞寃後以公男 贈兵曹參議興信實有壬辰死戰之烈錄宣武原從功臣一等加 贈曺參判用得 推恩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觀象監事碑事屬完未及載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崔岦撰
折衝將軍行忠武衛司正金玄成書
通政大夫行尙州牧使金尙容篆
萬歷三十四年 八月 日 立

 

 

증 영의정(贈領議政) 윤공(尹公) 신도비명

유명조선국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오위도총부도총관윤공신도비명서문을 아울러 쓰다.
공의 이름은 임(任)이고 자(字)는 임지(任之)이다. 그 선조 윤신달(尹莘達)은 파평현(坡平縣) 사람이다. 고려 태조를 섬겨 삼한공신(三韓功臣)에 책봉되었다. 관(瓘)은 큰 공을 세워 관직이 태보문하시중(太保門下侍中) 상주국(上柱國)에 올랐다. 이때부터 인물이 더욱 현달하였다. 고조 번(璠)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거쳐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에 책봉되었으며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이름이 사윤(士昀)으로 정난좌익공신(靖難佐翼功臣) 판공조사보문관 대제학(判工曹事寶文館大提學)을 지냈으며 영평군(鈴平君)이다. 조부는 이름이 보(甫)로 공조참판이며 증 영의정 파릉부원군(坡陵府院君)이다. 부친은 이름이 여필(汝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영돈녕부사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이다. 모친은 순천부부인(順天府夫人) 박씨(朴氏)로 적개정난익대공신(敵愾定難翊戴功臣)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평양군(平陽君) 증 영의정 중선(仲善)의 따님이다. 이분이 장경왕후(章敬王后)를 낳았으며 공은 그 큰아들이다.
정미년(1487, 성종 18) 가을에 출생하였다. 모습이 준엄하고 기국이 쓸 만하였다

문음(門蔭)으로 선전관에 제수되었다. 임신년(1512, 중종 7)에 무과에 급제하여 도총부사(都摠府事),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에 제수되었다. 통정대부로 품계가 올랐으며 경원부사(慶源府使)를 역임했다. 충청도수사(忠淸道水使)와 병사(兵使), 남양부사(南陽府使), 병조참의, 승정원승지를 역임하였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올랐으며 병조참판을 역임했다.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올랐으며 병조와 호조, 형조, 공조의 판서를 역임하였고 의정부참찬, 숭정대부 의정부찬성 판돈녕부사를 역임했다.
이때 중종이 재위(在位)에 있고 인종(仁宗)이 세자로 있었는데 간흉(姦兇) 윤원형(尹元衡) 형제가 궁중을 출입하며 계략을 꾸며 음해(陰害)함에 양궁(兩宮)의 친족이 대윤(大尹), 소윤(小尹)이라는 말이 파다하였다. 그러나 공은 평탄하고 넉넉하게 자처하며 개념치 않았다. 을사년(1545, 인종 1) 인종이 양암[諒闇 :임금이 부모의 상중(喪中)에 있을 때 거처하는 방. 또는 그렇게 거처하는 기간] 중에 병이 들어 점점 심해졌는데 저사(儲嗣)가 없어 중외가 모두 불안하고 두렵게 여겼다. 마침내 인종이 승하하자 공은, 형이 죽으면 아우가 대신한다는 의리를 받들어 맨 먼저 조정에 아뢰니 인심이 비로소 일이 정해져서 털끝만큼의 의심도 없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저들(윤원형 형제를 가리킴)의 사특(邪慝)함이 끝내 음모를 꾸며 ‘불자안(不自安 : 저절로 편안하지 못하다)’이란 세 글자로 공을 모함하여 남해(南海)로 유배하고 말았다. 유배가는 행차가 충주(忠州)에 이르렀을 때 임금의 후명(後命)이 이르러 이해 8월 30일에 세상을 뜨고 말았으니 향년이 59세였다.
이후에 대옥(大獄)이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어 비단 공가(公家)만 연루된 것이 아니라 시비를 가리던 조정의 명사들의 태반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다행히 명종은 수렴청정을 스스로 받들기로 하였으나 한(漢)나라 소열왕(昭烈王)의 사례를 따르고 말았다. 정묘년(1567, 명종 승하년)의 사면(赦免)으로 공의 자손이 해금되었으니, 성주(聖主)가 여론을 통찰하여 흔쾌히 조정의 의론을 따른 것으로 역사를 개서(改書)하는 난점과 계술(繼述)의 요점은 천리(天理)와 인심에 합당해야 한다는 데 있는 것이다. 이에 경오년(1570, 선조 3)에 군흉(群兇)이 복죄(伏罪)되었고, 공과 두 아들의 직명은 회복되고 적몰된 가산을 돌려받았다. 정축년(1517, 중종 12)의 위훈(僞勳)은 직명이 박탈되었고, 공의 관작(官爵)과 녹용(錄用)은 회복되고 아들 셋도 차례로 신원되었으니 유감이 없다 하겠다.
공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선부인께서 일찍 돌아가신 것을 마음 아프게 여겨서, 거처하는 곳에 위연(位筵)을 설치하고 생시와 마찬가지로 모셨는데, 초하루와 보름에는 손수 제철 음식을 올렸으며 병이 들었어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어 처첩이 비록 많았지만 교태를 부리거나 투기하는 여인이 없었으며 옷차림은 검소하고 악을 미워하고 선을 선양하는 것으로 집안을 이끌었으며 좌우에 거문고와 책을 두어 마치 문인 학사의 거처 같았다. 선비들을 대우함에 반드시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였으며 한미한 친족을 인(仁)으로 보살폈다. 관직생활을 함에 거치지 않은 직책이 없었는데, 사조(四曹)의 판서와 경조(京兆)에서 근무할 때 문서는 반드시 손수 초고를 작성하였으며 낭료(郎僚)는 감히 한 마디도 보탤 수가 없었으니 사관(史官)도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고 사람들도 역시 사사로운 것으로 간여할 수 없었다. 태리(太理)의 옥사(獄事)을 처리함에 원통해하거나 지체된 경우가 없었고 도지(度支)를 맡았을 때에는 간사한 아전의 폐단을 혁파하였으니 지금까지도 그 도(道)를 칭송하고 혹자는 법도를 만들어 냈다고까지 말하는 것이다.
공의 전부인(前夫人)은 여흥이씨(驪興李氏)인데 첨지중추 보(俌)의 따님으로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흥인(興仁)인데 무과에 입격해 정랑(正郞)을 지냈으며 차남 흥의(興義)는 생원을 지냈고 삼남 흥례(興禮)는 감역(監役)이다. 장녀는 급제(及第) 이덕응(李德應)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이홍윤(李洪胤)에게 시집갔다. 후부인(後夫人)은 현풍곽씨(玄風郭氏)로 증 참판 한(翰)의 따님으로 아들 셋을 낳았다. 흥지(興智)는 현감이며 흥신(興信)은 무과에 급제하여 군수로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으며, 흥충(興忠)은 군수이다. 측실(側室)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흥효(興孝)와 흥제(興悌)이며 사위는 첨사(僉使) 김현(金賢)이다. 양첩(良妾)을 두었다. 흥인(興仁)은 판관 안세형(安世亨)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큰아들은 경(瓊)이며 차남 호(琥)는 무과에 급제하여 첨지이며 삼남은 발이다. 감찰 심광보(沈光寶)와 임응우(林應祐) 등이 그 사위이다. 흥의(興義)는 부사 한현(韓顯)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딸을 두었는데 무과에 급제한 판관 이견룡(李見龍), 현감 구사민(具思閔) 등이 그 사위이다. 흥례(興禮)는 현감 양윤온(梁允溫)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후사가 없다.
이덕응(李德應)의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은 광곤(光坤)으로 참봉이며 차남은 광연(光埏)이다. 딸은 감역(監役) 유백선(柳伯善)에게 시집갔다. 이홍윤(李洪胤)의 사위는 하만택(河萬澤)이다. 흥지(興智)는 만호(萬戶) 박세홍(朴世弘)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진사 홍률(洪慄)이 그 사위이다. 첩의 아들 숙(璹)이고 딸은 임황(林篁)의 첩이다. 흥신(興信)은 별좌(別坐) 신효성(申孝誠)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는데 첨정(僉正) 한수겸(韓守謙)이 그 사위이다. 흥충(興忠)은 영원감(永原監) 의수(義壽)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후사가 없다. 경(瓊)은 명송수(明松守) 운(芸)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딸을 두었는데 항산수(恒山守) 정(楨)이 그 사위이다. 첩의 아들은 승(承)이다. 호(琥)는 당성위(唐城尉) 홍려(洪礪)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은 정언(廷彦)이며 김경조(金景祚), 박광서(朴光緖), 봉사(奉事) 윤익(尹翊), 우후(虞候) 이인남(李仁男), 감찰 신경지(申景祉) 등이 사위이다. 발(玉+發)은 생원 유황(柳璜)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정현(廷顯)과 정수(廷秀)를 두었다. 심광보(沈光寶)의 아들은 넷인데 영(鍈)은 참봉이고 탁(鐸)은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규(鏐)와 전(錪)이다. 임응우(林應祐)의 아들은 징(澄)이고 구사민(具思閔)의 아들딸은 어리다. 이광연(李光埏)은 아들은 형원(馨遠)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이며 딸은 창평현령(昌平縣令) 정○(鄭○)에게 시집가서 딸을 두었는데 어리다. 하만택(河萬澤)의 아들은 옥(沃)이다.
전부인은 가정(嘉靖) 무자년(1528, 중종 23)에 세상을 떠서 이듬해 2월 10일에 고양군(高陽郡) 남면(南面) 향동(香洞)의 손좌건향(巽坐乾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가 병오년(1546, 명종1)에 공이 세상을 뜨자 공과 함께 합장하였다. 후부인은 만력(萬歷) 기축년(1589, 선조 22)에 아들 흥신(興信)의 치소(治所)인 서산군(瑞山郡)에서 세상을 떴는데 공이 돌아가신 지 44년 되던 해로 향년 72세였다. 이해 8월에 같은 동리의 다른 묘역인 오좌자향(午坐子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가 경인년(1590) 10월에 공과 전부인의 묘를 천장(遷葬)하면서 공은 가운데에 묻고 부인은 좌우로 묻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무(武)로써 이름 날려 문(文)으로써 관리 됐네
귀척으로 혁위했다 뉘라 말하런가
사람들 의심하고 화를 우선 피할 줄 몰라
죄에 걸렸어도 말없으니 저를 어이할까
옥사 이뤘으니 어찌 집안의 화만일까
관작 회복되고 신원되었으니
세월 흘러 자손은 번창하고
공은 어둡지 않아 은혜로 원망 막았네

뒷날 공의 아들 증 병조참의 흥신(興信)이 실로 임진란에 전사하여 선무원종공신 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으로 녹훈되고 증 병조 참의로 추증되었으므로, 공에게 추은(推恩)하여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관상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觀象監事)에 추증하였다. 비석은 여러 차례 개수하였으니 그 전말은 미처 기록하지 못하였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최립(崔岦)이 글을 짓다.
절충장군 행 충무위(折衝將軍行忠武衛) 사정(司正) 김현성(金玄成)이 글씨를 쓰다.
통정대부 행 상주목사(通政大夫行尙州牧使) 김상용(金尙容)이 전서(篆書)를 쓰다. 만력 34년(1606, 선조 39) 8월 일 비석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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