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 인물/昭靖公派

소 128.

물텀벙 2010. 9. 4.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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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 독립운동가. 호 성재(省齋). 1895년 10월 일본인들에게 명성황후(민비)가 시해되자 여러 차례 복수토역소(復讐討逆疏)를 올렸으며, 고종의 밀령을 받아 명성황후 시해의 진상을 조사·보고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정부 내의 친일분자를 숙청하기 위해 임최수(林最洙), 이도철(李道徹) 등과 거사하려다 실패하여 고군산도로 유배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허위(許蔿), 송수만(宋秀晩)과 연명하여 국가의 위급을 호소하는 격문을 전국에 돌렸다.

 1907년 서울에서 동우회를 조직해 황실존중, 동양평화, 청년교육의 3가지 강령을 천명하고, 그 실천을 위한 첫 단계로 일진회에 대한 성토문을 발표했다. 같은 해 7월 일제가 헤이그 밀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차관통치를 실시하려 하자 양위반대시위운동을 전개하고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했다. 이 운동으로 전라남도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가 1910년 풀려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 적선동에서 한남주(韓南珠), 이용규(李容珪), 어대선(魚大善), 전협(全協), 이규갑(李奎甲) 등과 회합해 국민대회의 이름으로 회의를 열고 대동단(大同團)을 조직할 것과 보부상을 편성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할 것, 손진형(孫晉衡), 한남주, 이규갑 등을 상해 임시정부에 파견할 것 등을 결의했다. 이어 한성정부안(漢城政府案)에 의거해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을 선전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았다.

 옥중에서 병을 얻어 1921년 7월 병보석된 직후 죽었다.

 저서로 〈성재유고〉가 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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