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조선국자헌대부 행 예조판서 겸 지 경연의금춘추관 홍문관대제학오위도총부도총관 증시효정윤공휘돈묘
정경부인전부이씨부좌 9대조이신 찬성공의 묘소가 광주 월천에 계시는데 두 아들이 이어서 그 곳에 장사지내졌다. 맏아들은 이름이 엽으로
교리를 지내고 도승지에 추증되셨으며, 공은 그 막내이셨다. 공을 장사지낸 지 250년만에 8대손인 상현이 비로소 돌에 새겨서 묘소를 표시하고
나서 정현이 승지공의 후손이라 하여 그 비석 뒤에 새길 글을 짓게 한다. 공은 이름은 돈, 자는 여승, 호는 죽창이시다. 윤씨는 본관이
파평이고, 시조는 고려조에서 태사를 지내고 이름이 신달이란 분이시다. 이름이 위란 분에 이르러서는 남원백에 봉해지니, 자손들이 본관을 남원으로
옮겼다. 남원백은 이름이 극민이란 분을 낳으시니, 수문전태학사를 지내고 시호는 문평이시며, 문평공은 이름이 돈이란 분을 낳으시니, 시중을
지냈고, 시중공은 이름이 영찬이란 분을 낳으시니, 예조전서를 지냈고, 전서공은 이름이 수균이란 분을 낳으시니, 문하평리에 추증되셨고, 평리공은
이름이 황이란 분을 낳으시니, 공조전서를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니 절개를 굽히지 않고 끝까지 지키고 시호는 충간이셨다. 그리고 충간공은
이름이 임이란 분을 낳으시니, 본조에 들어와서 관찰사를 지내고 청백리에 뽑히셨고, 관찰사공은 이름이 지득이란 분을 낳으시니, 선공봉사를
지내셨고, 봉사공은 이름이 은이란 분을 낳으시니, 군자판관을 지내고 좌승지 추증되셨고, 승지공은 이름이 시영이란 분을 낳으시니, 의정부사인으로
계시던 중 심정의 비위를 거슬러서 광주목사로 전임되셨다가 그 곳에서 작고하셨다. 사인공은 이름이 징이란 분을 낳으시니, 영의정에
추증되셨고, 영의정공은 이름이 극신이란 분을 낳으시니, 응교를 지내고 뒤에 공이 귀하게 된 덕분으로 좌찬성에 추증되셨으며, 고성남씨에게
장가들었으니, 그는 교관을 지낸 견손의 딸로서 정경부인에 추증되셨는데, 바로 공의 부모이시다. 만력 기묘년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셨고, 을유년에 명경과에 급제한 다음, 추천으로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이 되었다가 홍문관정자로 옮기셨으니, 참외에서는 최상으로 선발되신
것이다. 명성이 날로 높아져서 앞으로 나아갈 길이 크게 열렸기 때문에 수찬 · 교리 · 응교 · 전한 · 직제학 등을 역임하셨다. 옥당에 계실
적에는 밤에도 반드시 공복을 입고 책을 읽으셨는데, 책 읽는 소리가 침전에 들렸으므로 임금은 공을 불러들여 강론을 하고서 술도 하사하고 책도
하사하였다. 이 때에 인재들이 조정에 그들먹하였는데, 융숭한 예우를 받는 일은 공을 능가하는 자가 없었다. 공은 연달아서 사간원의 헌납, 사간과
시강원의 필선과 의정부의 검상, 사인, 이조의 좌랑, 정랑에 임명되셨다. 무술년(선조 31, 1598년) 순천에서 왜병과 싸울 때에 공은
접반종사로서 군량 운반을 감독하셨는데, 유도독의 독촉은 날로 심한데다 여러 해 동안 병란을 겪은 터라 저장 물품이 다 떨어졌건만, 공은 계획을
치밀하게 세워서 군사를 원조하였기 때문에 군수물자가 부족하게 되는 일이 없었다. 전쟁이 이미 끝난 뒤에는 통정대부에 올라 대사간과 이조, 병조의
참의와 부제학에 임명되셨다. 기해년에는 강원도 관찰사를 제수 받고 모부인을 춘천의 장사에 모셨고, 춘천부사인 모당 홍공도 자당을 모시고
있었는데, 두 부인은 생일이 같은 달이었기 때문에 서로 잔치를 베풀어서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렸다. 공은 다시 나이 높은 편모를 모시고 있는
벼슬아치들 10여 명과 함께 경주계를 조직해서 합동으로 잔치를 베풀어 헌수를 하였는데, 임금은 풍악을 하사하고 잔치에 드는 비용을 도와주었으며,
여러 관아에서는 낮 근무를 중단하고 잔치자리로 달려갔으니, 사람들은 ‘효성이 하늘을 감격시켰다.’고 하였다. 신축년에는 도승지, 이조와
병조의 참판, 사헌부대사헌으로 뽑혔고, 갑진년에는 진급을 하여 공조참판이 되셨으며, 을사년에는 청중도관찰사로 나가셨는데, 이 때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가서 부드러운 얼굴과 조용한 목소리로써 어머니를 즐겁게 봉양하되, 음식을 대접할 적에는 반드시 먼저 맛을 보고 나서 올리셨다. 그리고
족속을 위문하고 구제하는 데 있어서는 친함과 소원함에 간격을 두지 않으셨다. 무신년(선조 38, 1608년) 6월에는 선조 임금이
승하하자, 공은 산릉도감제조란 직책을 맡으셨는데, 장례의식과 산릉봉토 등에 관한 일을 잘 주선한 공로로 종 1품에 올라 행 예조판서를 지내셨다.
그런데 이미 산릉의 봉토가 끝났을 때 큰 장마비가 내려서 산등위가 손상되었기 때문에 관직이 파면되고 자급이 강등되셨다. 기유년 겨울에는 남씨
부인의 상을 당하셨는데, 조석으로 전을 올릴 때에 너무나 서러워하시다가 그만 병을 얻으셨다. 일송 심상국은 행여 공이 슬픔을 감당하지 못할까
싶어서 당부하는 말을 시사에다 발표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임자년 2월에 겨우 복을 벗고, 3월 1일 서울 집에서 고종명을 하셨으니,
향년 62세였고, 추증된 시호는 효정이었다. 배위이신 정부인 완산 이씨는 의흥수인 수린의 따님이시자, 태종 임금의 왕자인 희령군 이타의
현손이신데, 단아하고 인자하면서 예법을 지키셨고, 비록 귀현하신 몸이었지만, 오히려 몸소 길쌈을 하셨다. 향년 79세로서 숭정 신미년에
작고하시니, 공의 무덤 왼쪽에 부장하였다. 2남 5녀를 낳으셨으니, 맏아들 형준은 사산감역이 되셨는데, 혼조에서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의논을 드리기를 “직책이 사산을 살피는 일에 있으므로 단지 소나무와 잣나무의 자라는 것만을 알 뿐입니다.”라고 하고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인조 임금이 왕위에 오르자, 곧 공에게 찰방을 제수하였는데, 나가지 않으셨다. 둘째 아들 형철은 좌랑을 지내고 집의에 추증되셨으며,
사위는 감사를 지낸 홍득일, 참판을 지낸 오정, 참의를 지낸 윤선도, 황흡, 이희안이다. 형준의 후계자는 벌이고, 두 여서는 이영진, 오굉이다.
형철의 아들은 지인데 찰방을 지내고 집의에 추증되셨으며, 여서는 김이용이다. 증손은 남자가 7명, 여자가 6명이고, 현손은 남자가 16명,
여자가 7명이었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을 가진데다가 풍도가 수려하고 명랑하셨다. 일찍이 유술에 뜻을 두어 기고봉과 조월전을
종유하고, 퇴계 이문순공에게 수업하셨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신중하게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셨다. 더욱이 예학을 전문으로 하셨기 때문에 공사간에
절문에 의문점이 있을 경우는 대부분 공에게 질정하셨다. 또한 식감에 있어서도 정확하셨다. 매번 ‘무엇은 이러이러하고 무엇은 저러저러하다.’고
하시면 뒤에 과연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화려한 관직을 두루 거쳤으나 더욱 청렴한 마음을 가다듬었기 때문에 집은 사면의 벽만 덩그렇고 아무것도
없었지만, 태연한 모습이셨다. 선조대왕의 왕성한 시대를 당하여 공은 부형의 뒤를 이어서 조정을 출입하셨고, 중부 정헌공과 종제 문열공이
아울러 조정에 배열되셨으니, 한 집안 다섯 분의 맑은 이름이 세상에 흘러 넘쳤다. 그런데 후손이 쇠약하고 문헌이 유실되어 아름다운 행실과 위대한
업적이 많이 없어져 전하지 않는다. 오직 공의 친구로서 이한음 , 이월사, 정수몽, 오만취와 같은 제공이 공이 작고하신 뒤에 공의 깊은 학문과
통달한 식견으로 청렴하면서 절제함이 있고 용모와 기상이 화락하고 단아하면서 온후하여 그 아름다운 거동과 착한 명망이 집에 있어서는 효자요,
나라를 위해서는 충신이 된 것을 가지고 추장하고 통석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백세에 정신할 만한 것이다. 종 8대손 보국숭록대부 행
판돈녕부사 겸 이조판서 판의금부사 경연일강관원임 규장각제학 치사 봉조하 정현은 글을 짓고, 후학 권시현은 글을 씀. 숭정기원후 네
번째 신유년(철종 12, 1861년) 월 일에 비석을 세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