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숙공 윤관묘비
고려수태보 문하시중 영평백 문숙 윤공 휘
관의 묘
우리 선조이신 고려 태보를 지낸 시호가 문숙공인 분은 휘가 관, 자가 동현이며 관향은 파평이다. 공이 삼한을 뒤덮고 그
명성은 백대에 펼쳐져 있다. 의당 그 묘소에 비석을 세워 후손들로 하여금 그 향을 올리고 그 앞을 지나는 자은 공경히 인사하게 하는 것이 천도와
이치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세대가 점점 멀어져가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묘소가 침범당하고 옛날 무덤자리를 살피지 못했기에, 우리
종친들이 그것을 통탄스럽게 여겨서 몇백년 사적을 들추어 보기를 하루 아침 일처럼 하였다. 이제 21대손 면교가 여러 종친들과 방편을
세워서 묘소를 찾아 다시 봉축하고 종족의 근본을 추모하게 되었으며 비로소 만방에 표하였으니, 진실로 우리 후손들에게 이보다 더 큰 경사가
없으리라. 아아! 이 어찌 우리 선조들의 밝고 밝으신 영령이 어둡지 않아 가만히 후손을 일깨워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리요. 공의
고조부의 휘는 신달이니 고려 태조를 도와 이 나라를 통일하였으므로 벽상공신에 봉해졌고, 벼슬은 태사에 이르렀으니, 우리 윤씨의
시조이시다. 증조부의 휘는 선지로 또한 벽상공신이었으며, 할아버지의 휘는 금강으로 상서좌복야를 지냈다. 아버지의 휘는 집형으로 검교소감을
지내고 우복야로 추증되었으며 문정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공께서는 일찍이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현달하여 여러 번 자리를 옮겨 이부상서 한림학사
승지에 이르렀다. 고려 숙종 10년(1105년)에 참지정사 판한림원사 태학사가 되었는데, 당시는 여진족이 북방을 괴롭혀온 지 오래였다.
예종 초에 오랑캐가 정주를 침략하여 그 형세가 매우 심각하였다. 이에 공을 도원수로 삼고, 오정총을 부원수로 삼아 부월을 주어 보냈다. 공이
마침내 군대를 거느리고 북으로 행군하여 적진에 들어가 적을 크게 무찌르고, 또 금성에 이르러 격파하고, 석성에 당도하니 적들이 모두 성안으로
들어가 성문을 굳게 닫고 대적하지 않아 적을 격파할 수 없었다. 공이 장수들을 격려하고 협공을 하여 크게 무찔렀다. 하루도 못되어 두 성을
항복시키고 또 모든 장수들에게 부절을 주어 길을 나누어 적을 공략하여 적 6천여 명을 사로잡거나 죽였다. 그리하여 모든 군문의 함성이 하늘을
진동하고 그 형세 또한 드높았으며, 기세를 몰아 적을 공격하니 마치 추풍낙엽과 같았다. 적은 사기가 떨어져서 도망쳐 북쪽으로 종적을 감추었고,
활과 칼을 버리고 진영에 와서 항복하는 자가 계속 이어져 공이 스스로 포고문을 내려 그들을 치하하였다. 왕께서 글을 내려 공을
포상하였는데 그 글에서 “황하가 골짜기에 쏟아지듯 달려 나가 한 치 아교풀로 막을 수 없었고, 큰 바위가 산봉우리에서 굴러 빈 알이 바싹
깨졌네.”라고 하였다. 그 글귀가 씩씩하고 힘이 있어 지금까지 전송되고 있다. 오랑캐 땅을 개척한 것이 700여리이고, 9성을 쌓고 경계비도
세웠다. 왕이 그 공로를 높이 여겨 공을 추충좌리 평융척지 진국공신으로 삼고, 문하시중 지군국중사로 임명하시고, 개선하여 돌아올 때 북을 치고
음악을 연주하여 성대히 맞이하고는 교외에서 크게 잔치를 열어 군대를 위로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진족이 다시 침략하여 공을 보내어 토벌케
하였는데, 적장의 머리를 베어 바치자 그 공을 치하하여 영평현 개국백에 봉해주시고 식읍으로 300호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태보상주국 감수국사를
제수하였다. 공이 죽자 시호를 문경이라 하였다가 그 후에 유릉의 휘호를 피하여 시호를 지금의 문숙으로 고쳤다.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손에서 잠시도 책을 놓지 않았으며, 군영에서도 늘 오경을 가지고 다녔다. 후진 중에 재주가 있는 학자들과는 도를 논하기 좋아하였다. 이
때문에 현인을 좋아하고 선을 즐기는 것이 한 때에 으뜸이었다. 그의 신주를 예종의 사당에 배향하였고, 조선조에서도 숭의전에
배향하였다. 그의 아들은 여섯인데, 맏아들 언인은 지후를 지냈고 그 후손은 남원, 함안의 두 족으로 갈리어져 대대로 이어졌다. 다섯째
아들 언이는 정당문학을 지냈고 문강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지금 파평을 본관으로 하는 사람은 모두 그의 후손이다. 공의 공훈은 이미 세상에
드러났고, 그의 복과 은택이 멀리 전해 내려와 내외의 후손들이 번성하였고 현달하게 되어 그것을 다 기록하지 못하니, 임금이 태어나는 경사를 길러
성인을 탄생하게 하여 면면히 동방 억만세의 기업을 이어나가게 하는구나. 아! 아름답고 성대하도다. 공의 묘는 파평 분수원 북쪽에 있고,
기록이 보첩과 여지승림에 기록되어 있다. 촌민들은 문숙공을 마치 병사들이 장수 이름을 외우는 것처럼 알고 있는데, 모두 문숙공의 묘가 심씨 대
묘소 언덕 안에 있다고 한다. 대개 심씨댁 묘소 아래 한 개의 고분이 있는데 뒤에는 굽은 담을 쌓았던 흔적이 있고 앞에는 한 개의 흙 돈대가
있어 거기에는 윤시중교자총이라고 적혀 있다. 우리 종친들 중 산을 왕래한 자들이 지적하며 애통하게 여긴 지가 오래이다. 그 후에 홀연히 이씨
성을 가진 비석이 무덤 앞에 세워졌으니 이것은 전에 없던 일인데 이제 새로 생긴 것이어서 더더욱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우리 종친이 비로소
심씨와 더불어 서로 따졌더니 그 말이 임금에게까지 전해졌다. 임금이 곧 측근의 신하를 보내어 그 실정을 염탐케 하고, 인하여 교지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700여년이나 된 옛 무덤에 만일 비석이 있었다면 사람들이 못 보았을 리가 없으나, 지금에 와서 비석이 세워졌으니
하늘이 세운 것인가? 귀신이 세운 것인가? 그 사람은 알기 어렵지 않도다. 또 무덤 앞 조그만 개울에서 비석 한 개를 얻으니, 비록 깎이고
깨지기는 하였으나 훈호와 벼슬, 시호와 성과 이름이 완연하여 읽을 수 있는데, 심씨가 오히려 다시 서로 논란을 벌여 양가에 다시 파문을
일으키는가?” 상께서 또 교지를 내려 “옛 정승이 지각이 있다면 마음에 어찌 편할 수 있겠는가. 그 후손이 된 자로 하여금 그 조상을
편히 모시지 못하도록 한다면, 어찌 사람의 도리라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내 마땅히 엄히 다스리겠노라.”라고 하시고,
이에 직접 글을 지어 근신을 보내어 공의 묘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다. 글에 이르기를, “공의 묘가 분수의 북쪽에 있으니 세상 사람들이
교총이라 한다. 무덤 곁에 하늘의 이치 밝고 밝아 확연하니, 이 날부터 다시는 슬픔 일으키지 않으리. 이에 특별히 명하노니 묘를 다시
수축하라.” 심씨 집에서는 오히려 희미한 일을 가지고 번거롭게 하거늘, 성상께서 혁연히 친히 임하여 살펴보시고, 심정최가 묻어둔 비석과 다른
집안의 비석을 옮겨 세우도록 하고 곧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에 심정최의 불충불효함에 대한 교시가 있었다. 심하도다, 심씨의 근거
없음이여! 심씨는 윤씨에서 갈라져 나왔다. 심씨도 스스로 이것을 말하면서, 도리어 차마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 심씨는 아직도 묘를 옮기지
않아 땅이 너무 가까워 묘지의 제도를 끝내 다 갖추지 못했으니, 어찌 슬프고 애통하지 않겠는가? 아아! 공이 몇백년 뒤에 지우를 집어,
우리 성상께서 먼 옛날 일을 살펴 감흥을 느끼고 옛 무덤을 다시 수축할 수 있게 명하고 친히 글을 지어 제사를 드리니, 공의 세상에 다시 없는
큰 공적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미 잃어버렸던 유적도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임금의 글이 혁연히 밝게 게시된 것이 마치 해와 별 같아,
후손들이 하해와 같이 헤아릴 수 없는 큰 은혜에 감격하여 칭송하고 있다. 오직 문강공의 묘가 보첩에도 또한 지금 심정승의 원산이라 했는데 오히려
징험하여 찾을 수 없다. 이는 성의가 미치지 못한 것이요, 인사를 다하지 못함이로다. 우리 종친과 후손들은 마땅히 그것을 알아야 하리라. 이제
장차 표석을 먼저 세우려 하노니 여러 종친들은 종중에 나가 의논하라. 지금 영부사 윤동도가 나 윤봉구에게 비문을 부탁하였다. 나는 병들어
늙고 붓을 놓은 지 오래였으나, 뒤에 계승하는 사람들이 힘을 다해 선인의 일을 추모하는데, 이것을 버리고야 감히 무엇으로 증거를 삼으리요. 삼가
행장 및 고려사 열전에 의존하여, 이를 엮어 글을 짓는다. 그러나 다른 증거할 만한 글이 없어 평일의 문장 및 공훈 다 기록치 못하고 만분의 일
쯤 밝혀 둘 뿐이다.
숭정기원후 세 번째 병술년(영조 42, 1766년) 월 일 세움
21대손 정헌대부 전
공조판서 겸 세자시강원찬선 봉구는 삼가 짓는다. 22대손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 겸 동지춘추관사 동섬은 삼가 전면을 쓰다. 22대손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 지제교 방은 삼가 음기를 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