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 자료/파평윤씨 자료

11. 윤리 묘갈문(尹理 墓碣文)

물텀벙 2015. 3. 13. 22:09

11. 윤리 묘갈문(尹理 墓碣文)

 

 

이 비는 1721년(경종 1년)에 경기도 의왕에 건립된 윤리묘갈(尹理墓碣)로 정호(鄭澔)가 비문을 지었으며, 신임(申銋)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따르면 윤리(尹理)의 자는 자일(子一)로 6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는 약관에 과거급제를 하여 공조좌랑, 호조좌랑 등을 거쳐 병조참의, 병조참지 등을 역임하였다.

갑인사화 이후 벼슬에 뜻을 잃어 낙향을 하고는 두 번 다시 벼슬을 하지 않았다. 죽은 후에 둘째 아들의 벼슬이 높아져서 정이품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尤奄宋文正先生公平嚴正毀譽無誰如有所譽者其有所試矣嘗銘叅判尹公止善之墓稱其子府尹公之賢有淸愼見稱等 語噫子弟而修身飭行爲父母光顯固巳難矣况得此於大人君子之評尤幾人㦲此可見公之賢出人遠矣公諱理字子一六歲失所恃少習詞章有名儕流間弱冠成進士癸卯擢明經第分隷成均館時論稱屈會有重臣尉篤超陞六品臺諫啓尼之戊申例陞典籍佐郎工戶兩曹累拜騎省郎遷司書正言持平掌令出入臺閣殆周歲爲養求外除金山郡守癸丑遭外艱以善喪 聞服闋在甲寅士禍之後無意世途退伏鄕里久出判鏡城庚申更化由直講復爲掌令叅保 社原從勳轉濟用監正出爲 穩城府使加緋玉遞歸拜兵曹叅議旋除洪州牧使入爲同副承旨遆拜兵曹叅議轉兵曹叅知復出爲慶州府尹病遞己巳時 事大變屏迹楊州先壟下及甲戌拜江陵府使以病不赴尋毉舁還京第是年六月一日考終於正寢去其生丙子五十九年訃 聞遣禮官致祭九月葬于楊州松山先塋孝成公墓左負乙之原公爲人魁偉和易眞率無表襮性至孝事生追遠備盡誠禮每 以不得逮養天只爲至痛襲藏手蹟時時奉翫輒淚然淚下哀動傍人其在臺閣持論乎坦當朝著歧貳之日守志不撓屢爭時 政得失多所裨益出典州郡奉公抑私律己甚嚴不以一毫自累平日無要路迹以是進道盤桓且有贜吏家子孫附麗時論者 謬疑公發其陰私含怨入骨動輒中傷兵議銀臺之劾皆出其逞憾時銓長李公翊文谷金相國先後辨白 上亦知臺啓之不 公峻辭斥之賴此公議少伸而實不能究其用嗚呼惜哉坡平尹氏自莘達爲麗祖功臣其浚累公累卿若文肅公瓘文康公彥頤文顯公珤事業文章輝映簡榮我 朝有諱晳以司憲罹燕山甲子士禍爲名人厯孝成公仁鏡至諱思欽爲水軍節度使寔公曾祖也祖諱泳司潔 贈左承旨生諱止善即公考 贈戶曹叅判以公貴也妣 贈貞夫人全義李氏叅奉宗澤之女太師棹之後也公娶興陽李氏處士義胤之女從公封貞夫人生四男二女長曰昌來己卯生員今爲工曹佐郎次曰錫來庚午進士庚寅登文科今爲司諫院司諫次曰益來丙子進士蚤死次曰陽來己卯生員乙酉文科今爲廣州府尹女長適姜泰相武科今爲平山府使次適李顯命丁巳生員壯元昌來娶正郎李集成女生男女不育以弟益來子命彥爲嗣錫來初娶正郎柳軸女後娶僉知洪璲女益來娶縣監李增華女有一男一女男即出後佐郎女適士人李兼濟陽來娶司諫趙昌期女無子取族兄益修子之彥爲後繼娶進士朴昌瑞女姜泰相有二男三女男壽星壽奎女李肇元韓震朝宋亨明李顯命繼子世珩公娶二十五䄵以季流位躋二品推恩 贈公嘉善大夫吏曹叅判兼同知 經筵義禁府事弘文館提學同知春秋館成均館事 世子左副賔客五衛都摠府副摠管李夫人禮宜柎公而以地勢通宮別占靑龍內岡翼坐之原去公墓四十餘步系之以辭曰嗚呼以公之寸之德年位之稱宜不正斯而凡於時命識者惜之後嗣立楊卒獲其報於是乎見天道之不差也
崇禎大夫行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春秋館事藝文館提學鄭澔撰
同年友八十三歲老人資憲大夫議政府右叅賛兼知 經筵義禁府事同知春秋館成均館事申銋書
崇禎紀元浚九十四年辛丑五月日立

 

 

윤리묘갈(尹理墓碣)

우암 문정공 송시열 선생은 공을 평하여, “매사에 공평하고 엄정하여 명예를 손상하는 일이 없었다. 누구라도 만약 선행을 하여 명예를 높인 자 있으면 그 행동을 본받아 자기의 행동으로 실천하였다.”라 하였는데 이것은 송 문정공이 일찍이 공의 아버지인 윤공 지선(止善)의 묘비를 찬하면서 그 아들 부윤공의 어짊이 맑고 착함을 보고서 칭찬하여 한 말이다.
아! 자제로서 몸을 닦아 힘써 행하여 부모를 빛나게 하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대인군자에게서 이러한 칭송을 들은 자는 무릇 몇 명이나 있으리오. 이것으로도 공의 어짊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우뚝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공의 이름은 리(理)이며 자는 자일(子一)인데 6세 때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장에 힘써 이름을 같이 공부하던 무리들 속에서 떨쳤고 약관에 진사가 되었으며 계묘년에는 명경과에 탁제되어 성균관에 분속되었다. 당시의 여론이 공을 일러 굴회(屈會)라 칭송하였고 이로서 중신들이 특별히 공을 6품직으로 올릴 것을 천거하였으나 대간들이 관례가 없는 일이라고 반대하여 6품직이 되지는 못하였다. 무신년에 관례에 따라 전적으로 승진되고 좌랑으로 공조와 호조의 양조를 왕래하다가 문득 기성랑을 배수하였고 이어 사서, 정언, 지평, 장령 등의 직을 맡아 대각에 출입하기를 거의 1년 동안이나 하였다. 문득 부모의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청하니 금산 군수에 제수되었다. 계축년에 외간을 당하였고 이에 장례를 행함에 예법에 맞아 칭송이 자자했고 복을 마치니 이때는 갑인사화의 후라 세상에 뜻을 잃어 멀리 은퇴하고자 하였다. 이에 글을 올려 향리에 물러갈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정경판관을 제수받았으며 경신년에 새로운 정치를 평에 이르러서는 직강을 거치고 다시 장령이 되어 참보사원종으로 책훈되고 제용감정으로 옮겼다. 이어 은성부사가 되고 배옥을 더하였다. 얼마 후 들어와 병조참의를 제수받았고 또 외직으로 나가 홍주목사가 되었고 이어 동부승지로 소환되고 다시 병조참의로 옮겼다가 병조참지가 되고 이어 다시 외직으로 나가 경주부윤에 부임하였는데 이때에 병이 들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기사년에 세상이 크게 변하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양주의 선영 아래에 내려와 살다가 갑술년에 강릉부사를 제수받았지만 병으로 부임하지 않았고 병이 깊어지자 수레로 서울 자택으로 돌아와 이해 6월 1일 정침에서 이 세상을 하직하였으니 병자년에 이 세상에 태어나 이때 59세이다. 왕께서 부음을 들으시고는 예관을 파견하여 조문하고 장례를 주선하도록 하시니 9월에 양주 송산의 선영, 효성공 묘소 왼쪽 을좌의 향 언덕에 장례를 모시었다.
공은 사람됨이 우뚝하고 풍채가 뛰어났으며 항상 화기를 띄우고 진지하였으며 화난 표정을 지우는 일이 없었다. 지극한 효로서 부모님을 섬기고 선대의 조상을 추모하는데 온갖 성과 예를 다하였으며 그리고도 미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돌아가시는 날에도 선조의 유품을 손으로 만지면서 애통해 하시어 문득 눈물을 흘리시니 옆에서 보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대각에 있을 때는 주장하는 바가 사리에 맞고 당당하였으며 조정에서 의견이 분분하여 서로 대립하였을 때 소신을 굽히지 않고 시정의 득실을 여러 차례 다투어 개진하니 나라에 유익한 바가 많았다. 명을 받들어 주군으로 나아가서도 정사를 함에 있어 공을 받들고 사를 억누르고 자신을 다스리기를 엄히 하여 아무리 적은 일이라도 누가 될 일을 하지 않으니 요로에 청탁하는 일이 없어져 이로써 정사의 도가 확립되었고 장리의 자손들까지도 공에게 순복하였다. 때에 논하는 자가 공을 의심하여 공에게 사사로이 깊은 원한을 가진 자의 중상에 의한 모함을 듣고 공을 잘못 의심하게 되었다. 또 사헌부의 탄핵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아주 강영한 것이었다. 이때 전장 이익과 문곡 김수증이 전후하여 차례로 공의 결백을 해명하였다. 왕께서도 사헌부의 장계가 부당하다는 것을 알고 공을 배척하는 글을 물리쳤다. 이로써 공의가 다소 누그러졌다. 실로 사람을 씀에 있어서는 그 일의 진상을 파악해야 할 것이 아닌가?
오호라! 파평 윤씨는 신달이 고려조의 공신이 됨으로부터 비롯된다. 그 후예는 여러 차례 공이 되기도 하고 재상이 되기도 하여 훌륭한 가문으로 전해 내려왔는데 문숙공 관(瓘), 문강공 언이(彥頤), 문현공 보는 나라에 크게 공헌하고 또 문장으로도 이름을 떨쳐 가문의 명예를 드높힌 분들이다. 아조에 들어와서는 석(晳)이라는 분이 있어 사헌(司憲)으로 명망이 높았는데 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인해 화를 입어 명인(名人)이 되었다. 효성공 인경을 거쳐 사흠에 이르니 이 분은 벼슬이 수군절도사였는데 바로 공의 증조가 된다. 조부의 이름은 영인데 벼슬이 사어였고 돌아가신 후에는 좌승지로 증직되었다. 이분께서 지선을 낳으니 즉, 공의 부친이며 호조참판을 증직받으셨는데 이는 공께서 귀하게 됨에 주어진 것이다. 비는 정부인으로 증봉되었는데 전의 이씨로서 참봉 종택의 따님이고 태사 도의 후예이다. 공은 흥양 이씨의 처사 의윤의 딸을 부인으로 취하였으며 공의 관질에 따라 정부인으로 봉함을 받았는데 4남 2녀를 출생하였다. 장남 창래는 기묘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지금은 공조좌랑으로 있으며, 차남 석래는 경오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경인년 문과에 급제하여 지금은 사간원 사간으로 있으며, 3남 익래는 병자년에 진사가 되었으나 일찍 죽었고, 4남 양래는 기묘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을유년 문과에 급제하여 지금 광주 부윤으로 있다. 장녀는 무과에 합격하여 지금 평산 부사로 있는 강태상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정사년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이현명에게 출가하였다. 창래는 정랑 이집성의 딸을 부인으로 취하여 아들과 딸을 낳았으나 기르지 못하였고, 동생 익래의 아들 명언으로서 후사를 이었다. 석래는 첫부인으로 정랑 유축의 딸을 취하였고 후부인으로 첨지 홍수의 딸을 취하였으며, 익래는 현감 이증화의 딸을 부인으로 취하여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바로 형인 좌랑공의 양자로 갔고, 딸은 사인 이겸제에게 출가하였다. 양래는 사간 조창기의 딸을 부인으로 취하였으나 아들이 없어 족형 익수의 아들 언을 양자로 하였으며 계실로 진사 박창서의 딸을 취하였다. 강태상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수성, 수규이고, 딸은 이조원, 한진조, 송향명에게 각각 출가하였고, 이현명은 계실에서 아들 이행을 두었다.
공께서 돌아가신 지 25년후에 막내 아들 양래가 관질이 2품으로 올라 추은을 내려 공에게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사 홍문관제학 동지춘추관 성균관사 세자 좌부빈객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증직하였다. 이 부인은 마땅히 예로서 공의 묘소에 합장하여야 함이 당연하나 지세가 궁과 통하여 별도로 청룡의 터를 구하여 내강익좌의 언덕에 장례를 모셨는데 공의 묘소와 40여보의 거리이다.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오호라! 공께서 가지신 뜻은 덕이었도다.
세월가고 지위 높아도 부정과 타협하지 않았도다.
세상에 큰 뜻 펴지 못했으니 식자들이 이를 탄식하는 도다.
후사가 이를 떨쳐 마침내 그 보답 받았구나.
이로 볼 때 천도의 이치는 참으로 고르도다.

숭정대부 행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지춘추관사 예문관제학 정호(鄭澔)는 글을 짓고
동년 친우 38세 노인 자헌대부 의정부 우참찬 겸 지경연 의금부사 동지춘추관 성균관사 신임(申銋)은 글을 쓰다.
숭정기원후 94년(경종 1, 1721년) 신축년 5월 일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