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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윤지임 신도비문(尹之任 神道碑文)

물텀벙 2015. 3. 14. 10:41

31. 윤지임 신도비문(尹之任 神道碑文)

 

 

 

1534년 지금의 파주시 교하면 당하리에 윤지임(尹之任 : 1475-1534년)의 사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이다.

이사구(李思句)가 글을 짓고, 윤안인(尹安仁)이 글을 썼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아버지는 내자판관을 지내고 영돈령을 증직받은 욱(頊)이고, 어머니는 문충공 정몽주의 증손인 감찰 제(濟)의 딸이다.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소윤의 원로인 윤원형(尹元衡)의 아버지이다.

1514년 그의 딸이 중종의 둘째 계비로 간택되자, 왕의 외조부로서 장원서별좌(掌苑署別坐)에서 돈령이 되었다.

그 후 다시 영돈령(領敦寧) 오관총부(五管摠府)로 승진하였으며,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에 봉군되었다. 부인은 관찰사 이덕숭(李德崇)의 딸이다. 부인과의 사이에 5남 2녀를 두었다. 비문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왕의 외척으로서 세도를 누렸던 윤지임 가문의 내력을 살펴 볼 수 있다.

 

 

 

尹之任 神道碑
 靖平公神道碑銘 幷序
 惟皇明嘉靖十三年甲午四月初九日領敦寧坡山府院君尹公諱之任告掃先塋將發疾作第三日卒于第用是年六月十一日葬于交河瓦草洞坤坐艮向之原雙于夫人之墓側于先大人之兆其孤使來謁碑於余余於尹氏頗詳其世自先王奠以上名位勳業與公之孝友仁信巳於誌錄十八九謹删取其辭曰鳴呼凡公卿大夫二三世嗣有祿食者小逮十世數十世而不曾者非但罕於令求之古亦不多得而尹氏之行於世自我東方有君歷三國至高麗統三有名莘達佐太祖策封三韓功臣子先之亦爲功臣先之子金剛孫執衡皆爲僕射執衡之子瓘歷事肅睿二宗拓女眞之地爲吾州滌左袵之穢爲吾民考先春公嶮二碑君知其身兼將相功冠于世卒於太師門下侍中鈴平縣開國伯有子五人而彦頣尤顯仕至政堂文學兼判戶兵部事謚文康子惇信爲兵部侍郎平章事是生西京留守商季子復元爲尙書左僕射翰林學士子純爲門下侍郎平章事子珤爲三重大匡僉議政丞右文館大提學鈴平府院君謚文顯子安淑爲僉議贊成事謚良簡子陟爲三重大匡鈴平君子承禮爲版圖判書子璠爲判中樞府事謚貞靖贈領議政乃我貞熹王后考也子士昕爲右議政坡川府院君謚襄平是生刑曹判書繼謙謚恭襄子頊爲內資判官贈領敦寧實公之考而文忠公鄭夢周曾孫監察濟之女是公之妣也公生於成化乙未年十一喪考其秉禮略似成人長能學以官不下人必於友後果以王妣父自掌苑署別坐超授敦寧都王尋陞領敦寧五管摠府且提數司人無訾者庚辰丁外憂過哀成疾其卒以此痛哉然公之在世享大榮慶者非一當王妣册封之初上始行親迎納采與徵與幣公皆親授詔書聳人耳目寔前世所未講之盛禮自古外戚鮮克由學以進而公勉子詩禮律巳儒素季子元衡最篤於學早攫大科設慶之在朝名卿盍簪賀席塡門溢道亦戚里前所未聞之大慶且富貴難多男難子多孫亦難一身三難公實有馬及訃聞上雲悼輟朝市賻贈倍式至降御製遣中官別祭其辭曰惟靈松竹其標水玉其質世襲貂蟬在卿燀爀畜祠毓慶乃生賢妃爲國元舅光生門楣福履所華宜享頣其如何一疾遽至於斯初聞訃音將信將疑天奪之速慟結中情巳矣世空想儀形乃遣中官恭奠韮儀靈其有知冀一歆之宸章燦爛 聖情昭回此又臣子未敢望萬一於君上者也其生榮死哀俱到其極十九世冠冕皆公卿達官無非罕古而稀今者也豈專才望有以致此千百年積德愈久而有餘慶也公之夫人觀察使李德崇之女亦世之望士之表也有五子曰司評元凱曰洗馬元亮曰縣今元弼曰司評元老曰注書元衡有二女次則中宮誕三公主一大君長懿惠下嫁淸原尉韓景祿次孝順定婚于綾原尉具思顔季與大君幼孫男曰紀曰綱女曰具潤之配卽元凱娶僉知李俌女出曰紹曰纘曰緻卽元亮娶縣令張日就女出有幼曰綸曰緯曰繪曰緝卽元弼娶縣監鄭纘女出曰絿卽元老娶主簿李亮女出一女幼公於側室又有四子曰支孫庶孫傍孫低孫有女幼振振侁侁箤于德門繼此而往福慶袞袞心下止於先十九世而巳何其盛乎銘曰噫少孤尙私閨夢龍兆天祿迓先休聯華轂馬氏蘭楊芬郁萬石君謹愿足獨嗇年遘玆酷天章下珠滿斛情禮至神應哭國元葬沒餘福灼靈龜獲貞卜交之山艮之麓側先兆次昭穆封若堂得歸宿澤未艾慶長毓

資憲大夫吏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李思句撰

通政大夫成均館大司成尹安仁書
噫自貞靖歷襄平恭襄至靖平四世自朝家思禮崇奉而公與妣忌四節日四仲朔祭需自奉常寺宣惠廳依例劃給且免稅十五結折受忌祝則設素膳墓祝設肉饌禮也永世不遷昭昭天理食報無窮豈其微哉 正朝端午兩節諸條需高陽郡封呈寒食秋夕兩節自交河郡封呈惠廳折受祭需價米合四十八石十二斗且四節日各五石二十石京畿色軍進排太常寺例封(煮酒三甁水麥米二斗白米二斗上末八斤十兩艮醬一升生淸五升眞油六升醋五合七燭二柄栢子八升胡桃八十介榧子四升乾枾八串五味子二升范太四斗昆布一斤多士麻一斤海衣二貼甘苔一斤篥占七兩竹筍二斤粉藋一斤八兩烏海藻十兩 墓祭生 秀魚四尾鷄兒四首十脯沉秀魚塩三斤餠飯米四斗酒粘米一斗范太一斗赤一斗)

 

 

 

정평공신도비명과 서문
가정(嘉靖) 13년(1534년) 4월 9일 영돈령 파산부원군 윤지임이 선영에 소분(掃墳)하고 떠나려 할 즈음 병이 나 3일 만에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해 6월 11일 교하 와초동(交河瓦草洞) 곤좌간향(坤坐艮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의 묘와는 나란히 쌍분으로 되어 있고 부친의 묘소 옆에 있다.
공의 아들이 사람을 내게 보내 비명을 써달라고 했다. 나는 윤씨 가문의 가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데 선왕 이전의 명예와 지위와 공적, 그리고 공의 효우인신(孝友仁信)은 이미 지문(誌文)에 거의 기록되어 있으므로 취사선택해서 묘명을 쓴다.
오호! 공경대부로서 2~3세대를 이어가며 관직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고, 10대, 수십 대에 걸쳐 계속되는 일은 고금에 드문 일이다. 그러나 윤씨는 군주가 있기 시작할 때부터 출세하여, 삼국을 거쳐 고려가 통일하기까지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 나왔다. 신달(莘達)은 고려태조를 보좌하여 삼한공신에 책봉되었고 아들 선지(先之) 또한 공신이 되었으며, 선지의 아들 금강(金剛)과 손자 집형(執衡)은 모두 복야가 되었다.
집형의 아들 관(瓘)은 숙종과 예종 대를 거쳐 여진의 땅을 개척하여 우리의 고을로 만들고 오랑캐의 오명을 씻어 우리백성으로 만들었다. 선춘령과 공험진의 두 비석을 보면 왕이 그가 장상을 겸직할 만한 인물이라는 것과 공적이 세상에서 으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태사문하시중영평현개국백이 된 뒤 사망했고 아들 5명을 두었다. 언이(彦頤)는 더욱 현달하여 관직은 정당문학 겸 판호병부사를 지냈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그 아들 돈신(惇信)은 병부시랑평장사를 지냈고, 서경유수 상계(商季)를 낳았다. 상계의 아들 복원(復元)은 상서좌복야 한림학사가 되었고, 그의 아들 순(純)은 문하시랑평장사, 보(珤)는 삼중대광첨의정승 우문관대제학 영평부원군이 되었으며 시호는 문현(文顯)이다. 보의 아들 안숙(安淑)은 첨의찬성사를 지냈고 시호는 양간(良簡)이며, 안숙의 아들 척(陟)은 삼중대광 영평군이 되었고, 척의 아들 승례(承禮)는 판도판서가 되었으며, 승례의 아들 번(璠)은 판중추부사를 지냈고 시호는 정정(貞靖)이며 영의정을 증직받았는데, 바로 정희왕후의 아버지이다. 승례의 아들 사흔(士昕)은 우의정 파천부원군이 되었고 시호는 양평(襄平)이며, 형조판서를 지내고 시호가 공량(恭襄)인 계겸(繼謙)을 낳았다. 계겸의 아들 욱(頊)은 내자판관을 지내고 영돈령을 증직받은 인물로 공의 아버지이며, 어머니는 문충공 정몽주(鄭夢周)의 증손인 감찰 제(濟)의 딸이다.
공은 성화(成化) 을미년(1475년)에 태어나 11살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성인처럼 예법을 지켰다. 장성해서는 학문에 능했으며 관직이 낮지 않았으나 사람들을 벗처럼 대했다. 나중에 왕비의 아버지로서 장원서별좌에서 돈령도정으로 뛰어올랐다가 얼마 뒤 영돈령 오관총부로 승진한 뒤 여러 관사의 제조가 되었는데 아무도 헐뜯는 사람이 없었다.
경진년(1520년)에 모친상을 당해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병이 나 이로 인해 사망하게 되었으니 애통하다. 그러나 살면서 큰 영화를 누린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왕비를 책봉할 때는 왕이 친영과 납채를 행하고 폐백을 주니 공은 직접 조서를 받게 되어 뭇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으니 전례에 없는 성대한 예였다.
자고로 외척이 학문을 통해 등용되는 경우가 별로 없었으나 공은 아들들에게 시와 예, 자신의 다스림, 선비의 본바탕에 힘쓰도록 했다. 아들 중 막내아들 원형(元衡)이 가장 학문에 독실했는데 일찍이 대과에 합격하여 잔치를 베풀자 조정의 유명한 공경들이 축하하는 자리에 참석해 문을 메우고 길에 넘쳐났다. 이 또한 외척으로서는 전에 없는 큰 경사였다. 부귀와 아들, 많은 자손은 모두 얻기 어려운 일이라 3난이라고 하는데 공은 3난을 모두 가졌던 것이다.
공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이 전해지자 왕이 애도하여 조정과 시장을 닫았으며 부의를 전례보다 배나 더하였고 직접 제문을 지어 중관을 보내 별제(別祭)를 지내게 했다.

제문의 내용은,
경의 모습 송죽 같고 바탕은 빙옥 같네
높은 관직 세습하여 경의 자리 더욱 빛나
자손을 잘 길러 어진 왕비 배출하여
나라의 장인 되고 가문이 빛났네
무성한 복록 길이길이 누려야 하는데
어찌 한 번의 병으로 이 지경에 이르는가?
처음 부음을 들었을 때 반신반의했거늘
하늘의 빼앗음 신속해 애통함만 맺히네
그만두자! 그 모습 다시는 볼 수 없네
그리고 나서 중관을 보내 제물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게 하여 영혼이 흠향하기를 바랐다. 왕이 지은 제문은 찬란했으며 정은 역력히 휘돌았다. 신하로서 군주에게 감히 만에 하나도 바랄 수 없는 일로 생전의 영광과 죽은 뒤의 애도가 극에 달한 것이었다. 19대에 이르는 동안 대대로 관직이 공경에 달했으니 고금에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찌 재주만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천백년 동안 오래오래 덕을 쌓아 남은 경사가 있었던 것이다.
공의 부인은 관찰사 이덕숭(李德崇)의 딸로 이덕숭 또한 선비들의 본보기였다.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사평인 원개(元凱), 세마 원량(元亮), 현령 원필(元弼), 사평 원로(元老), 주서 원형(元衡)이다. 딸은 둘인데 둘째딸은 왕비가 되어 공주 셋과 대군 하나를 낳았다. 장녀인 의혜공주는 천원위 한경록(韓景祿)에게 하가했고 둘째 효순공주는 능원위 구사안(具思顔)과 정혼했으며 막내딸과 대군은 어리다. 손자인 기(紀)와 강(綱), 손녀인 구윤(具潤)의 배필은 원개가 이보(李俌)의 딸과 결혼하여 낳았고, 소(紹), 찬(纘), 치(緻)는 원량이 현령 장일취(張日就)의 딸과 결혼하여 낳았으며, 딸은 어리다. 윤(綸), 위(緯), 회(繪), 집(緝)은 원필이 현감 정찬(鄭纘)의 딸과 결혼하여 낳았고, 구(絿)는 원로가 주부 이량(李亮)의 딸과 결혼하여 낳았으며 딸은 하나다. 공은 측실에서 네 아들을 두었는데 아들은 지손(支孫), 서손(庶孫), 방손(傍孫), 저손(低孫)이고 딸은 어리다. 자손이 끊임없이 덕망 있는 가문에 모여 이어가고 복과 경사가 마음속으로 흘러 19대에 이르렀으니 어찌 그리도 번성한가?

명왈(銘曰)
아! 어려서 아버지 여의었으나
용꿈을 꾸니 천록을 맞이할 징조,
선대는 대대로 화려했고 자식은 마씨(馬氏)처럼 뛰어났으며
양분(楊芬)처럼 무성하고 석군(石君)처럼 부지런했네.
왕이 내린 제문 정과 예를 다하여 귀신도 통곡했네.
나라의 기둥 세상을 떠났으나 남은 복이 영령을 빛내
거북으로 점을 쳐 교하의 동북향에 자리하니
선영 옆이라. 묘는 소목의 차례 따랐고
봉분은 집 같아 돌아가 쉴 곳 윤택하진 않지만
향기로운 경사 오래오래 길러지리.

자헌대부이조판서겸오위도총부도총관 이사구(李思句) 지음.
통정대부 성균관대사성 윤안인(尹安仁) 글씨.

아! 정정으로부터 양평, 공양을 거쳐 정평에 이르는 4대 동안 조정으로부터 은혜와 존경을 받아 공과 부인은 기일과 네 절일(四節日), 네 중삭(四仲朔)의 제수를 봉상시와 선혜청으로부터 전례대로 지급받았다. 또한 면세전 15결도 받았다. 기축(忌祝)에는 소선(素膳)을 마련하고 묘축(墓祝)에는 육류를 마련하는 예를 실시하고 사당에 영원히 모시게 했으니 천리가 밝고 밝아 영원히 음식으로 보답한 것이다. 어떻게 작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월초하룻날과 단오 때는 여러 가지 제수를 고양군(高陽郡)에서 바치고, 한식과 추석 때는 교하군(交河郡)에서 바치며, 선혜청에서 제수의 값으로 쌀 48석 12두를 지급한다. 또 4 명절에는 5석씩 모두 20석을 경기색군(京畿色軍)에서 지급한다.
태상시에서 전례에 따라 바치는 물품 : 자주(煮酒) 3병, 수맥미(水麥米) 2두, 백미 2두, 상말(上末) 8근 10량, 간장 1되, 생청(生淸) 5되, 진유(眞油) 6되, 식초 5홉 7, 초 2자루, 잣 8되, 호도 80개, 비자 4되, 곶감 8꾸러미, 오미자 2되, 범태(范太) 4말, 곤포(昆布) 1근, 다사마 1근, 김 2첩, 감태 1근, 율점
(篥占) 7량, 죽순 2근, 분조 1근 8량, 오해조(烏海藻) 10량. 묘제 때는 생수어(生秀魚) 4마리, 어린 닭 4마리 10포, 침수어(沈秀魚) 10마리, 병반미(餠飯米) 4말, 주점미(酒粘米) 1말, 범태 1말, 적(赤) 1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