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 자료/파평윤씨 자료

32. 윤집 택지비(尹集 宅址碑)

물텀벙 2015. 3. 14. 10:44

32. 윤집 택지비(尹集 宅址碑)

 

 

 

이 비는 1783년(정조 7년) 인천시 강화도에 건립된 윤집택지비(尹集宅址碑)로 김노진(金魯鎭)이 비문을 지었고, 황운조(黃運祚)가 글씨를 썼다.
윤집(尹集)의 호는 임계(林溪)로 신곡공(薪谷公) 윤계(尹棨)의 동생으로 강화도의 같은 집에서 살았다. 윤집(尹集)은 절의를 지킨 선비이며, 신곡공(薪谷公) 윤계(尹棨)는 심주에서 공부하여 과거에 입신하여 남양부(南陽府)에 수령으로 나갔다가 병자호란 당시 오랑캐에 대항하여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당시 강화도 유수였던 김노진(金魯鎭)이 두 형제의 절의를 기념하고자 옛 집의 터에 비문을 지은 것이다.
현재 탁본은 인천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시기는 1990년대로 추정된다.

 

 

忠臣故學士尹集宅址
有明朝鮮忠臣故學士林溪尹先生集宅址在沁州長嶺之高聖鄕此其地也與兄薪谷公棨同室而居云先生大義勁節旣天下莫不聞莫不知薪谷擧沁科出守南陽府丙子難亦克死之是何先生之門忠烈炳炳也雖其墟鞠爲茂草殆不可辨認而尙能使行人徊徨咨嗟不忍去信乎節義之感人心深也花浦洪學士亦先生同德士也嘗居子沁先生兄弟所成就又如彼卓犖又若金仙源黃芝所皆流寓人也歷攷方輿之乘贍耹炤爍蓋復有是州者乎吾聞節義之能壯人家國則沁府保障之重果不在城池甲兵而在諸公也審矣於是書其說于石以列遺墟

正憲大夫行江華府留守兼鎭撫使三道水軍統禦使金魯鎭撰

奉正大夫前行 弘陵叅奉黃運祚書
崇禎紀元之一百五十六年癸卯六月 日立

 

 

 

유명(有明) 조선충신(朝鮮忠臣) 고 학사(故學士) 임계 선생(林溪先生) 윤집(尹集)의 택지(宅址)는 심주(沁州 : 강화도)에 있는데, 장령(長嶺)의 고성향(高聖鄕)이 바로 그 땅이고 형 신곡공(薪谷公) 윤계(尹棨)와 더불어 같은 집에서 살았다.
선생께서는 대의(大義)를 존숭하여 절의로서 몸을 바쳐 이미 그 이름이 천하에 떨쳐져 그의 이름을 듣지 못한 자가 없었으며 또한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자가 없었다. 신곡공은 심주에서 공부하여 과거에 입신하여 남양부(南陽府)에 수령으로 나갔다. 그러나 이 때에 병자호란이 있어 오랑캐에 대항하여 힘껏 싸우다가 장렬한 죽음을 당하였다. 이로 볼 때 선생의 가문은 충열(忠烈)로서 그 이름이 혁혁하다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
비록 공이 옛날에 살던 터는 잡초가 무성하여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아직도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은 공의 자취를 찾아 이리 저리 돌아다니면서 탄식하며 눈물지으니 이것은 공의 신의와 절개를 차마 잊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참으로 절의로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 바가 깊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화포(花浦) 홍학사(洪學士)도 역시 선생과 마찬가지로 덕있는 선비로 일찍이 강화에서 살면서 선생의 형제가 이룩한 바의 뜻을 그대로 행하여 이름을 영광스럽게 떨쳤고 또 김선원(金仙源)과 황지소(黃芝所) 같은 분들도 유배되었을 때 이곳에 산 사람들이다. 이곳의 내력을 상고하여 살펴보니 참으로 혁혁한 사람들이 많았으니 다시는 이 주에 이러한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들으니 절의로서 능히 이름을 떨친 사람과 가문을 국가에서 찾아볼 때 심부(沁府)가 가장 으뜸이다. 국가를 보장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성지와 갑병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여러 사람들과 같이 절의를 지킬 줄 아는 마음에 있는 것이다. 이는 깊이 통찰해야 할 것이다. 이에 돌에 이 뜻을 새겨 유허(遺墟)에 세우는 바이다.
정헌대부(正憲大夫) 행강화부 유수(行江華府留守) 겸 진무사(兼鎭撫使) 삼도수군 통어사(三道水軍統禦使) 김노진(金魯鎭)은 글을 짓고,
봉정대부(奉正大夫) 전 행홍릉 참봉(前行弘陵叅奉) 황운조(黃運祚)는 글씨를 쓰다.
숭정기원후 156년 계묘년(정조 7, 1783년) 6월 일에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