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겸지훈련원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윤공 신도비명 병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남구만(南九萬) 지음. 가의대부 경기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개성부유수 강화부유수 순찰사 조상우(趙相愚)가
글씨. 통정대부 승정원우승지 지제교 겸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 홍수주(洪受疇) 전서(篆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윤공(尹公)이 죽은
이듬해 맏아들이 상복을 입은 채 행장을 갖추고 와 나에게 비문을 지어 달라고 청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병 중에 허락한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삼년상을 마치고 그가 다시 찾아와 세 번 네 번 계속 청하였다. 아! 아! 슬프다! 이 일을 기어이 내게 부탁하는 데에는 까닭이 있으니 비록
내가 혼몽하고 늙었지만 어찌 전력을 다하지 않겠는가? 공은 나와 외척 관계여서 공의 효성과 우애, 독실한 행실은 내 익히 들어 아는
바이다. 가끔 그의 집에 가보면 부지런히 매사를 살피고 몸을 닦고 삼가서 유생다운 풍모가 있었다. 내가 청주목사가 되었을 때 공은 절도사가
되어서 한 성안에 함께 지내면서 아침저녁으로 만나곤 하던 것이 거의 1년쯤 되었다. 이때 공의 재주와 지모를 소상히 알게 되었는데 치밀하고
굳건한 자질, 민첩한 일처리, 자신을 검속하는 풍채, 공사를 받드는 성실함에 감복하였다. 공이 변방의 읍을 담당하였을 적에 나는 그 도를
맡게 되었고 얼마 뒤에는 공이 병권을 맡게 되었다. 남북으로 옮겨 다니고 관직에 오르내리며 함께 일한 지 통틀어 5년이었다. 돌이켜 보니 눈
덮인 고개에 길을 뚫었던 일이 생각난다. 수많은 나무를 휘날리는 눈이 뒤덮고 호랑이, 표범, 승량이, 이리 등의 자취가 낭자하고 그 울부짖는
소리가 처절하였다. 내가 공과 함께 그 사이를 뚫고 지나면서 말고삐를 함께 잡고 막사를 같이 쓴 것이 3일이었다. 잔약한 나는 공을 의지해
기운을 돋우어 탈이 없었는데 뜻 밖에 공이 먼저 가고 나만 홀로 남아 이제 붓을 들어 공의 일을 기록하게 되었으니 내게는 옛일을 회상하는 슬픔에
그치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갈수록 인재는 점점 줄어드니 나라의 위급한 일을 대비할 때면 공과 같은 인재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쉽게
얻을 수도 없고, 급히 얻는다 해도 중임을 얻지 못하니 길게 한탄할 뿐이다. 공의 이름은 천뢰(天賚)이고 자는 대여(代余)이다. 그의
시조는 고려태사로서 이름은 신달(莘達)이며 파평 사람이다. 후손인 문하시중 돈시(敦時)에 이르러 함안으로 이적하였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함안부원군 기묘(起畝)가 병조판서 구를 낳았는데, 공의 6대조부이다. 증조인 세향(世亨)은 순천군수를 지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옹이고 호조판서를 추증 받았고, 아버지 진경(進卿)은 의주부윤을 지냈으며 좌찬성을 추증 받았다. 어머니는 청풍 김씨 부호군 성진(聲振)의
딸이다. 공은 만력(萬曆) 정사 년에 태어나 28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내직으로는 선전관, 훈련원판관, 당상선전관,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
겸도정동지중추부사(兼都正同知中樞府事), 포도대장, 도총부부총관, 도총관, 지훈련원사, 지중추부사를 지냈고, 군직으로는 훈련도감 파총, 천총,
별장, 중군, 어영천총, 중군, 금군별장, 수어중군(守禦中軍)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다경포만호(多慶浦萬戶)에 제수되었다가 부임하기 전에
신천군수(信川郡守), 해서방어사 겸소강첨사, 전라우도수사, 충청병사, 영흥부사, 함경남도병사, 경상우도병사, 회령부사, 함경북도병사,
삼도통제사를 역임하였다. 관직에 나갔다 물러났다 하면서 한 직책을 두세 번 역임한 적도 있었다. 신천(信川)에 재직 중일 때 어사가 치적이
있다고 장계를 올렸고 감사는 도둑을 체포한 일로 위에 보고하였다. 공은 그 일로 통정대부로 자급이 올랐다. 영흥에 있을 적에는 다섯 아내와 다섯
아내가 하나씩 낳은 다섯 아들을 가진 사람이 죽자 아내와 아들이 날마다 서로 싸워 그치지 않는 사건이 있었다. 공이 그들을 불러 술을 주고
모자와 형제간의 사이를 깨우쳐 주자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가 한 집에 거처하면서 효도하고 화목하게 지냈다. 이 일이 일대에 소문이
났다. 공이 어영청 천총이 되었을 때의 일로 효종이 능에 배알하고 돌아오는 길에 군사를 사열하였는데, 공이 인솔한 군사의 항오가 정돈되고
엄숙하였다. 효종은 공을 금군별장에 제수하고 자주 궁중에 불러 들여 병계(兵計)에 대해 묻고는 음식을 하사하고, 집에 돌아갈 때면 노모에게 줄
음식을 싸주었다. 어용 마구간(內廐)에 아주 사나운 말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은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공에게 명을 내려 달리게 하니
유순하여 돌아올 때는 다른 평범한 말과 다름이 없었다. 왕이 측근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날의 마초(馬超)로다.” 말을 하사하라고 명하고 다시
하교하였다. “말을 길들이지 않으면 되려 해를 입는다.” 이어 술을 연거푸 하사하여 대취하자 왕이 말했다. “술을 절제하면서 마시지 않으면
임무에 방해가 되니 마땅히 경계하라.” 이 일로 감격하여 마침내 술을 끊었다. 공이 어영청중군이 되었을 적에 현종이 노량진에서 군대를
검열한 적이 있었다. 왕이 몸소 단상에 올라 호령하니 장수들이 실수를 많이 했다. 그러나 공만은 지휘하고 진을 옮기는 것이 왕이 지휘하는 것처럼
재빨랐으므로 그 자리에서 말을 하사했다. 동지중추부사로서 대흥산성(大興山城)을 쌓는 일을 감독하고 도정(都正)으로서 강화의 돈대를 세우는 일을
지휘하여 연이어 말을 하사 받았다. 훈련도감중군으로서 군사를 검열 받는 자리에서 또 칭찬을 받아 왕이 친히 말을 하사하였다. 그가 통영에 있을
때 왕명으로 성을 쌓은 적이 있었는데 성을 완성한 뒤 지도를 만들어 올리니 왕이 직무를 충실히 행한 데 대해 포상하고 자급을
높여주었다. 그가 부임했었던 영흥부의 백성들이 그의 공을 돌에 새겨 잊지 않고 있고, 함경남도의 함흥과 경상 우도(慶尙右道) 병영인 통영의
군사들이 추모하여 청덕비를 세웠다. 공의 나이가 70세가 되었을 때 조정에서는 맏아들을 추은(推恩)하여 자헌대부로 자급을 올려주었다. 을해년에는
부인과 결혼한 지 60년이 되어 자녀들이 잔치를 베풀어 축하하자 공경대부들이 모두 모여 잔을 들어 장수를 빌었으니 일세를 풍미하는 보기 드문
복이었다. 그전에 공은 늙었다는 것을 이유로 양주에 물러나 쉬고 있었다. 이해 7월 12일에 사망하여 부고가 전해지자 왕은 조시(朝市)를
정지하고 부의을 보냈으며 예관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 10월에 그가 살고 있던 화접동 선영에 장례 지냈다. 공은 장수로서
아들이 그 뒤를 이어 조정에 나갔다. 공은 부월(釜鉞)을 잡은 지 50여년이 되도록 삼가고 조심함이 한결 같아 부임한 곳마다 명성이 자자하여
여러 번 왕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변방의 관리와 군사들도 추모하는 것이 죽은 뒤에도 여전했다. 비록 무사한 때라서 변란을 당해 목숨을 바치고
적개의 공을 세우는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가 조정을 지키는 간성(干城)이라는 것과 사용하지 않은 위엄을 쌓아 형태가 없는 난을 진압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부인 초계 정씨(草溪鄭氏)는 선무랑 문건(文建)의 딸로서 덕이 있었고 공을 도와 집안일을 극진히
돌보았다. 공이 살아 있을 적에 이미 명복(命服)의 영광을 입었고 또 아들이 귀하게 되어 효도도 받았다. 아들 다섯, 딸 셋을 두었는데 큰아들
익상(翊商)은 진사로서 공의 재종형 욱의 후사가 되었다. 둘째 명상(嗚商)과 셋째 형상(衡商)은 모두 진사이고, 그 다음 아들은 무과에 장원하여
재주가 뛰어나 높이 등용되었는데 현재 경기수사 겸삼도통어사를 맡고 있다. 다섯째 오상(五商)은 무과에 급제하여 죽산부사를 맡고 있다. 큰 딸은
사인(士人) 구이사(具以泗)에게 출가하고 둘째 딸은 진사 박민제(朴敏悌)에게, 셋째 딸은 사인 한성기(韓聖著)에게 출가했다. 측실이 아들
징상(徵商)과 어린 딸 하나를 낳았다. 익상에게는 아들 셋이 있는데 원(愿)과 각(慤)은 무과에 급제했고, 무(懋) 는 명상의 후사가 되었다.
형상에게는 아들 둘이 있는데 헌(憲)과 서(恕)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한다. 명하기를,
사람들은
말한다네 집안에 장수 나는 것 꺼린다고. 음모 많아 복에 해롭기 때문이라네. 우리 윤공 같은 사람 무(武)로 현달했으니 장수라면
마땅히 이래야지. 온순함만 가려 밟고 은위는 기울지 않으며, 관용 용맹 법도에 맞아 행진은 화목하고 사졸은 따랐다네. 난이 없고
무사한 때 비축하고 군사 길러 방어 계책 강구하니 여러 조정 은총 입어 몸과 이름 영달했네. 자급은 상경이고 수 또한 80이니
해로하는 낙이 있어 동뇌(同牢) 잔치 다시 했네. 가문이 아름다워 모극을 세웠으며 살아서는 영화요 죽어서는 이름이니 옛날의
의빈이 휴경을 짝하겠네. 나중의 장수 되는 자 어찌 공을 본받지 않으리. 시를 지어 돌에 새겨 영원히
전하리라.
숭정(崇禎) 기원 주갑(周甲) 후 12년 기묘 9월에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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