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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윤천뢰 신도비(尹天賚 神道碑)

물텀벙 2015. 3. 14. 10:46

33. 윤천뢰 신도비(尹天賚 神道碑)

 

 

 

후손들에 의해 화접동(花蝶洞)에 건립된 윤천뢰의 신도비이다. 윤천뢰(1617-1695년)는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충청도병마절도사, 함경남도병마절도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대흥산성(大興山城)을 증축하였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에 봉해졌다. 이 비석은 비좌개석(碑座蓋石)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좌측면에 탄흔 및 상부에 일부 결락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대부분의 글씨를 판독할 수 있다. 찬자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영의정을 역임했고, 문장이 뛰어나 책문(冊文)과 묘지명을 많이 썼던 남구만(1629-1711년)이고, 서자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우의정 등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송준길(宋俊吉)의 문인(門人)으로 글씨를 잘 썼던 조상우(1640-1718년)이다. 전액은 충청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고 그림과 글씨에 능했으며, 특히 전서(篆書)를 잘 썼던 조선 후기 선비화가인 홍수주(1642-1704년)이다.

비문의 전반부에는 비석의 건립기와 가계도 등을 담고 있으며, 중반부에는 공(公)의 관직생활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공(公)은 효종(孝宗)의 총애를 받아 승진을 하였으며, 현종(顯宗)대에 대흥산성을 증축하였다. 후반부에는 공(公)을 장사(葬事) 지내는 일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적혀있다.

특히 비문이 흔히 사용하지 않는 행서(行書)로 되어있으며, 조상우의 필치가 돋보이는 비이다.

 

 

 

尹天賫神道碑
朝鮮國資憲大夫知中樞府事兼知訓鍊院事五衛都摠府都摠管尹公神道碑銘并序
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 南九萬撰
嘉義大夫京畿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開城府留守江華府留守巡察使趙相愚書
通政大夫承政院右承旨知製敎兼經筵叅賛官春秋館修撰官洪受疇篆
知中樞府事尹公旣卒之翌䄵胤子▨▨累然服衰具狀踵門請銘於余旣不敢固辭而疾病沉淹宿諾今數䄵矣▨▨旣兌喪其來請至三四而不已也嗚呼▨▨於茲役必以余爲托者有以也夫余雖昏耄惡得不寘力於兹役也公於余爲外黨姻戚習聞公孝友敦睦之行雖以或進其斤斤修筋隃於儒素之士及余之牧淸州受節度于公共一城侯朝夕畿一▨瞷公之才猷施設無不悉者已服其精悍之資敏給之具約已之採奉公之誠及公之授邊邑余按其道已而公又制其閫還移南北下上官位周旋共事首尾五年嘗記其通道於雪嶺也千章之木飇雪埋其▨虎豹豺狼並跡而群嚊余與公穿過其間約並轡宿聯幕者三日以余之孱亦能倚公增氣而不蠣不意公先逝而余獨存今迺操筆紀公事不特於余私有感舊之悲世益下人才益小爲國家備緩急思復見如公者不易得急得不重慨而永嘆也公諱天賚字代余遠祖高麗太師諱莘達爲坡平人後有門下侍中諱敦時移籍咸安入本朝有咸安府院君諱起畝是生兵曹▨判諱遘是公六代祖曾祖諱世亨順川郡守贈吏曹判書祖諱顒 贈戶曹判書考諱進卿義州府尹 贈左賛成妣淸風金氏副護軍聲振之女公以萬曆丁巳歲生▨二十八登武科內則宣傳官訓鍊院判官堂上宣傳官訓鍊院都正兼都正同知中樞府事捕盜大將都摠府副摠管都摠管知訓鍊院事知中樞府事軍門則訓鍊都監把摠千摠別將中軍御營千摠中軍禁軍別將守禦中軍外則多慶浦萬戶未赴遞信川郡守海西防禦使兼所江僉使全羅右道水使忠淸兵使永興府使咸鏡南道兵使慶尙右道兵使會寧府使咸鏡北道兵使三道統制使其於出入或有再歷三歷者焉其在信川御使啓以治理有績道臣聞以捕賊有效陞通政其在永興民有五妻各生一子而死者其妻與子曰相▨不已公招賜酒台諭之以母子兄弟之懿皆涕泣詂去同居一室以孝順稱於鄕其爲御菅千摠孝廟謁陵回閱武路次以公所領部伍整肅即除禁軍別將頻召入禁苑問兵計賜厨饍使歸選老母內廐有踶齧馬人莫敢近命公馳驟折旋茹回如凡馬上顧左右曰今之馬超也命賜其馬更敎曰馬不馴慮致傷替 賜酒連進大觥上曰飮不節則妨任事宜戒之由是感激遂斷杯其爲御營中軍 顯廟閱武露梁自壇上發號令諸將校多失措公獨擡陣移營如上指揮疾速如飛 面給廐馬及事當▨以同樞董築大興山城以都正摠督江都墩坮之役連賜廐馬以都監中軍復從閱武稱上旨又親給廐馬其在統營承上命築本營城旣圖形以進上褒以盡心氣職命加階所莅之地永興府民旣刻石去思而咸鏡南道屬邑咸興府及慶尙右兵營統營亦並有軍人追慕淸德之碑公▨至七十朝廷以胤子▨商曾經閫住推恩陞資憲乙亥公與夫人重遇同牢之▨諸子設宴以慶之公卿咸集▨▨以金紫奉壽觸一世艶稱其稀覯之福先是公以耋老退休於楊州是▨七月十二日卒訃聞停朝市致賻光禮官吊祭十月葬于所居花蝶洞先兆之次坐手之原公以將子繼世登朝典宿▨秉節鉞者五十餘▨小心如一日在所有聲屢承天褒錫與便蕃吏士追慕沒世如新雖際時升平兵革之戢不汗效褁革之志樹敵愾之功其爲朝廷瓜牙干城蓄不用之威鎭無形之難實有不可誣者夫人草溪鄭氏宣務郎文建之女媲德於公克賛內事在公時旣受命服之榮及子貴又享志物之養有五男三女男長翊商進士出後於公之再從兄▨次嗚商次衡商進士次郎▨▨武科壯元以才望顯用方任京畿水使兼三道統禦使次五商武科方任竹山府使女長適士人具以泗次適進士朴敏悌次適士人韓聖著側室一男徵商一女幼翊商三男愿慤新闡武科懋鳴商以懋爲後衡商二男憲恕▨▨二男▨▨自出及曾玄以下多不悉記 銘曰
人有恒言 道家忌將 以多阴謀 於福有妨 若吾尹公 迺以武進 將則是矣 履則在順 恩威不偏 寬猛合度 行陣輯睦 士心和附 矧又時淸 白封無警 藏用養重 奸究自屏 荷寵 累朝 身名俱達 秩登上卿 壽躋八庱 偕老有樂 再同牢食 克家有美 並建旄戟 生享其榮 沒垂其令 古有儀彬 可匹休慶 後之爲將 盍觀于公 作詩鑱石 以眛無窮
崇禎紀元周甲後十二年己卯九月 日立

 

 

 

조선국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겸지훈련원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윤공 신도비명 병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남구만(南九萬) 지음.
가의대부 경기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개성부유수 강화부유수 순찰사 조상우(趙相愚)가 글씨.
통정대부 승정원우승지 지제교 겸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 홍수주(洪受疇) 전서(篆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윤공(尹公)이 죽은 이듬해 맏아들이 상복을 입은 채 행장을 갖추고 와 나에게 비문을 지어 달라고 청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병 중에 허락한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삼년상을 마치고 그가 다시 찾아와 세 번 네 번 계속 청하였다. 아! 아! 슬프다! 이 일을 기어이 내게 부탁하는 데에는 까닭이 있으니 비록 내가 혼몽하고 늙었지만 어찌 전력을 다하지 않겠는가?
공은 나와 외척 관계여서 공의 효성과 우애, 독실한 행실은 내 익히 들어 아는 바이다. 가끔 그의 집에 가보면 부지런히 매사를 살피고 몸을 닦고 삼가서 유생다운 풍모가 있었다. 내가 청주목사가 되었을 때 공은 절도사가 되어서 한 성안에 함께 지내면서 아침저녁으로 만나곤 하던 것이 거의 1년쯤 되었다. 이때 공의 재주와 지모를 소상히 알게 되었는데 치밀하고 굳건한 자질, 민첩한 일처리, 자신을 검속하는 풍채, 공사를 받드는 성실함에 감복하였다.
공이 변방의 읍을 담당하였을 적에 나는 그 도를 맡게 되었고 얼마 뒤에는 공이 병권을 맡게 되었다. 남북으로 옮겨 다니고 관직에 오르내리며 함께 일한 지 통틀어 5년이었다. 돌이켜 보니 눈 덮인 고개에 길을 뚫었던 일이 생각난다. 수많은 나무를 휘날리는 눈이 뒤덮고 호랑이, 표범, 승량이, 이리 등의 자취가 낭자하고 그 울부짖는 소리가 처절하였다. 내가 공과 함께 그 사이를 뚫고 지나면서 말고삐를 함께 잡고 막사를 같이 쓴 것이 3일이었다. 잔약한 나는 공을 의지해 기운을 돋우어 탈이 없었는데 뜻 밖에 공이 먼저 가고 나만 홀로 남아 이제 붓을 들어 공의 일을 기록하게 되었으니 내게는 옛일을 회상하는 슬픔에 그치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갈수록 인재는 점점 줄어드니 나라의 위급한 일을 대비할 때면 공과 같은 인재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쉽게 얻을 수도 없고, 급히 얻는다 해도 중임을 얻지 못하니 길게 한탄할 뿐이다.
공의 이름은 천뢰(天賚)이고 자는 대여(代余)이다. 그의 시조는 고려태사로서 이름은 신달(莘達)이며 파평 사람이다. 후손인 문하시중 돈시(敦時)에 이르러 함안으로 이적하였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함안부원군 기묘(起畝)가 병조판서 구를 낳았는데, 공의 6대조부이다. 증조인 세향(世亨)은 순천군수를 지냈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옹이고 호조판서를 추증 받았고, 아버지 진경(進卿)은 의주부윤을 지냈으며 좌찬성을 추증 받았다. 어머니는 청풍 김씨 부호군 성진(聲振)의 딸이다.
공은 만력(萬曆) 정사 년에 태어나 28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내직으로는 선전관, 훈련원판관, 당상선전관,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 겸도정동지중추부사(兼都正同知中樞府事), 포도대장, 도총부부총관, 도총관, 지훈련원사, 지중추부사를 지냈고, 군직으로는 훈련도감 파총, 천총, 별장, 중군, 어영천총, 중군, 금군별장, 수어중군(守禦中軍)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다경포만호(多慶浦萬戶)에 제수되었다가 부임하기 전에 신천군수(信川郡守), 해서방어사 겸소강첨사, 전라우도수사, 충청병사, 영흥부사, 함경남도병사, 경상우도병사, 회령부사, 함경북도병사, 삼도통제사를 역임하였다. 관직에 나갔다 물러났다 하면서 한 직책을 두세 번 역임한 적도 있었다. 신천(信川)에 재직 중일 때 어사가 치적이 있다고 장계를 올렸고 감사는 도둑을 체포한 일로 위에 보고하였다. 공은 그 일로 통정대부로 자급이 올랐다. 영흥에 있을 적에는 다섯 아내와 다섯 아내가 하나씩 낳은 다섯 아들을 가진 사람이 죽자 아내와 아들이 날마다 서로 싸워 그치지 않는 사건이 있었다. 공이 그들을 불러 술을 주고 모자와 형제간의 사이를 깨우쳐 주자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가 한 집에 거처하면서 효도하고 화목하게 지냈다. 이 일이 일대에 소문이 났다.
공이 어영청 천총이 되었을 때의 일로 효종이 능에 배알하고 돌아오는 길에 군사를 사열하였는데, 공이 인솔한 군사의 항오가 정돈되고 엄숙하였다. 효종은 공을 금군별장에 제수하고 자주 궁중에 불러 들여 병계(兵計)에 대해 묻고는 음식을 하사하고, 집에 돌아갈 때면 노모에게 줄 음식을 싸주었다. 어용 마구간(內廐)에 아주 사나운 말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은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공에게 명을 내려 달리게 하니 유순하여 돌아올 때는 다른 평범한 말과 다름이 없었다. 왕이 측근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날의 마초(馬超)로다.” 말을 하사하라고 명하고 다시 하교하였다. “말을 길들이지 않으면 되려 해를 입는다.” 이어 술을 연거푸 하사하여 대취하자 왕이 말했다. “술을 절제하면서 마시지 않으면 임무에 방해가 되니 마땅히 경계하라.” 이 일로 감격하여 마침내 술을 끊었다.
공이 어영청중군이 되었을 적에 현종이 노량진에서 군대를 검열한 적이 있었다. 왕이 몸소 단상에 올라 호령하니 장수들이 실수를 많이 했다. 그러나 공만은 지휘하고 진을 옮기는 것이 왕이 지휘하는 것처럼 재빨랐으므로 그 자리에서 말을 하사했다. 동지중추부사로서 대흥산성(大興山城)을 쌓는 일을 감독하고 도정(都正)으로서 강화의 돈대를 세우는 일을 지휘하여 연이어 말을 하사 받았다. 훈련도감중군으로서 군사를 검열 받는 자리에서 또 칭찬을 받아 왕이 친히 말을 하사하였다. 그가 통영에 있을 때 왕명으로 성을 쌓은 적이 있었는데 성을 완성한 뒤 지도를 만들어 올리니 왕이 직무를 충실히 행한 데 대해 포상하고 자급을 높여주었다.
그가 부임했었던 영흥부의 백성들이 그의 공을 돌에 새겨 잊지 않고 있고, 함경남도의 함흥과 경상 우도(慶尙右道) 병영인 통영의 군사들이 추모하여 청덕비를 세웠다. 공의 나이가 70세가 되었을 때 조정에서는 맏아들을 추은(推恩)하여 자헌대부로 자급을 올려주었다. 을해년에는 부인과 결혼한 지 60년이 되어 자녀들이 잔치를 베풀어 축하하자 공경대부들이 모두 모여 잔을 들어 장수를 빌었으니 일세를 풍미하는 보기 드문 복이었다. 그전에 공은 늙었다는 것을 이유로 양주에 물러나 쉬고 있었다. 이해 7월 12일에 사망하여 부고가 전해지자 왕은 조시(朝市)를 정지하고 부의을 보냈으며 예관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 10월에 그가 살고 있던 화접동 선영에 장례 지냈다.
공은 장수로서 아들이 그 뒤를 이어 조정에 나갔다. 공은 부월(釜鉞)을 잡은 지 50여년이 되도록 삼가고 조심함이 한결 같아 부임한 곳마다 명성이 자자하여 여러 번 왕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변방의 관리와 군사들도 추모하는 것이 죽은 뒤에도 여전했다. 비록 무사한 때라서 변란을 당해 목숨을 바치고 적개의 공을 세우는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가 조정을 지키는 간성(干城)이라는 것과 사용하지 않은 위엄을 쌓아 형태가 없는 난을 진압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부인 초계 정씨(草溪鄭氏)는 선무랑 문건(文建)의 딸로서 덕이 있었고 공을 도와 집안일을 극진히 돌보았다. 공이 살아 있을 적에 이미 명복(命服)의 영광을 입었고 또 아들이 귀하게 되어 효도도 받았다. 아들 다섯, 딸 셋을 두었는데 큰아들 익상(翊商)은 진사로서 공의 재종형 욱의 후사가 되었다. 둘째 명상(嗚商)과 셋째 형상(衡商)은 모두 진사이고, 그 다음 아들은 무과에 장원하여 재주가 뛰어나 높이 등용되었는데 현재 경기수사 겸삼도통어사를 맡고 있다. 다섯째 오상(五商)은 무과에 급제하여 죽산부사를 맡고 있다. 큰 딸은 사인(士人) 구이사(具以泗)에게 출가하고 둘째 딸은 진사 박민제(朴敏悌)에게, 셋째 딸은 사인 한성기(韓聖著)에게 출가했다. 측실이 아들 징상(徵商)과 어린 딸 하나를 낳았다. 익상에게는 아들 셋이 있는데 원(愿)과 각(慤)은 무과에 급제했고, 무(懋) 는 명상의 후사가 되었다. 형상에게는 아들 둘이 있는데 헌(憲)과 서(恕)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한다.
명하기를,

사람들은 말한다네 집안에 장수 나는 것 꺼린다고.
음모 많아 복에 해롭기 때문이라네.
우리 윤공 같은 사람 무(武)로 현달했으니 장수라면 마땅히 이래야지.
온순함만 가려 밟고 은위는 기울지 않으며,
관용 용맹 법도에 맞아 행진은 화목하고 사졸은 따랐다네.
난이 없고 무사한 때 비축하고 군사 길러 방어 계책 강구하니
여러 조정 은총 입어 몸과 이름 영달했네.
자급은 상경이고 수 또한 80이니 해로하는 낙이 있어
동뇌(同牢) 잔치 다시 했네.
가문이 아름다워 모극을 세웠으며 살아서는 영화요 죽어서는 이름이니
옛날의 의빈이 휴경을 짝하겠네.
나중의 장수 되는 자 어찌 공을 본받지 않으리.
시를 지어 돌에 새겨 영원히 전하리라.

숭정(崇禎) 기원 주갑(周甲) 후 12년 기묘 9월에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