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영경연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
兼領經筵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신용개(申用漑)가 비문(碑文)을 지음. 자헌대부 의정부우참찬(資憲大夫 議政府右參贊) 신공제(申公濟)가
비문을 쓰고, 가선대부 전라도관찰사(嘉善大夫 全羅道觀察使) 이언호(李彦浩)가 전액(篆額)을 씀. 선비로서 세상에서
입신양명(立身揚名)하는 자는 반드시 그 근본을 먼저 세우나니, 그것으로써 체(體)를 삼고 용(用)에 이른다. 그런데 효(孝)라는 것은 실로 모든
행실의 근본이며, 충(忠)도 또한 이로 말미암아 확충(擴充)된 것이다. 만약 능히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며 뜻을 성실히 하고 행실을
돈독히 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하늘로부터 보답을 받고 후손에게 복록을 끼쳐주는 일은 마치 부신(符信)을 서로 맞추어 보듯이 확실한 것이다.
요즘 세상에서 이러한 인물을 찾아보면 참찬(參贊) 윤공(尹公)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공은 휘(諱)가 효손(孝孫)이고 자(字)가
유경(有慶)인데, 남원(南原)의 저명한 씨족(氏族)으로서 대대로 남원부(南原府)에서 살아왔다. 공은 대구현령(大邱縣令)을 지낸 휘 신을(莘乙)의
현손(玄孫)이고, 보승낭장(保勝郎將)을 지내고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된 휘 언재(彦才)의 증손(曾孫)이다. 조부(祖父)는 휘가 희(希)인데
장사감무(長沙監務)를 지내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고, 부(父)는 휘가 처관(處寬)인데 순창군지사(淳昌郡知事)를 지내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모(母)는 광산정씨(光山鄭氏)인데, 감찰(監察) 정존(鄭存)의 따님이다. 선덕(宣德) 신해년(세종 13,
1431년) 9월 계미(癸未) 일에 공을 낳았는데, 공은 유아(幼兒) 때부터 영특한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소학(小學)』을 배운 뒤에
소쇄응대(掃灑應對)하고 혼정신성(昏定晨省)하는 예절을 실천하니, 조부 참판공께서 말하기를 “이 아이가 어린데도 능히 예(禮)를 알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니, ‘효손(孝孫)’이라고 이름을 지어야 마땅하겠다” 하였다. 점차 장성(長成)함에 힘껏 배우고 학업에 정진하였으며, 품행이 단정하고
용모가 순수(純粹)하였다. 그리하여 문헌공(文憲公) 박원형(朴元亨)이 그의 이름을 듣고는 그를 만나본 다음 사위로 삼았다. 경태(景泰)
경오년(세종 32, 1450년)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계유년(단종 1, ,1453년)의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을해년(세조 1, 1455년)에는 집현전(集賢殿)에 뽑혀 들어가서 저작(著作)이 되었고,
박사(博士)로 승진되고 전농주부(典農注簿)로 옮겼다. 천순(天順) 정축년(세조 3, ,1457년)에 중시(重試)에 뽑히어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다가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옮겼다. 여러 번 천전(遷轉)하여 성균사예(成均司藝),
한성부소윤(漢城府少尹), 의정부(議政府)의 검상(檢詳)⋅사인(舍人)을 지냈다. 을유년(세조 11, 1465년)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몸을
상할 정도로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마치 장례를 치르지도 못할 듯이 보였다. 그 때 시묘(侍墓)하는 곳에 반혼당(返魂堂)을 지어놓고 조석으로
선친을 배알(拜謁)하였으며, 삼시(三時)의 설전(設奠)에도 몸소 음식들을 관장(管掌)하였는데, 3년 동안 해태(懈怠)하지 않았다. 그 곳은
집에서 10리 정도 떨어져 있었건만, 매일 아침 제전(祭奠)을 올린 다음에는 반드시 집으로 와서 모친에게 문안을 드렸다. 그러니 그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효도로써 섬기는 행실은 모두 순수한 성의(誠意)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복상(服喪)하기를 마치고 훈련원부정(訓練院副正)에
임명되었다가 곧 훈련원정(訓練院正)이 되었다. 경인년(성종 1, 1470년)에는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로 옮겼고, 원종공신(原從功臣)의
작호(爵號)를 하사받았다. 그 당시에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오례의주(五禮儀註)』를 찬술(撰述)하였는데, 공이 재정(裁定)한 부분이
많았으며, 그리함으로써 한 시대의 법전(法典)을 이룩하였다. 계사년(성종 4, 1473년)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로 올라
호조참의(戶曹參議)가 되었으나, 모친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귀향하여 모친을 봉양할 것을 청하니 특별히 전주부윤(全州府尹)을 제수하여
모친을 봉양하게 하였다. 이에 임소(任所)에 부임하자 관아에 작은 주방을 마련해놓고 부인과 함께 음식을 마련하여 모친에게 직접 음식상을 올렸다.
또 관할하는 지역 내의 노인들을 은혜롭게 구휼(救恤)하고 굶어죽는 백성들을 잘 진휼(賑恤)하여 치적(治績)이 특등(特等)에 올랐으므로,
성종(成宗)께서 글을 내려 포장(襃獎)하는 동시에 특별히 비단옷 한 벌을 하사하여 그의 치적을 표창하였다. 병신년(성종 7, 1476년)에는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더하여 공조참판(工曹參判)이 되었고,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옮겼다가 외직으로 나가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다. 임기가 만료되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 임명되었으며, 대사헌(大司憲)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한 뒤 또 귀향하여 노모를 모실 것을 요청하였다. 이어서 곧 배사(拜辭)하고 향리로 돌아와서 노모를 지성으로 봉양하였으니, 그 기간이 무릇
7년이었다. 병오년(성종 17, ,1486년)에 조정에서 공을 기용하여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삼으니, 공은 모친을 관아로 모시고 가서 봉양하기를
마치 전주부윤으로 있을 때와 꼭 같이 하였다. 얼마 아니 되어 모친이 고향집으로 돌아와서 별세하니, 공은 울부짓다가 거의 기절할 뻔하였으며,
몸이 바싹 말라 뼈만 앙상한 채로 여묘(廬墓)살이 하며 치성(致誠)하기를 한결같이 하였다. 그리고 거상(居喪)하기를 마칠 때까지 집에 내왕하지
않았으며 술잔을 입에 대지 않았다. 홍치(弘治) 기유년(성종 20, 1489년)에 복제(服制)를 마치고 다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세자우부빈객(兼世子右副賓客)이 되었다. 그 뒤 공이 명(明) 나라에 표문(表文)을 올리는 하정사(賀正使)로 갔었는데, 돌아와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중국에서 선성 선사(先聖先師)에게 제향(祭享)을 올릴 때는 모두 찬탁(饌卓)을 설치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자리만 깔고 전(奠)을
올리니 실로 숭경(崇敬)하는 뜻에 어긋납니다. 바라건대 중국의 제도를 따르소서” 하니, 임금께서 그 말을 따랐다. 신해년(성종 22,
1491년)에 품계가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올라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다. 그 때 공에게 내린 임금의 교서(敎書)에서 대략 이르기를
“효우(孝友)하는 도리로써 향리를 교화한 경우는 한두 곳이 아니고, 이름을 떨치는 명망이 진신(搢紳)들을 경동(驚動)시킨 지는 거의 40년이나
된다. 그런데 효성을 바치려는 정성 때문에 여러 차례 지방관이 되기를 자청하였다. 행실이 독실하기는 증자(曾子)나 민자건(閔子騫)과 같으니
사람들이 부모 형제의 칭찬하는 말에 이의를 달 수가 없으며, 치적(治績)이 공수(龔遂)와 황패(黃霸)를 능가하니 백성들이 탄식하고 원망하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러한 내용은 모두 실재의 행적을 표현한 것이다. 뒤에 다시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제수(除授)받고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로 올라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었으며, 이에 국법에 따라 3대(代)의 조상들에게 관직을 추증하게 되었다. 얼마 후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 임명되고 이어서 겸동지도총부도총관(兼同知都摠府都摠管) 지의금부춘추관사(知義禁府春秋館事)가 되었으며,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수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무오년(연산군 4, 1498년)에는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파직(罷職)을 당했는데,
그 해 겨울에 다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기미년(연산군 5, 1499년)에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 임명되었고,
경신년(연산군 6, 1500년)에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치사(致仕)하려고 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한 채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옮겨 맡았다. 당초에
왕세자(王世子)의 조복(朝服)이 신료(臣僚)들의 그것과 동일하였으므로, 공이 왕세자의 장복(章服)에 차등이 없어서 귀한 이를 귀하게 대우하는
뜻이 없다 하여 제도를 고칠 것을 건의한 결과 마침내 칠량원유관(七梁遠遊冠)의 제도를 확정하게 되었다. 다시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
임명되고 특별히 정헌대부(正憲大夫)의 품계로 올랐다. 계해년(연산군 9, 1503년)에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를 더하고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승진하였는데, 공은 분수에 넘는다며 굳이 사양하고 끝내 직임에 나아가지 않았다. 공은 그 해 5월 병에 걸려
23일 기축(己丑) 일에 병세가 심해졌다. 이에 부인과 여러 자식들이 심히 위독한 증세를 보고 목이 쉬도록 울부짖으니, 공이 자식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학문에 힘쓴 사람들인데, 어찌 부녀자들이나 어린 아이들과 같이 슬퍼한단 말인가” 하였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서
관대(冠帶)를 가져오게 한 다음 손수 그것을 착용하고 돌아가셨다. 그 때 향년(享年)이 73세였다. 공의 부음(訃音)이 들리자 임금께서는
조회(朝會)를 이틀이나 정지하였고, 내려주신 부물(賻物)이 많았으며, 시호(諡號)를 ‘문효(文孝)’라 하였다. 그 해 10월 3일에
남원부(南原府)의 산동(山洞) 왕점(旺岾)에 있는 임좌(壬坐)의 터에 귀장(歸葬)하였으니, 이는 선영(先塋)에다 모신
것이다. 부인(夫人)은 죽산박씨(竹山朴氏)인데, 공의 직질(職秩)에 따라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다. 부인의 선계(先系)는 곧
신라(新羅)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후예(後裔)로 대대로 한양(漢陽)에서 살았는데,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지내고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을
추증받은 휘 영충(永忠)이 증조부이고,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지내고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을 추증받은 휘 고(翶)가 조부이다. 부(父)는
문헌공(文憲公) 박원형(朴元亨)인데, 여러 대(代)의 임금을 두루 섬겼고, 사직(社稷)을 보위한 공로로 익대공신(翊戴功臣)의 호(號)를
받았으며, 벼슬이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이르렀고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封)해졌다. 이 분이 군기시직장(軍器寺直長)
우승경(禹承瓊)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선덕(宣德) 경술년(세종 12, 1430년)에 부인을 낳았다. 부인은 천성이 곧고 신실(信實)하였으며
부모에게 효순(孝順)하였다. 이에 문헌공이 보통 사람을 그의 배필로 삼아서는 아니 되겠다고 여기고 사윗감을 잘 고른 끝에 윤씨 집안으로 시집을
보내었다. 부인은 문헌공의 병환이 위독할 때 그 대변을 받아 맛을 보고 병세를 판단하였으며, 시부모를 섬김에는 혼정신성(昏定晨省)하는
예절을 폐한 적이 없었고 맛 있는 음식을 반드시 직접 만들어 드렸다. 시어머니가 편찮았을 때는 손수 변을 받아내었고 종들에게 그런 일을 맡기지
않았다. 부인은 공을 위해도 의복과 음식을 또한 극히 정갈하고 예쁘게 만들었으므로, 공이 이르기를 “사군자(士君子)는 마땅히 검소한 것을
숭상해야 하오. 어찌 화려하고 예쁜 것을 일삼겠소” 하며 극력 말리니, 부인은 “나로서는 마땅히 주부(主婦)의 직분을 다할 뿐이지, 어찌 감히
일삼기를 좋아하겠소!”라고 대답하였다. 부인에게는 두 여동생이 있었는데,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으므로 매양 옷을 뜯어서 지어 입혔다. 한
여동생은 부인보다 먼저 죽었는데, 그 염습에 소요되는 의금(衣衾) 등을 대어주고 자제들을 보내어 빈렴(殯斂)하게 하였다. 또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적에는 공은 자제들을 거느린 채 밖에서 재계(齋戒)하였고 부인은 제부(諸婦)를 거느리고 안에서 재계하였는데, 그 기간이 3일이었다. 모든
음식 그릇은 손수 씻었고,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사람을 섬김에 공의 뜻을 따라 어김이 없었다. 공이 별세했을 때 부인은 74세였는데,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다가 기절을 했고 한참 후에야 깨어났으며, 여러 날 동안 미음과 죽도 들지 않았다. 상사를 치름에 예제(禮制)를
초과하였으며, 밤낮으로 비통하게 곡읍(哭泣)하였다. 초상(初喪)에서부터 담제(禫祭)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직접 제전(祭奠)을 올렸으며, 평소의
제사(祭祀)도 한결같이 공이 살아 계셨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지냈다. 공의 제삿날을 맞으면 비통한 심정과 사모하는 심정이 더욱 절실해진 나머지
여러 자식들에게 이르기를 “얼른 죽어서 가공(家公)을 따라가고 싶었지만, 너희들을 위해서 구차스럽게 내 목숨을 오늘에까지 연장시켜 나왔다. 내가
죽은 뒤에는 가공의 무덤에 함께 묻음으로써 너희 어미 애비의 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던 소원을 이루게 해달라” 하였다. 또 그들에게 경계하여
이르기를 “너희들의 집안은 ‘효제(孝悌)를 독실히 지키고 제사를 공경스럽게 지내는 일’을 대대로 전하는 것으로서 가법(家法)을 삼았으니, 이는
사람들이 이미 다 아는 바이다. 너희들은 너희 가문의 가풍을 대대로 지켜나가도록 하되 실추됨이 없도록 매일같이 신중을 기하라”
하였다. 정덕(正德) 신미년(중종 6, 1511년)에 아들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지형(止衡)이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기를 청하니
임금께서 인근 고을의 수령으로 임명하였으며, 이어서 산음현감(山陰縣監)을 제수하였는데, 부인께서 그 임소에 따라 가셨다. 부인은 공께서 돌아가신
10년 뒤인 임신년(중종 7, 1512년) 5월 1일 갑진(甲辰) 일에 질환으로 관아에서 돌아가셨으니, 누리신 수(壽)가 83세였다. 여러
자식들은 부인의 유언을 받드는 한편 ‘부부가 함께 묻힌다’는 예문(禮文)의 뜻과 ‘합장을 함에는 동쪽 언덕을 이용한다’는 송자(宋子)의
설(說)을 따라 그 해 9월 2일 계유(癸酉) 일에 공의 무덤과 같은 혈(穴)에 모심으로써 합하여 한 묘(墓)를 이루었다. 아! 살아서는
정의(情誼)가 유별났고 죽어서는 한 무덤에 묻혔는데, 부인께서는 천수(天壽)까지 누리셨으니 길이길이 칭송을 들으시리라. 아,
아름답도다. 공은 천자(天資)가 단중(端重)했고 언소(言笑)가 적었다. 효우(孝友)하는 정성(精誠)은 젊었을 적부터 독실했으니,
혼정신성(昏定晨省)하는 여가에 산과 강으로 다니며 사냥하고 고기잡아 반찬으로 드렸으되 조석의 맛있는 음식을 반드시 부인과 함께 직접 만들어서
올렸다. 혹 반찬이 떨어진 때를 당하면 자제들을 산과 강으로 내보내었고, 자제들이 반찬 감을 획득하지 못했을 때는 공이 직접 나가서 짐승 몇
마리를 사냥하였는데, 이러한 경우가 여러 번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두고 하늘이 감동한 결과라고 말했다. 또 좋은 날이나 아름다운 경치,
생일이나 명절 등을 만나게 되면 반드시 족친(族親)들을 성대히 모아서 연회를 베풀고 축수(祝壽)하는 술잔을 올렸다. 공이 일찍이 노래 한 곡을
지었는데,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북쪽에는 둔령산(屯嶺山)이 있고 남쪽에는 지리산(智異山)이 있는데, 바라건대 이들 두 산의
수(壽)를 빌려서 만년(萬年)토록 우리 어머님 모시고 싶네. 공은 먼저 이 가사로 노래를 부르고 마침내 일어나 춤을 추었다. 무릇
어버이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어린아이의 유희 같은 동작도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거상(居喪)을 함에는 애도(哀悼)하면서
제전(祭奠)을 올리는 데에 정성을 다하였고, 평소에 지낼 때는 조석으로 사당(祠堂)에 배알(拜謁)하였으되 출타하거나 귀가한 경우에는 반드시
고(告)하였다. 초하루 보름에는 반드시 전(奠)을 올렸고 기제(忌祭) 때는 반드시 곡(哭)하였으며, 부친이 돼지 해인 정해년(丁亥年) 생이라
하여 평생토록 돼지 고기를 먹지 않았다. 종족(宗族)들과 화목하게 지냈고, 친구들을 후(厚)하게 대접했으며, 향리(鄕里)에서 처신함에는
효(孝)⋅우(友)⋅목(睦)⋅인(婣)⋅임(任)⋅휼(恤)이라는 6가지 일로써 약속(約束)한 결과 그 고을 사람들이 모두 선인(善人)으로
교화(敎化)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웃 고을에서도 그 일을 본받아 실천하였다. 집안에서 처신함에는 비록 일이 없는 한가한 때라 할지라도 무람없이
행동하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집안의 부녀자들에 대해서는 화목하게 지내면서도 엄격하였고, 자제들을 교육함에는 충(忠)과
효(孝)로써 가르쳤다. 성실과 신의로써 사람과 사물을 접(接)하였고, 공순하고 삼가는 마음을 잠시라도 잃지 않았으며, 일상에서
기거동작(起居動作)함에는 반드시 올바른 법도를 따랐다. 공무(公務)를 처리함에는 공정하고 청렴하였으며, 관위(官位)가 올라갈수록 마음은 더욱
겸손하였다. 아! 공은 덕행(德行)과 도학(道學)을 지녔으되 우뚝하여 따라갈 수 없음이 이와 같건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는 것을 구하지
않았다. 게다가 성품이 순정(純貞)한 부인을 얻어 안과 밖이 순미(純美)하게 되고 가정 교육을 잘 이루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적선(積善)한
결과 자손들이 번성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뜻을 성실히 하고 행실을 돈독히 하여 입신양명함으로써
하늘로부터 보답을 받고 후손에게 복록을 끼쳐준 경우’가 아니겠는가. 공은 8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계형(繼衡)인데, 진사시에 합격하고
풍덕군수(豊德郡守)를 지낸다. 차남은 승형(承衡)인데, 생원시에 합격하고 순천교수(順天敎授)로 있다. 삼남은 함▨형(函▨衡)인데,
통덕랑(通德郞)이다. 사남은 복형(復衡)인데, 생원시에 합격하고 의영고봉사(義盈庫奉事)로 있다. 오남은 세형(世衡)인데,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육남은 함형(函衡)인데, 종사랑(從仕郞)이다. 칠남은 지형(止衡)인데, 생원시에 합격하고 정묘년의 文科에 급제한 다음 지금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있다. 팔남은 완형(完衡)인데, 장사랑(將仕郞)이다. 딸은 후릉참봉(厚陵參奉) 허형(許衡)에게 출가하였다. 계형과
복형은 공보다 먼저 죽었다. 계형은 상장군(上將軍) 이징(李澄)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2남 1녀를 두었으니, 2남은 항(沆)과
옥(沃)이고, 1녀는 이한광(李漢光)에게 출가했다. 승형은 서령(署令) 정지율(鄭之律)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1남 1녀를 두었으니, 1남은
박(薄)으로 奉事이고, 1녀는 홍영원(洪永源)에게 출가했다. 복형은 군수 유회(柳澮)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2남 3녀를 두었다. 2남은
온(溫)과 준(濬)이고, 3녀 중 장녀는 이수춘(李壽春)에게 출가했고, 차녀는 김경(金鏡)에게 출가했으며, 3녀는 어리다. 세형은
부사(府使) 권계형(權啓衡)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1남 1녀를 두었으니, 1남은 순(洵)으로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녀는 정세량(鄭世良)에게
출가했다. 함형은 현감(縣監) 신간(申磵)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했다. 지형은 판관(判官) 이연(李演)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여 2남
2녀를 두었으니, 2남은 충(沖)과 융(瀜)이고, 2녀 중 장녀는 신홍유(愼弘猷)에게 출가했고 차녀는 어리다. 허형은 4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안국(安國)으로, 생원시에 합격하고 갑자년의 문과에 급제하여 지금 내자시판관(內資寺判官)으로 있다. 차남 이하는
안세(安世)⋅안방(安邦)⋅안민(安民)이다. 장녀는 겸사복(兼司僕) 유원(柳源)에게 출가했고, 차녀는 생원 박항(朴恒)에게
출가했다. 이리하여 내외의 자손들이 모두 51인이다. 장례를 치른 지 몇 년 뒤에 공의 아들들이 신도(神道)에 비석을 세우고자 하여
나에게 찾아와서 비명(碑銘)을 지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아! 공께서 지키는 바가 있었고 업적을 남겼으며 장수(長壽)를 누리고 훌륭한 자손들을
둠으로써 삶을 두터이 하셨고 세상에 이름을 떨치셨으니, 이러한 경우에 대해 어찌 글을 지어서 후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하노라. 근본이 세워졌음에 효성이 없어지지 않으며, 성의가 지극함에 하늘이 자손을
번성시켰는데, 교화가 가정에서 이루어진 결과 충성이 국가에까지 옮겨졌도다. 겸손하고 공순하며 신의가 두터웠으니 행실에는
법도가 있었으며, 향약(鄕約)을 세워 풍속을 순후(淳厚)하게 하니 향인(鄕人)들이 교화되어 선인(善人)으로
변했도다. 정사(政事)를 베풂에는 혜택 베풂을 우선하였으니 백성들의 곤궁을 면하게 해주었네.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이름을
날렸고 정승이 되어서 국사를 다스렸으며, 천수(天壽)를 누려 보답을 받았으니 이것이 곧 하늘이 내려주신 복이라네. 착한
일은 모두 후세에 전해야 하니 비석에 새기는 일 어찌 뒤질소냐. 나의 말이 틀리지 않았으니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리라. 음기(陰記)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영경연사 감춘추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 兼領經筵事 監春秋館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知成均館事) 이행(李荇)이 음기(陰記)를 지음. 비석의 뒷면에 글을 쓰는 일은
옛날부터 있었으니, 그것은 앞서 쓴 글의 미비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이며 또한 혹 경앙(景仰)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스스로 억누를 수 없기
때문이다. 아! 문효공(文孝公)의 독실한 행실과 착실한 행적은 아름답게 빛나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이니, 태상시(太常寺)에서 내려준 시호(諡號)에
대해서는 박 공간공(朴恭簡公)이 쓴 시장(諡狀)이 있고, 무덤 속의 지석(誌石)에 쓴 글은 성 문대공(成文戴公)의 지문(誌文)이 있으며,
신도비(神道碑)에 쓴 글은 신 문경공(申文景公)의 비명(碑銘)이 있다. 따라서 공에 대한 기록은 가히 잘 갖추어져서 남김이 없다 할 수
있겠으니, 어찌 한 마디의 군더더기 말을 더 붙일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공이 사국(史局)에서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수할 때 내가
요속(僚屬)으로서 공을 모셨으니, 지금 따져보면 벌써 30여 년이나 되었건만 경앙하는 마음이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다. 아!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래되어도 잊지 않게 하는 점이니, 이 음기를 쓰는 이유가 실로 여기에 있다. 내가 평소에 늘 공의 덕행에 감복하였으니, 공은 스스로
처신함에는 간이(簡易)하였고 어버이를 섬김에는 효성스러웠으며, 공무를 보살핌에는 부지런하였고, 사람들을 대우함에는 정성스러웠다. 지금
제공(諸公)의 칭송하는 말도 다 그러하니, 더욱 내가 마음에서 잊지 못하는 것이 구차하지 않다는 이유를 징험할 수 있다. 나는 공의 아들인
부윤(府尹) 공과 친하게 지내는 사이인데, 그는 그 가문의 전통을 잘 물려받았고 또한 공의 순효(純孝)만을 이어받았다. 그가
전주부윤(全州부윤(府尹))으로 나왔을 때 사람들 중에는 그가 능력에 비해 낮은 관직을 얻었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 자신은 고향
근처 고을의 수령 직을 얻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으며, 더욱 선덕(先德)을 현양(顯揚)해서 후세에 영원히 전할 것을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참으로 ‘죽은 이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이 하여, 효자가 끊어지지 않고 영원히 복록을 내려준다’는 경우가 어찌 여기에 해당되지
않겠는가. 부윤 공은 곧 앞의 비문에 나온 이조정랑(吏曹正郞) 군이다. 그가 아들 생원 충(沖)을 나에게 보내어 이 글을 지어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니 이 음기 짓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이미 서문을 쓴 다음 이어서 아래와 같이 명(銘)한다. 둔령산(屯嶺山)이
북쪽에 있고 지리산(智異山)이 남쪽에 있는데, 문효공(文孝公)의 행실은 내가 잘 알고 있다네. 흐르는 강물은 근원이
있어서 그 흐름이 호탕(浩蕩)하구나. 문효공의 복록은 한 없이 이어지리. 이를 어떻게 증명하나 하면 이미
선정(先正)들의 말이 있다네. 내가 이 음기를 적어서 후세에 인멸됨이 없게 하노라. 가정(嘉靖) 7년 1528년(중종 23년)
12월 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