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 자료/파평윤씨 자료

38. 윤훈거 지석문(尹勛擧 誌石文)

물텀벙 2015. 3. 14. 11:02

38. 윤훈거 지석문(尹勛擧 誌石文)

 

 

 

1708년에 만든 윤훈거지석(尹勛擧誌石)이다. 동생인 윤문거(尹文擧)가 글을 지었고, 증손인 윤동노(尹東魯)가 묘지를 묻었다.
지석에 따르면 윤훈거의 자(字)는 백용(伯庸)으로 본관(本貫)은 파평(坡平)이다. 광해군조에 억울한 일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억울함이 풀리고 녹용(錄用)되어 선공감역(繕工監役)이 되었다.

지석에는 공의 관력과 가계가 실려있다.

 

 

 

高山縣監 尹勛擧 誌石

有明朝鮮國通訓大夫行高山縣監贈通政大夫承政阮左承旨兼經筵參贊官尹公墓誌
弟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同知春秋館事文擧撰
公諱勛擧字伯庸姓尹氏坡平人先考行大司諫諱煌先妣貞夫人昌寧成氏內外世德載先考墓碑故不復詳焉公生於萬曆辛卯五月戊子及長爲觀察使崔公沂壻崔公器重之每事必詢公光海丁巳崔公以海州牧被禍世所謂海獄者也獄事之初起也崔公之族子有海欲以許搆群小吏之自相기齕而
事得以中解公以爲以小人攻小人必無成理而禍當益烈旣而果然其識憲之遠如此公遂坐累受訊謫順天天啓癸亥 仁祖反正昭雪究枉錄用公爲繕工監役時季父司議公未仕先君子欲其成名以悅親令公去官以讓之於是司議公得爲公之代而公則越五年丁卯始復氷庫別檢已巳遷長興庫直長明年陞典牲署主簿移司憲府監察冬拜高山縣監適有量田之擧公括得陳田以充元結而用減高等又築堤兩大川以灌荒野民至于今賴之秩滿解歸丙子復司畜署別坐是冬奉母夫人避兵于江都
明年丁丑春先君子以斥和被譴擧家歸鄕而公亦不復仕矣己卯六月先君子棄世公哀毁得疾以是月二十五日歿子苫次壽四十有九卜葬于尼山縣西長久洞辛向之原後十年戊子先妣之喪也遷先考墓合窆于其上淑人首陽崔氏生一子曰抃文科司諫院司諫繼室全州李氏經歷長亨之女生一男日攇奉事二女適李相夔朴尙絪側室一女壻日同知李稃司諫初娶正郞趙溭女生二男敬教文科弘文館副提學誠教文科吉州牧使再娶李績女生一女適李寬三娶進士黃德通女生一男明教進士二
女長適徐梓天次適李宇華奉事娶縣監趙廷鸞女生一男正教三女適李汝珏○琥安益舒李相夔一男一女朴尙絪三男一女敬教一男東魯女趙泰老也誠教一男東周三女李禎邦李宜撛李命新也明教四男二女正教一女嗚呼公天資厚重哭識過人幹蠱得親心居官能有以惠利民吾諸弟皆不及也而少治公車業竟不能大闡官與年俱止於此此則命也崔淑人始葬于先塋之內歲丁未遷祔于公墓之右李淑人後公四年而終祔于公墓之左同原而異壙爲三墳焉公嘗參昭武從勳追贈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兼 經筵參贊官二淑人竝 贈淑夫人
崇禎紀元之後八十二年戊子五月 日曾孫東魯謹書 墓誌埋子壙南如式

 

 

 

조선(朝鮮)통훈대부행고산현감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通訓大夫行高山縣監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 윤공묘지(尹公墓誌) 
아우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겸 지춘추관사(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同知春秋館事) 문거(文擧)는 찬(撰)하노라.

공(公)의 휘)諱)는 훈거(勛擧) 자(字)는 백용(伯庸), 성(姓)은 윤씨(尹氏)로 본관(本貫)이 파평(坡平)이다. 선고(先考)는 행대사간(行大司諫) 휘(諱) 황(煌), 선정부인(先貞夫人)은 본관이 창령(昌寧) 성씨(成氏)로 내외의 세덕(世德)이 선고(先考)의 묘비(墓碑)에 실려 있어 다시 자세히 기록하지 않는다.
공(公)은 만력(萬曆) 신묘(辛卯) 5월 무자(戊子)에 태어났다. 자라서는 관찰사(觀察使) 최공(崔公) 기(沂)의 사위가 되었다. 최공(崔公)은 그릇됨이 중하게 여겨 매번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공(公)에게 물었다. 광해(光海) 정사년(丁巳年)에 최공(崔公)이 해주목(海州牧)으로 있으면서 화(禍)를 당했으니 세상 사람들이
해옥(海獄)이라고 하는 것 이다. 해옥(獄事)이 막 일어났을 때 최공(崔公)의 조카들이 해주(海州)에 있으면서 뭇 아전들과 서로 ~ 결 ~ 를 허락하여 일로 중간에 해임이 되었다. 공(公)은 소인이라고 소인들에게 공격을 받아 기어코 이치를 이루지 못했음에도 화가 더욱 거세졌다.
얼마 후 과연 이처럼 법이 멀어져 공(公)이 드디어 연좌되어 순천(順天)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천지신명의 계시로 계해(癸亥)에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억울함이 풀리고
녹용(錄用)되어 공(公)이 선공감역(繕工監役)이 되었다. 당시 계부(季父) 사의공(司議公)이 벼슬을 하기 전이라 선군자(先君子)가 이름을 이루어 친령공(親令公)을 기쁘게 하기 위해 벼슬을 떠나 그에게 사양하였다. 이에 사의공(司議公)이 공을 대신하여 벼슬을 하게 되었다. 공(公)은 5년이 지난 정묘(丁卯)에 비로소 빙고별검(氷庫別檢)에 관직이 회복이 되었다. 기사(已巳)에 장흥고직장(長興庫直長)으로 옮기고 다음해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에 올랐다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옮기게 된다. 겨울에 고산현감(高山縣監)으로 제수되었다. 마침 논을 측량하는 일이 있었는데 공이 일괄 묵은 밭을 원결(元結)에 충당하여 높은 곳은 깎고 또 큰 내의 양쪽에 둑을 쌓아 관개(灌漑)를 하여 야민(野民)들이 지금껏 힘입고 있다. 벼슬의 임기가 끝나 돌아와 병자(丙子)에 다기 사축서별좌(司畜署別坐)가 되었다. 이해 겨울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도(江華島)로 난리를 피했다가 다음해 정축(丁丑) 봄에 선친(先親)이 척화(斥和)을 하다가 벼슬에서 쫓겨나게 되어 가족들 모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공(公) 역시 다시 벼슬하지 않았다. 기묘(己卯) 6월 선친(先親)이 세상을 떠나자 공(公)이 쇠약하고 몸이 상해 병을 얻어 이달 25일 죽게 되었다. 향년 49세였다. 니산현(尼山縣) 서쪽 장구동(長久洞) 신향(辛向)의 언덕에 장사를 치루었다. 그 뒤 10년 무자(戊子)에 어머니의 초상이 있었다. 선고(先考)의 묘를 옮겨 그 위로 합장을 하였다. 숙인(淑人) 수양최씨(首陽崔氏)는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변(抃)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가간원사간(司諫院司諫)이 되었고, 계실(繼室) 전주이씨(全州李氏)는 경력(經歷) 장형(長亨)의 딸로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헌()은 봉사(奉事)이다. 두 딸은 이상기(李相夔)와 이상인(朴尙絪)의 측실(側室)이 되었다. 한 딸의 사위는 동지(同知) 이부사간(李司諫)은 처음 정랑(正郞) 조직(趙)의 딸에게 장가를 가 2남을 낳았다. 경교(敬敎)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이고 성▨(誠▨)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길주목사(吉州牧使)가 되어 이적(李績)의 딸에게 두 번 째 장가를 가서 딸 하나를 낳았다. 그 딸은 이관(李寬)에게 시집을 갔다. 세 번 째 진사(進士) 황덕통(黃德通)의 딸에게 장가를 가서 아들 명교(明敎)를 낳았는데, 진사(進士)이다. 두 딸 중 장녀(長女)는 서재천(徐梓天)에게 시집을 갔고 두 번째 딸은 이우화(李宇華)에게 시집을 갔다. 봉사(奉事)는 현감(縣監) 조정난(趙廷鸞)의 딸에게 장가를 가서 아들 정교(正敎)을 낳았고 세 딸은 이여각(李汝珏), ○호(○琥), 안익서(安益舒)에게 시집을 갔다. 이상기(李相夔)는 1남 1녀를 두었고, 박상인(朴尙絪)은 3남 1녀를 낳았다. 경교(敬敎)의 1남(男)一 동노(東魯)이고 사위는 조태노(趙泰老)이다. 성교(誠敎)의 1남(男)은 동주(東周)이고 세 사위는 이정방(李禎邦), 이의린(李宜), 이명신(李命新)이다. 명교(明敎)의 4남(男) 2년(女)를 낳았고 정교(正敎)은 1녀(女)를 낳았다. 공(公)은 타고난 자질이 무게가 있고 기량과 식견이 남보다 뛰어나 부모의 일을 잘 처리하여 어버이의 마음을 얻었다. 벼슬에 있으면서 능히 은혜로 백성들을 이롭게 하여 우리여러 동생들 모두 그기에 미칠 수가 없었다. 어려서 과거공부를 하였지만 끝내 급제를 하지 못하고 벼슬과 나이와 더불어 여기에서 끝났으니 이것은 운명이다. 최숙인(崔淑人)을 비로소 선영(先塋)의 안에 장례를 치루었다가 정미(丁未)에 공의 묘소 오른쪽으로 옮겼다. 이숙인(李淑人)은 뒤에 공(公)이 죽은지 4년 뒤에 죽어 공(公)의 묘소 왼족에 같은 언덕, 다른 무덤에 장례를 지루어 세 분묘가 되었다. 공(公)은 일찍이 소무종훈(昭武從勳)에 참여하여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 經筵參贊官)에 추증이 되었고 두 숙인(淑人)도 모두 숙부인(淑夫人)에 추증이 되었다.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82년 무자(戊子) 5월 0일 증손 동노(東魯)는 삼가 묘지(墓誌)를 쓰고 무덤의 남쪽에 법식대로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