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조선국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행통훈대부한성부서윤윤공의묘표 음기 숭록대부 의정부우찬성
겸 성균관제주 송시열 지음
팔송(八松) 윤공(尹公 : 윤황(尹煌)이 여러 형제들과 더불어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기쁜 모습으로
해를 보냄에 매우 화락(和樂)하고도 즐거웠으니, 그것은 대개 천하의 즐거움을 가지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었다. 무릇 세상 사람들로서 부모 형제를
가진 사람 치고 어느 누구도 그들을 부러워하면서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들 형제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이름이 흡(熻)이요, 자(字)가
경탁(景濯)인 서윤공(庶尹公)이다. 공은 형제들 중에서의 순서는 네 번째이다. 공은 젊은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고 모부인으로부터 교육을
받았는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잘 단속하고 과정(課程)대로 학업을 잘 닦았다. 30세 때 기유년(1609, 광해군 1)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문음(門蔭)으로 이인도찰방(利仁道察訪)에 보임(補任)되었다. 당시에 나라에서 정사(政事)를 행하지 않았으므로, 수령(守令)이 된
자들은 오로지 백성들을 침탈(侵奪)하기를 일삼았다. 그러나 공은 시속(時俗)을 따르지 않으면서 자신을 살찌우는 일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계해년(1623, 인조 1)에 인조대왕(仁祖大王)께서 외방의 관원들에 대해 포폄(褒貶)을 행함으로써 새로운 정치를 베풀도록 명하셨는데, 그 때
직지사(直指使 : 암행어사(暗行御史)의 별칭)가 공을 도내(道內)에서 수석(首席)으로 포장(褒獎)하였으므로 마침내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로
승서(陞敍)되었다. 이때부터 장례원사평(掌隸院司評), 형조(刑曹), 호조(戶曹)의 좌랑(佐郞),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 장수현감(長水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장례원사평으로 있을 때는 선주(選注)로 인해 영남(嶺南)의 기민(饑民)들을 진휼(賑恤)하게 되었는데, 공이 그 고을 백성들을
위해 마음을 다해 어루만져주고 온갖 사무를 총괄하였으므로 서리(胥吏)들과 백성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공의 은혜를 칭송하였다. 이러하였으므로
열 번을 고과(考課)해서 모두 수석을 차지하였다. 계유년(1633, 인조 11)에 한성부 서윤으로 승진되었다가 졸(卒)하였으니, 그해
2월 3일이었다. 공의 배위(配位)는 남원윤씨(南原尹氏)이니, 증 판서 윤기(尹祁)의 따님이며, 총명하고 근민(勤敏)하였는데, 어려서
여훈(女訓)을 익혔으므로 자녀들을 교육함에 잘못을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공이 졸한 뒤 여묘(廬墓)살이를 하면서 상기(喪期)를 마쳤는데, 그
뒤 13년 동안 계속 소찬(素餐)을 들고 육식을 하지 않았으며, 겨울에는 솜옷을 입지 않았고 여름에는 시원한 옷을 입지 않았다. 80세 되던
계묘년(1663, 현종 4) 5월에 감기가 들어서 8월 16일에 별세하였고, 10월 9일에 진잠현(鎭岑縣)의 구봉산(九峯山) 아래에 있는
임좌(壬坐)의 자리에 공을 따라 장례를 지냈다. 공은 본관이 파평(坡平)이니, 시조 윤신달(尹莘達)은 고려의 태사(太師)를 지냈다. 공의
고조부 탁(倬)은 조선 중종조(中宗朝) 때 조문정공(趙文正公 : 조광조(趙光祖) 등의 제현(諸賢)들과 서로 추중(推重)하였는데, 오래도록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다. 증조부 선지(先智)는 절도사(節度使)를 지냈다. 조부 돈(暾)과 선고(先考) 창세(昌世)는 벼슬하지 않았는데, 모두
추은(追恩)하여 승지(承旨)와 참판(參判)을 추증하였으며,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은 실로 참판공의 묘명(墓銘)을 지었다. 공의
선비(先妣)는 경씨(慶氏)이니, 부제학(副提學) 경혼(慶渾)이 부친이다. 공은 아들과 딸이 각각 모두 5인이다. 장남은 운거(雲擧)이니,
현감을 지냈는데, 호종(扈從)한 공훈으로 공에게 승지의 벼슬을 추증하였으며 남원윤씨 부인도 진고(眞誥)를 받았다. 장남 아래의 아들들은 군수인
홍거(鴻擧), 참봉인 명거(溟擧), 해거(海擧)이고, 막내아들인 봉거(鳳擧)는 양자로 나가서 계부(季父)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여서(女壻)는
목사 윤형각(尹衡覺), 군수 이시중(李時中), 신성(申晟), 진사(進士) 정유석(鄭有錫)이며, 딸 하나는 요사(夭死)하였다. 군수 이씨의 딸은
호란(胡亂) 때 호적(胡賊)이 핍박해 들어오자 자살하였다. 운거는 참판 김광현(金光炫)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섬(掞)을 낳았고, 측실의 소생이 1녀 2남인데 모두 어리다. 홍거는 판서 최내길(崔來吉)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항(抗)·총(摠)을 낳았는데, 항은 현감이다. 딸 넷은 정정양(鄭正陽), 홍수주(洪受疇), 박태진(朴泰辰),
이우휘(李又輝)에게 출가하였고, 딸 하나는 어리다. 명거는 참지 이상급(李相伋)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식(拭), 억(抑),
택(擇)을 낳았으나, 첫째와 둘째는 요사(夭死)하였다. 딸 둘은 이황령(李皇齡)과 양극가(梁克家)에게 출가하였고 딸 둘은 어리다. 해거는
7남을 두었으니, 휘(撝), 채(採), 제(提), 구(捄), 강(扛), 부(扶), 지(持)이고, 딸 둘은 모두 어리다. 봉거는 아들이
해(扌+皆)인데, 해는 진사시에 합격하고 요사하였다. 윤형각의 아들은 감역 빈(彬), 진사 번(樊), 무(楙)이고, 딸 셋은 도사
김수민(金壽民), 수찬 이유상(李有相), 대사간 김수흥(金壽興)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이시중의 아들은 세장(世章)과 세만(世萬)인데,
맏이는 참군이다. 신성의 맏딸은 이구(李求+頁)에게 출가하였고, 아들과 작은 딸은 어리다. 정유석은 4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관주(觀周)이고, 딸은 송지정(宋之挺)에게 출가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내외의 증손 및 현손들은 거의 100명 정도나
된다. 공은 옛날 대갓집의 자손으로서 가문 내에 부끄러운 행실이 없었고 집안 내에 무도한 일이 없었으며, 또 재주로써 스스로를 나타내었고
실질적인 혜택이 영남에서 드러났다. 처음 벼슬한 때로부터 졸년(卒年)에 이르기까지 경씨부인(慶氏夫人)에 대한 거상(居喪) 기간을 제외하고는
관위(官位)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안팎에서 모두들 지시(指示)한 일로써 칭송하였으니, 사람들이 훌륭한 부형을 둔 것을 즐겁게 여김은
까닭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공의 자손들이 번성한 일도 또한 어찌 말미암은 바가 없다 하겠는가? 팔송(八松)은 휘(諱)가 황(煌)이고
자(字)가 덕요(德耀)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집안에 만 칸이나 되는 곡식 창고를 지녔더라도 대청 마루에서
하루 동안의 즐거움을 즐길 수가 없고, 벼슬이 혹 정승 판서의 자리에 오를지라도 가문의 한 자식이 이어나가기 어려운
법이다. 구봉산 아래의 산소 자리여, 산이 둘러 싸고 물이 감돌아 나가니, 또한 혼백이 편안하리로다. 아, 윤공께서
부족함이 없으리니, 내가 무엇을 한탄하겠는가.
가선대부(嘉善大夫)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인종자(從子)문거(文擧)가 공경히
씀. 숭정기원(崇禎紀元) 무진년(1628, 인조 6) 후 38년 을사년(1665, 현종 6) 10월 일에 묘표를
세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