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 자료/파평윤씨 자료

39. 윤흡 묘표문(尹熻 墓表文)

물텀벙 2015. 3. 14. 11:04

39. 윤흡 묘표문(尹熻 墓表文)

 

 

 

1665년(현종 6)에 세워진 윤흡(尹熻)의 묘표이다.

찬자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며, 서자는 윤문거(1606~1672)로 윤흡의 조카이다.
윤흡(1580~1633)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사간으로서 극력 척화를 주장한 윤황(1572~1639)의 동생이다. 조선 인조 때 한성부 서윤을 지냈으며, 5남 5녀를 두었다. 묘표 음기의 전반부는 청렴하고 총명했던 윤흡의 생애에 관한 것이고 중·후반부에서는 가계, 특히 그의 자식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파평윤씨 서윤공파 고택은 조선 인조대에 한성부 서윤을 지낸 윤흡의 장손자 윤섬 때인 약 300여년 전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현재는 잦은 개보수로 본래보다 상당히 축소되어 비교적 안채만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고택 뒤로는 구봉산에서 비롯한 야산이 감싸고 있으며, 이 야산 기슭에 윤흡의 묘가 위치한다.

이곳은 본래 5형제 가운데 둘째형인 윤황이 잡은 자리였다. 그런데 넷째인 동생 윤흡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묘를 썼다고 전한다. 묘에는 각각 한 쌍 씩의 동자석과 망주석, 문인석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동자석은 5년 전 도굴과 함께 도난당하여 새로 제작한 것이다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 行通訓大夫漢城府庶尹尹公諱熻之墓
配淑夫人南原尹氏袝左

有明朝鮮國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行通訓大夫漢城府庶尹尹公墓表陰記
崇祿大夫議政府右贊成兼成均館祭酒宋時烈撰

八松尹公與羣兄弟奉侍母夫人怡愉終歲旣和且湛天下之樂盖無以易此凡世之有父母兄弟者無不歆艶而稱慕焉其一卽庶尹公諱熻字景濯者也公於序爲第四公少孤受敎母夫人能自飭躬課學三十中己酉司馬蔭補利仁道察訪時國無政事爲官者只事侵漁公能不隨俗近膩癸亥 仁祖大王命行陟罰于外方以張新政直指使褒公爲一道㝡遂陞叙主軍資監簿自是遷拜掌隷院司評刑戶曺佐郞漢城府判官長水縣監爲司評時以選往賑嶺南飢民其爲縣盡心撫摩綜理庶務吏民立去思碑以頌之用十考最癸酉陞漢城府庶尹以卒其二月初三日也配南原尹氏贈判書祁之女聰明勤敏幼習女訓誨督子女無少假借公殁廬墓終喪十三年仍食素不肉冬不絮夏不淸凉年八十癸卯五月感疾八月十八日終十月九日從葬于鎭岑縣九峯山下負壬之原公系出坡平始祖莘達高麗大師高祖倬我中廟朝與趙文正諸賢相推重常長國子曾祖先智節度使祖暾考昌世不仕皆以追 恩贈承旨參判金淸陰尙憲實銘參判公墓妣慶氏副提學渾其父也公男女皆五人長男雲擧縣監以從勳 贈公承旨尹夫人故在受眞誥次郡守鴻擧參奉溟擧海擧㝡季鳳擧出爲季父後女壻牧使尹衡覺郡守李時中申晟鄭有錫進士一女夭李氏女虜變寇逼自殺雲擧娶參判金光炫女生男掞側出一女二男皆幼鴻擧娶判書崔來吉女生男抗摠抗縣監四女適鄭正陽洪受疇朴泰辰李又輝一女幼溟擧娶參知李尙伋女生男拭抑擇伯仲夭一女適李星齡梁克家二女幼海擧七男撝採提捄扛扶扶二女皆幼鳳擧男揩進士早夭尹衡覺男監役彬進士攀楙三女適都事金壽民修撰李有相大司諫金壽興李時中男世章世萬長參軍申晟長女適 李▨男及一女幼鄭有錫四男三女男長觀周女適宋之挺餘皆幼外內曾玄殆百許人公以故大家子門內無媿行家內無荒事又以才諝自見實惠著於今嶺自始仕以至亡年除慶夫人喪制外官位未嘗不在外內皆以耆事稱人樂有賢父兄有以㢤其子孫之蕃衍亦豈無所由㢤八松公諱煌德耀其字也銘曰室有囷倉之萬間而不得廳堂一日之歡官或有三台八座之登而難有門䦨一兒之承九峯之原兮山回而水盤又靈魄之所安吁嗟乎尹公無不足子奚所歎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從子文擧 敬書
崇禎紀元戊辰後三十八年乙巳十月 日立

 

 

 

윤흡묘표음기

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행통훈대부한성부서윤윤공휘흡의 묘
숙부인 남원윤씨를 부좌(祔左)함

유명조선국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행통훈대부한성부서윤윤공의묘표 음기
숭록대부 의정부우찬성 겸 성균관제주 송시열 지음

팔송(八松) 윤공(尹公 : 윤황(尹煌)이 여러 형제들과 더불어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기쁜 모습으로 해를 보냄에 매우 화락(和樂)하고도 즐거웠으니, 그것은 대개 천하의 즐거움을 가지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었다. 무릇 세상 사람들로서 부모 형제를 가진 사람 치고 어느 누구도 그들을 부러워하면서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들 형제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이름이 흡(熻)이요, 자(字)가 경탁(景濯)인 서윤공(庶尹公)이다. 공은 형제들 중에서의 순서는 네 번째이다.
공은 젊은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고 모부인으로부터 교육을 받았는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잘 단속하고 과정(課程)대로 학업을 잘 닦았다. 30세 때 기유년(1609, 광해군 1)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문음(門蔭)으로 이인도찰방(利仁道察訪)에 보임(補任)되었다. 당시에 나라에서 정사(政事)를 행하지 않았으므로, 수령(守令)이 된 자들은 오로지 백성들을 침탈(侵奪)하기를 일삼았다. 그러나 공은 시속(時俗)을 따르지 않으면서 자신을 살찌우는 일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계해년(1623, 인조 1)에 인조대왕(仁祖大王)께서 외방의 관원들에 대해 포폄(褒貶)을 행함으로써 새로운 정치를 베풀도록 명하셨는데, 그 때 직지사(直指使 : 암행어사(暗行御史)의 별칭)가 공을 도내(道內)에서 수석(首席)으로 포장(褒獎)하였으므로 마침내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로 승서(陞敍)되었다. 이때부터 장례원사평(掌隸院司評), 형조(刑曹), 호조(戶曹)의 좌랑(佐郞),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 장수현감(長水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장례원사평으로 있을 때는 선주(選注)로 인해 영남(嶺南)의 기민(饑民)들을 진휼(賑恤)하게 되었는데, 공이 그 고을 백성들을 위해 마음을 다해 어루만져주고 온갖 사무를 총괄하였으므로 서리(胥吏)들과 백성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공의 은혜를 칭송하였다. 이러하였으므로 열 번을 고과(考課)해서 모두 수석을 차지하였다.
계유년(1633, 인조 11)에 한성부 서윤으로 승진되었다가 졸(卒)하였으니, 그해 2월 3일이었다.
공의 배위(配位)는 남원윤씨(南原尹氏)이니, 증 판서 윤기(尹祁)의 따님이며, 총명하고 근민(勤敏)하였는데, 어려서 여훈(女訓)을 익혔으므로 자녀들을 교육함에 잘못을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공이 졸한 뒤 여묘(廬墓)살이를 하면서 상기(喪期)를 마쳤는데, 그 뒤 13년 동안 계속 소찬(素餐)을 들고 육식을 하지 않았으며, 겨울에는 솜옷을 입지 않았고 여름에는 시원한 옷을 입지 않았다. 80세 되던 계묘년(1663, 현종 4) 5월에 감기가 들어서 8월 16일에 별세하였고, 10월 9일에 진잠현(鎭岑縣)의 구봉산(九峯山) 아래에 있는 임좌(壬坐)의 자리에 공을 따라 장례를 지냈다.
공은 본관이 파평(坡平)이니, 시조 윤신달(尹莘達)은 고려의 태사(太師)를 지냈다. 공의 고조부 탁(倬)은 조선 중종조(中宗朝) 때 조문정공(趙文正公 : 조광조(趙光祖) 등의 제현(諸賢)들과 서로 추중(推重)하였는데, 오래도록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다. 증조부 선지(先智)는 절도사(節度使)를 지냈다. 조부 돈(暾)과 선고(先考) 창세(昌世)는 벼슬하지 않았는데, 모두 추은(追恩)하여 승지(承旨)와 참판(參判)을 추증하였으며,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은 실로 참판공의 묘명(墓銘)을 지었다. 공의 선비(先妣)는 경씨(慶氏)이니, 부제학(副提學) 경혼(慶渾)이 부친이다.
공은 아들과 딸이 각각 모두 5인이다. 장남은 운거(雲擧)이니, 현감을 지냈는데, 호종(扈從)한 공훈으로 공에게 승지의 벼슬을 추증하였으며 남원윤씨 부인도 진고(眞誥)를 받았다. 장남 아래의 아들들은 군수인 홍거(鴻擧), 참봉인 명거(溟擧), 해거(海擧)이고, 막내아들인 봉거(鳳擧)는 양자로 나가서 계부(季父)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여서(女壻)는 목사 윤형각(尹衡覺), 군수 이시중(李時中), 신성(申晟), 진사(進士) 정유석(鄭有錫)이며, 딸 하나는 요사(夭死)하였다. 군수 이씨의 딸은 호란(胡亂) 때 호적(胡賊)이 핍박해 들어오자 자살하였다.
운거는 참판 김광현(金光炫)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섬(
)을 낳았고, 측실의 소생이 1녀 2남인데 모두 어리다.
홍거는 판서 최내길(崔來吉)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항(抗)·총(摠)을 낳았는데, 항은 현감이다. 딸 넷은 정정양(鄭正陽), 홍수주(洪受疇), 박태진(朴泰辰), 이우휘(李又輝)에게 출가하였고, 딸 하나는 어리다.
명거는 참지 이상급(李相伋)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식(拭), 억(抑), 택(擇)을 낳았으나, 첫째와 둘째는 요사(夭死)하였다. 딸 둘은 이황령(李皇齡)과 양극가(梁克家)에게 출가하였고 딸 둘은 어리다.
해거는 7남을 두었으니, 휘(撝), 채(採), 제(提), 구(捄), 강(扛), 부(扶), 지(持)이고, 딸 둘은 모두 어리다.
봉거는 아들이 해(扌+皆)인데, 해는 진사시에 합격하고 요사하였다.
윤형각의 아들은 감역 빈(彬), 진사 번(樊), 무(楙)이고, 딸 셋은 도사 김수민(金壽民), 수찬 이유상(李有相), 대사간 김수흥(金壽興)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이시중의 아들은 세장(世章)과 세만(世萬)인데, 맏이는 참군이다.
신성의 맏딸은 이구(李求+頁)에게 출가하였고, 아들과 작은 딸은 어리다.
정유석은 4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관주(觀周)이고, 딸은 송지정(宋之挺)에게 출가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내외의 증손 및 현손들은 거의 100명 정도나 된다.
공은 옛날 대갓집의 자손으로서 가문 내에 부끄러운 행실이 없었고 집안 내에 무도한 일이 없었으며, 또 재주로써 스스로를 나타내었고 실질적인 혜택이 영남에서 드러났다. 처음 벼슬한 때로부터 졸년(卒年)에 이르기까지 경씨부인(慶氏夫人)에 대한 거상(居喪) 기간을 제외하고는 관위(官位)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안팎에서 모두들 지시(指示)한 일로써 칭송하였으니, 사람들이 훌륭한 부형을 둔 것을 즐겁게 여김은 까닭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공의 자손들이 번성한 일도 또한 어찌 말미암은 바가 없다 하겠는가?
팔송(八松)은 휘(諱)가 황(煌)이고 자(字)가 덕요(德耀)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집안에 만 칸이나 되는 곡식 창고를 지녔더라도
대청 마루에서 하루 동안의 즐거움을 즐길 수가 없고,
벼슬이 혹 정승 판서의 자리에 오를지라도
가문의 한 자식이 이어나가기 어려운 법이다.
구봉산 아래의 산소 자리여,
산이 둘러 싸고 물이 감돌아 나가니,
또한 혼백이 편안하리로다.
아, 윤공께서 부족함이 없으리니,
내가 무엇을 한탄하겠는가.

가선대부(嘉善大夫)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인종자(從子)문거(文擧)가 공경히 씀.
숭정기원(崇禎紀元) 무진년(1628, 인조 6) 후 38년 을사년(1665, 현종 6) 10월 일에 묘표를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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